선교학

모라비안(Moravian)운동이 선교역사에 끼친 영향

주 바나바 2019. 10. 6. 08:43

 

모라비안(Moravian)운동이 선교역사에 끼친 영향

 


 

들어가는 말

 

개신교의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때서야 많은 개신교도들은 복음이 없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을 한 첫 번째 그룹은 루터교의 경건주의 자들이었다. 그리고 덴마크의 할례 선교회는 코펜하겐에 선교사 대학을 설립하여 선교활동을 이루어 나갔다. 당시 할례선교회는 할례대학의 선교사만도 60여명이 넘는 큰 성장을 이루었다. 당시 할레대학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또 한 그룹이 선교일선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선교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진젠돌프 백작의 주도하에 일어난 모라비아 형제회라는 지상명령의 비전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 아니라 현대선교의 위대한 시대(19세기)가 도래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모라비안(Moravian)운동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운동이다. 상식으로 아는 바로는 그들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는 점과, 현대 선교운동의 최초의 전주라는 점과, 교회연합을 강조하였다는 점등이다. 특히 그 운동의 지도자 진젠돌프(Zinzendorf)의 신앙과 열심, 그리고 헌신은 크리스천 지도자의 훌륭한 모델로서 비쳐지고 있다. 그 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그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선교의 활력 있는 누룩이라 하였고, 비숍 하세((Bishop Hasse)는 말하기를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의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평가되고 있는 이 운동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18세기 동안만도 모라비안들은 버진 제도(Virgin Islands,1732), 그리인랜드(Greenland,1733), 북아메리카(1734), 라플랜드(Lapland)와 남아메리카(1735), 남아프리카(1736), 라브라도(Labrador, 1771) 등에 선교기지들을 구축하였다. 모라비아 교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평신도들의 선교사에 대한 비율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1:60의 비율, 60명의 교인 중 한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으로 개신교의 전체 비율이 1;15,000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라비안들이 이렇게 높은 비율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자급선교를 권장했다는 데 있다. 모라비아 중에는 기술공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해외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장사도 하였다. 모라비안 선교의 이론에 따르면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으로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재정을 충분히 마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윌리암 댄커(William Danker)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라비안들이 남긴 최대의 공헌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통하여 복음전파를 하고 선교사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데 있다. 모라비안들이 했던 선교사역을 잘 연구해 보면 설교자, 교사, 의사뿐 아니라 사업가도 복음을 온 세계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 모라비아와 그 선교역사

 

모라비아는 현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행정구역에 속하는 곳이다. 그러던 것이 1029년에 하나의 주였던 그곳이 보헤미아에 즉 독일황제의 깃발아래 병합되었다. 그 지역의 복음화는 두 수도승 즉, 메도디우스(Methodius)와 시릴(Cyril)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희랍의 수도승으로서 데오도라(Theodora) 여왕으로부터 파송받아 콘스탄틴노플에서 왔었다. 그래서 그 지역의 교회는 희랍교회의 감독아래 두게 되었다. 15세기 초 로마교회가 보헤미아교회를 합병하러 하였을 때 거기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 요한 후스(John Huss)의 활동에 의한 영향과 지도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413년 드디어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온건파였는데, 1437년 보헤미아 국가교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강경파였는데, 쿤발트(Kunwald)에서 처음에는 신약단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다가 1457년에 그것을 형제의 교회“(the Church of the Brotherhood)라고 개칭하였다. 그것은 왈덴파와 같은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포함시켜 다시 형제의 연합“(Unitas Fratrun)이라는 것으로 되었다. 그들은 퓨리탄처럼 엄격한 교리와 훈련, 예배의 개혁 그리고 형제애들을 강조함이 그 특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 적인 신앙에로 돌아가는 운동에 역점을 두었는데, 그들의 초기 지도자들은 왈덴파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사도직의 계승을 주장하였다. 성경을 강조하는 믿음과 정치적인 평화주의의 표방이 그들 신앙의 특색이었다. 로마교회가 그들로부터 분리된 이 그룹을 잘 볼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자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회의 기원은, 핍박을 받으며 존후스(Jphn Huss)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발덴(Waldensians)파와 모라비안파 사람들과 연합하여 연합형제단(Unitas Fratrum)을 형성했던 14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종교개혁에 의해서 거의 멸망받은 후 소수의 잔존자들은 크리스천 데이빗(Christian David)의 지도하에 1722년 색슨지방으로 이민하여 진젠돌프 공작으로부터 드레스덴(Dresden)근처 그의 영지의 한 부분에 피난처를 제공받았다, 헤른후트라고 알려진 이 식민지는 지구 전체를 선회하는 선교활동의 근거지와 중심지가 되었다.

 

2. 모라비안과 진젠돌프 백작

 

1609년 루돌프(Rudolph)는 형제 연합 단에게 자유를 인정하는 서한을 주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신교회 중 반 이상이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누린 평화와 번영의 시기도 잠깐이었다. 그 황제의 죽음 후 로마교회는 트랜트(Trent) 대회의 결의들을 가지고 그들에게 압박을 가해왔다. 그들은 맹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보헤미아는 그들의 새 황제에 대항하여 30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1620년 바이센버그(Weissenberg)에서 대패하였다. 그들 중 3,600이나 되는 가족이 피난의 길을 떠났고, 그들은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였지만 남은 자들이 또한 있었다.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진 그들의 단체에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가 지도자로 그들을 돌보았다.

 

모라비안이 그같이 추방에 의하여 흩어진 후, 즉 암흑의 때에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기도는 놀라운 방법에 의하여 응답을 받았다. 1715년 부흥의 불길이 보헤미아의 풀네크(Fulneck)외 리티즈(Litiz)에서 붙게 되었다. 그 때 지도자는 크리스천 데이비드(Christian)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개종하여 삭소니(Saxony)에 정착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를 중심한 모라비안들은 그 당시 중요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백작 진젠돌프(Count Nicolas Zizendolf)를 그들의 단체에 영입하였다. 그는 본래 루터교회의 교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삭소니의 정부의 한 장관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경건파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찍이 경건주의의 영향을 부모를 통하여 받았던 분이었다. 그는 프랑케(Franke)가 경영하는 귀족들을 위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법을 연구하여 1721-1727년까지 드레스덴(Dresden)에서 법정 변호사로서 그리고 상담자로서 일하였다. 그는 여가에는 기독교인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침 그들 모라비안들이 그를 통하여 그의 부동산을 얻게 되었고, 거기에 그들의 본부를 짓게 되었다.

 

그 땅은 벧셀돌프(Berthelsdorf)에 있었는데, 거기에 그는 모라비안과 접촉하기 이전에 교구목사 안드류 롯(Andrew Roth)이라는 목사를 초빙하여 목회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 땅을 모라비안의 본부 설립을 위한 기지로 얻은 것은 그들이 박해로 말미암아 이산된 후 다시 기독교의 단체로서의 새 출발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들의 부흥의 지도자 크리스천 데이비드(Christian David)는 기공식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제 거처를 찾는다는 시편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 때가 1722617일 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헤른후트(Herrnhut) 주의 지키심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곳은 흩어진 형제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쿤발트(Kunwald) 가까이 자우헨달(Zauchenthal)로부터 온 다섯 개의 고대교회의 자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하였다. 진젠돌프가 그런 것처럼 경건파의 자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하였다. 진젠돌프가 그런 것처럼 경건파의 사람들이 또한 영입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곳은 그들의 영적인 중심지로서 뿐 아니라, 산업과 무역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얻은 이익은 바로 선교사업에 사용되었다. 그곳이 자연적으로 선교운동의 기지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1722년 한 그룹의 기독교 피난 자들이, 나중에 헤른후트로 명명된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에 있는 그의 영지로 피해 왔을 때 드디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 피난 자들을 맞아들인 것이 진젠돌프가 모라비아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헤른후트에서 진젠돌프 백작이 모든 피난 자들을 관대하게 맞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종교적 피난 자들이 계속 몰려 왔으며 그의 영지는 집과 상점들이 건축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주자의 숫자가 많아지자 차츰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종교적 배경 때문에 피난 자들은 서로간에 의견이 대립되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나중에는 헤른후트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첫 번째 피난자가 온 지 5년이 지난 1727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813일 한 참석자의 말대로 성령께서 헤른후트에 강하게 임재하신 역사가 일어나 그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부흥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이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사소한 교리의 차이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대신 하나님에 대한 의뢰심과 공동체 의식이 고조되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일주일 내내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기도운동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여기 진젠돌프는 그리스도의 병정들의 모습을 보았다. 일종의 수도사적 생활, 비록 서약이나 독신제는 없었다 할지라도 여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야말로 국내 국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용약 매진할 수 있는 선택된 무리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이상은 세상과 떠나 부부나 부자가 떨어져 각각 엄격한 신앙 훈련을 받고, 언제든지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데 있었다. 한때 진젠돌프가 주장한 교회 잔존정책 때문에 이 종파적 생리의 모라비아 교회가 피차 불화한 적이 없지 않았다. 경건주의와 모라비아 교회와의 차이도 근본적으로 여기 있었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는 역시 분리된 종파로서의 교회로 발전하려는 경향이 짙어만 같다.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가겠노라고 하는 모라비아 교인들의 결의는 고귀한 선교 정신을 이 교회에 불러 일으켰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치고 이들만큼 선교에 대한 사명감에 불탄 교회가 다시없었다. 이 선교열의 직접 동기는 진젠돌프가 덴마크의 크리스천((Christian)6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서인도 섬과 그린란드 원주민들을 만난 데 있었다. 그는 선교열에 불타서 헤른후트에 돌아와 도버(Leonhard Dober)와 나취만(David Nitschmann)1732년 서인도 섬에 보내어 선교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다비드(Christian David)와 그 이외 여럿을 그린란드에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쉬팡겐베르크(August Gottlirb Spangenberg)가 일단의 선교사들과 함께 조지아(Georgia)에 간 것은 2년 후의 일이었다.

 

진젠돌프가 선교 사업에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작센에서 기성 교회 신학자의 불평 때문에 추방을 당하고 서부 독일지방에서 활약할 때부터이다. 그는 베를린의 야블론스키(Jablonsky )에게서 1737년 주교로 안수 받고, 다음해 서인도 섬에 여행을 떠났고, 1737년에는 런던에 찾아가 모라비아 교회의 사업을 추진 확장시켰다. 그는 다시 그해 뉴욕에 갔다가 펜실바니아에 있는 한 고을을 베들레헴(Bathlehem)이라 명명하고 모라비아 운동의 미국내 본거지로 삼고 돌아오기도 했다. 진젠돌프는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펜실바니아 지방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독일계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한 군데 모이게 하여 “Church of God in the Spirit"을 설립하고자 진력하였으며, 인디안 들에게 선교 사업을 추진하였는가 하면, 교회도 여럿 세우고 또한 학교도 여러 군데 세웠다.

 

이처럼 헤른후트는 선교 활동의 산지가 되었다. 거기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수리남(Surinam), 기아나(Guiana), 이집트,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지형이 나쁠 뿐만 아니라 사람 살기에 아주 곤란한 라브라도(Labrador)에서 힘겨운 선교의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처럼 난경을 찾아 선교하는, 남다른 헌신과 인종의 순례를 간 자들이었다.

 

진젠돌프의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아 교회는 점차 분리해 가다가 완전히 하나의 독립 교파로 분립하고야 말았다. 프러시아에서 한 교회로 공인 받은 것은 1742년이었다.

모라비아 교회가 주교, 장로, 집사직을 다 갖춘, 교회로서 조직을 마친 것은 1745년의 일이었다. 정체는 장로교에 훨씬 가깝왔다. 영국의회도 1747년 이 교회를 역사 있는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인정하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작센정부와의 타협이 다시 이루어져 진젠돌프가 본국에 귀환하게 되었을 때 모라비아 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루터교와 병존한다는 인가를 받고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해서 이 교회는 사뭇 아름다운 의식과 충만한 감격의 찬송가를 여럿 발전시키고 있었다. 교회의 규모는 적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유럽 전역에 걸쳐 섬세한 영적 영향을 끼쳐 왔고, 다른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 교회에 가입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발전을 통해 그 정신이 유럽 기독교계를 깊게 한 동안 은은히 지도하고 있었다.

 

추방당하고 살던 진젠돌프는 묘한 신학과 문화적 특수성을 발전시켜 한때 건전한 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죽으심에 대한 그의 애모가 갑자기 심리적 변화를 거쳐, 그리스도의 피와 상처에 대한 병적인 언어 구사로 전환한 일이 있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들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치기마저 띠운 표현으로 시종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표현이 그들 스스로의 손에 의해서 상당히 개선된 것도 사실이었다. 모라비안 교인들도 이 때를 가리켜 채질 하는 시기옅다고 술회한다.

 

모라비아 교회는 본래 자유로운 정신과 영적 생활의 표현을 위한 최소한도의 기구를 그 원칙으로 해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대 변화를 겪어야 할 시기가 왔다. 진젠돌프가 워낙 이 교회의 사업을 하느라 재산을 많이 썼기 때문에 막대함 빚더미 위에 앉아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실정을 방관할 수 없이, 대신 빚을 청산해 줄 계획을 세웠고, 그런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부득이 정체도 바꾸어 엄격한 기구로 발전시키고, 집단 지도 체제도 채택하여, 일종의 상임위원회 같은 상설 기구가 설치하게까지 진전했다. 상납금 제도의 현실을 서둔 때였다.

 

큰 일을 여기 저기서 하노라 정력과 건강을 해쳐 버린 진젠돌프는 만년에 아내의 사별이라고 하는 비애마저 겹쳐 한없이 쓸쓸한 나날을 목회 활동으로 보내다가, 176059,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젠돌프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키운 모라비아 교회는 이미 굳건히 기초를 세우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죽음으로 해서 겪는 손실은 없었다. 2년 후에 미국에서 활약하던 쉬팡겐베르크가 돌아와서 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소임을 맡게 된 것은 다행한 일 이었다.

 

그들의 선교 활동 중 어떤 점에 대하여는 완전히 성공적이 아닌 것 같이 보이기도 하며, 또 사업의 규모와 회심자의 수(어떤 특정한 지역에 있어서의)를 따져 볼 때, 그들의 선교 사업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가 이룩한 이 선교사업이야말로 어느 다른 교회 단체에서도 하지 못했던 사역의 수준을 세운 것이었다.

 

대체로 봐서 일반 신교 교회들이 파송하는 해외 선교사의 수는 최고로 잡아서 교인 2,000명 내지 3,000명 가운데 한 사람의 꼴인 데 비하여 모라비아 교회는 92명중에 한 사람씩을 선교사로서 파송하고 있다. 그들은 외국 선교부에 본국 교회의 회원의 3배나 되는 회원을 유지하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연약하고 인원수도 적으며 재정 면에서도 말이 안되는 단체에서 그와 같이 선교사업에 큰 공헌을 하고 있음은 현대 선교사업의 하나의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진젠돌프가 그의 모든 능력, 재물 및 그가 소유한 기타 모든 것을 그가 따르는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본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줄기찬 심령의 맥박을 일게 해 주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모라비아 형제들은 그들의 지도자의 정신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3. 모라비아인과 경건주의 자들

경건주의는 특히 17세기말과 18세기 전반기에 독일 루터 교회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종교면 에 있어서 대각성을 말한다. 이와 거의 동시에 스위츨랜드, 홀랜드, 및 잉글랜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종교적 각성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이 운동을 웨슬레 부흥운동 또는 복음주의 부흥운동이라고 불렀다. 독일에서 일어난 대각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로도 전파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이 운동이 큰 세력을 얻어 가지고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에서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필립 야콥 스페넬(Phillip Jacob Spener)이었었다. 스페넬이 야콥뵈메 및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와 같은 초기의 신비가들의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경건주의도 이들 신비가들의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경건주의도 이들 신비가들의 교훈과 저서에 나타난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와 경건주의가 공통된 점은 많지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임재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생생하게 이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다시말 하면 그리스도인은 그 생활과 심령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인생관의 하나였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사람의 영혼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경건주의는 물론 신비주의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내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서 실제적인 윤리 생활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 경건주의는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신비주의와 경건주의는 다 생명이 없는 정통주의에 대항하여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목적의 규범이 되는 순결한 교리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다 이지에 보다도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운동들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순화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살며 교회를 안으로부터 혁신하자는 운동이었다. 신비주의의 주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경험하려는데 있고, 경건주의의 주요한 목적은 그리스도인을 선하게 만듦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실제적인 종교로 만들 자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17세기에 정통주의 개신교는 올바른 교리에 대한 집념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떤 특수한 이론을 절대화하는 데 몰두함으로써 18세기에 와서, 즉 계몽시대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을 계시의 한 기관으로 교리 적으로 높여 놓게 되자, 한 유명한 추론이 따르게 되었다. 순수 이성으로써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초월적 종교는 점차로 회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회는 교회주의 때문에 조롱을 받았고, 특히 인간에 대한 교회의 비관주의는 더욱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종교적 상대주의가 그 시대를 이끌어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통주의와 계몽주의가 합세해서 일으킨 공격에 반응하여 경건주의가 새로운 운동으로 등장하였다. 정통주의의 형식적이고 냉정하며 이지적인 신앙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더 강조를 두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뜨겁고 열렬하며 경건한 합일로 바뀌어졌다. 회심, 거듭남 그리고 성화와 같은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올바른 교리보다는 영성적 생활, 교회적 구조보다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 그리고 이론보다는 실제, 이러한 것들이 새 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이 새 운동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1664년 개신교 선교활동을 위하여 벨즈가 건의하였던 사실이 그후 1세기를 더 지난 후 스페너와 후란케를 중심으로 경건주의 자들 간에 다시 메아리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원받은 인격적 경험에서 오는 기쁨과 모든 사람들에게 속죄의 복음을 선포하는 열성을 조화시켰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코세주스의 신학과 초기 계몽주의의 낙천적인 흔적이 이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후기 정통주의의 비관적 역사관,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박두해 있다는 기다림으로 해서 전적으로 침묵주의로 흘렀던 그 비관적 역사관에서부터 멀리 떠나버린 것을 접하게 된다. 초기 경건주의는 파루시아(재림)에 대하여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강조는 18세기말에 가서야 경건주의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는데, 그것은 벵겔의 해석학적 저작의 결과였다.

 

루터교파이건 개혁주의파이건 간에 순수한 신앙고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 서로 상호간의 격리를 가져온 정통주의와는 달리, 경건주의 자들은 에큐메니컬, 즉 연합적 태도를 취하였다. 신앙에 대한 인격적 경험과 이에 따른 올바를 실천이 정통사상보다 결정적이었다. 여러 다양한 신앙고백을 하는 경건주의 자들 서로 가까이 만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들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 사는 루터 교인들, 화란의 칼빈주의자들, 영국에 있는 성공회 교인들 그리고 북미에 있는 청교도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선교에 대한 열성이 서로에게 뜨겁게 전달되어, 그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올바른 신앙고백을 초월하는 한 덩어리로 연합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특징들을 헤른후트에 모여 생활한 모라비아 형제들과 진젠돌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자기들의 선교 실제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면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유사한 점들도 발견할 수 있다. 경건주의 자들과 모라비아 형제들은 이방인의 개종을 관심으로 삼았고, 그들이 개종한 다음에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분명치 않은 막연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개척은 선교의 목표가 아니었다. 진젠돌프는 매우 뚜렷하게 개개인의 회심을 실제로 강조하였다. 그는 모라비아 형제들의 과제를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라비아 형제회는 28년 동안에 첫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28개국, 그린랜드. 북미, 남아프리카,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 등으로 경계선을 넘어 선교사들을 파송 하였다. 진젠돌는 추수를 완전하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유대인들이 개종하고 개신교 내에서 분열이 끝난 후에야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 기간에 중요한 것은 형식적이고 체계화된 교회가 아니라 참된 신도들의 자율적이고 조직화 되지 않은 집합이라고 보았다. 모든 강조 점은 전적으로 회심, 개종에 있었다. 모든 선교활동은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이 목표를 위해 섬기는 보조에 그쳤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는 모라비아 형제들보다 좀 덜하기는 했어도, 경건주의 자들이 선교이해에 있어서 왜 문화적 변혁 명령에 대하여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개인과 그 개인의 영혼에 대한 집중적 관심은 문화적, 사회적, 민족적 삶을 선교의 범위 밖으로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개종한 영혼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다. 베이류터는 이렇게 기록한다, ‘진젠돌프에게 있어서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실망을 안겨다 준 것은 그가 북미에 가서 헤른후트의 자리를 비운 동안, 헤른후트에 있던 모라비아 공동체가 하나의 고백적 교회로 조직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가 원래 의도 하였던 대로, 즉 헤른후트가 일시적인 숙소의 역할을 상실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모라비아 형제들과 경건주의 자들 원칙적으로 그 당시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이 가졌던 선교의 견해를 버렸는데, 그것은 주로 정부가 선교에 대해 행사했던 역할에 대항 그들의 태도에 기인하였다. 이 점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태도가 자기들의 신앙고백보다도 재침례교파들에 더가까왔다고 보는데, 예를 들면 진젠돌프가 국가의 후원을 받는 선교는 어쩔 수 없이 마음과 영혼의 문제보다도 국가의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 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 전체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중 개종이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우리의 자랑하는 구주에게 영광 돌리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진젠돌프는 각 나라의 시민들은 그 통치자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원리를 없에 버렸다. 이 원리는 국가교회가 주관하는 선교부만이 그 국가가 관할하는 식민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을 세웠는데, 이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는 요한 웨슬러보다도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던 아주 최초의 에큐메니컬 인물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다. 이것은 그의 확신, 즉 교회는 순례적 교회이며, 십자가 밑에 있는 교회이고 또한 순교자의 교회라는 확신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주의를 연결하여 준 진젠돌프는 진실된 경건주의 자였었다. 그의 이상은 고상하고 순결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함을 일생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자기가 창설한 형제단으로 하여금 이 고상한 구령운동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게 하려고 힘썼다. 그가 소년 시기에 가졌던 한 가지 이상은 심령의 종교 곧 하나님과 직통하는 것이었다. 이 이상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생을 갖게 하였다. 또 어떤 전기작가가 말한 대로 그의 정렬 곧 예수께 향하는 뜨거운 사랑과, 사랑의 단체로서의 그의 형제단을 확립하려는 정렬은 그의 형제단을 믿음의 단체라기보다도 경건주의의 단체라 할 수 있다. 이 경건주의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내적이며 개인적인 성격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진젠돌프와 그의 형제단은 그리스도 교회보다도 오히려 더 큰 유산을 전체 그리스도교에 남겨 놓았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존 웨슬러가 새로운 광명과 영감을 받아 그로 하여금 놀라운 부흥운동을 하도록 한 것은 모라비아단에게서 받은 감화 때문이다. 모라비아단은 경건주의의 최상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4. 영국에서의 모라비안 운동

 

헤른후트에서 일어난 놀라운 오순절적 성령체험이 영국에서도 일어나기를 진젠돌프와 그의 동료들은 원했다. 부흥의 사절이라 할 수 있는 요한 텔츠만(Johann Toltschmann)과 다른 두 사람이 진젠돌프의 서한을 지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 편지는 헤른후트의 경험을 알리는 내용이었는데, 옥스퍼드 대학 기독교 지식 촉진회“(the Society for Promothing Christian Knowledge)와 조지 1세의 궁정목사에게와 리프(Schoumberg Lippe)라는 왕후를 시중드는 백작의 직책을 가진 여성도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 대한 그 백작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던 반면, 그 궁중목사는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임금에게도 옥스퍼드대학에도 잘 전달되지 못하였다. 진젠돌프의 첫 번째 시도는 그처럼 결과를 낳지 못하였지만, 그의 노력은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1735년 봅 틸칙(Toltschig)의 인솔로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미국 죠지아로 가던 도중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그들에 앞서 선교사로 미국에 건너간 그들 그룹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나 대학의 교수였던 스판겐버그(Spangenberg)교수였다. 그는 훗날 모라비안의 단체의 감독이 되었다. 그에 대하여 이런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슈방겔펠드(Schwenckfeldters)의 재침례파그룹이 추방을 받아 할 수 없이 삭소니 지역을 떠나 조지아주로 그들의 거주지를 바꾸려 하였다. 그들은 먼저 홀랜드에 도착 계획을 수정하였다. 슈판겐버그는 바로 그들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진젠돌프의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재침례파의 미국 이주의 진젠돌프가 영국의 오그네돌프의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슈판겐버그는 진젠돌프의 그룹의 대표로 이제는 미국 죠지아주에 모라비안의 식민지 건립을 위해 오그네돌프(Oglethorpe)총독의 인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오그네돌프는 그들의 교리와 입장을 심사한 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슈판겐버그는 다른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함께 17352월 영국을 떠나 사바나 가까이에 도착하여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것은 헤른후트의 모형을 따라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슈판겐버그와 그의 그룹은 그곳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거주하는 인디안족 크릭(Creek)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상의 두차례의 모라비안의 영국과의 관계는 미미한 것이었으나, 모라비안의 부흥과 선교진출에 계기가 되었다.

 

죠지아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좋은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더 많은 선교사들은 거기에로 파송하게끔 결정하였다. 1737826명이 헤른후트를 떠나 런던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기에서 선편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시몬드(Simmonds)라는 선편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었다. 그 배에는 미국으로 가는 요한 웨슬레와 챨스 웨슬레도 동승을 하였는데, 그것은 18세기 영국부흥운동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배에는 영국인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과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후에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우연한 만남인 것 같은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택된 축복의 도구로 삼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웨슬레가 그 후 모라비안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부흥운동에 연결되는 것으로 고려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3개월이란 긴 항해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였다. 잉함 목사는 후에 미국에서 돌아와서 형제단의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의 시작은 제임스 허톤(James Hutton)이라는 매서인 과 연관이 있다. 그는 요한 웨슬러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다. 웨슬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후톤의 주선으로 그의 부친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는 요한 웨슬러 일행의 미국행 전송을 위해 시몬드선에 왔다가 거기서 모라비안의 일행을 만났다. 그때 거기서 그들을 만남이 영국에 있어서 모라비아 교회의 첫교인이 되게 한 것이었다. 그는 그후 웨슬레와도 계속 연락과 접촉을 하였다. 특히 모라비안의 인디언의 선교에 대한 소식에 큰 감동을 받았고 성경공부와 기도에 열중하는 작은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단체를 명명하여 평신도 단체“(Vestry Society)라 하였다. 거기에는 열성이 있는 기성교회 교인들인 회원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웨슬레를 후원하였는데, 그에게로부터 전하여온 편지를 읽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후톤의 단체는 후에 페터골목의 단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후톤의 이 단체 이외에도 독일에서 추방 받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단체들이 생기게 되었다.

 

1737년 진젠돌프의 동료와 함께 영국 방문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식민지 지역의 일에 관하여 영국의 관리국과 의논하기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를 안드류 도버(Andrew Dover)로부터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들의 런던 내방의 다른 하나의 목적은 영국에 있는 모라비안 형제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인 거주자들의 가정 중심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는 켄터버리 대 감독과 찰스 웨슬레를 만났고, 그의 겨자씨 회“(order of the mustard Seed)에 대주교와 감독 윌손을 영입하였다.페터골목의 단체와 그의 일을 돕는 10인의 젊은 사람들의 한 그룹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런던 체류기간 동안 안드류 오스트램(Adrew Ostreom)과 요한 프레드릭 이틴즈(Frederick Itintz)를 지도자로 최초의 교회를 영국에서 조직하였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의 발전과 밀접히 관계되는 또 한 사람은 피터 보러(Peter Bohler)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나 대학에서 갑작스런 회심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 후 헤른후트의 모라비안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진젠돌프에 의하여 남 케로나이에 파송할 선교사로 내정되었고, 그 선교지로 가는 도중에 영국에 들러 선편을 기다리면서 머물게 되었다. 테일러 하밀텅(Taylor Hamilton)은 말하기를 그의 영국 도착은 영국 교회에 모라비안의 결정적 영향을 가져다 준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때 마침 죠지아에서 되돌아온 웨슬레와 만난 것은 독일 사람의 집에서였다. 웨슬레는 톨칙(Toltschng)의 편지를 지참하고 왔었다. 그들의 만남은 훗날 부흥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모라비안은 웨슬레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한 웨슬레는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 설립에 거꾸로 영향을 주었다. 뵐레의 런던 체류기간 동안 그는 후톤이 이끄는 단체들과 독일 거류민단의 신앙 단체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였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펠라기안주의에 의한 팽배한 도덕주의 때문에 무척 사람들은 굳어져 있었는데, 그의 설교는 크게 환영을 받았고,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4일전에 웨슬레를 만났고 페터골목의 단체의 미래 발전을 모색하게 되엇다. 거기에는 후톤의 앵글리칸과 휫필더의 회심 자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 단체는 뵐러와 메도디스트 형제들에 의하여 그렇게 인정받은 단체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것을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의 출발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영국교회의 교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주중의 날에 모여서 고백과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지도자를 선정하고, 정기적인 금식과 사랑의 잔치“(Love Feast)를 가졌으며 선교에 힘썼다. 그들은 단체의 질서를 존중하였고 단체를 이탈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즉 모든 형제의 결정된 사항에 존중하였다. 뵐러가 드디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 웨슬레는 그 단체의 감독과 설교를 맡았다. 후톤은 진젠돌프에게 구하기를 뵐러가 돌아와 그들의 감독직을 맡게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페터골목의 사랑의 잔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웨슬레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아침 3시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땅에 엎드리어 주의 같이하심과 기쁨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감격과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고, 하나님의 찬양과 주님을 주()로 시인하는 소리를 발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오순절 적인 체험은 모라비안의 각성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은 진젠돌프와 웨슬레 사이의 성격적 차이로 마침내 불화를 가져왔고 거기에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페터골목의 단체173911일의 사랑의 잔치를 메도디스트와 모라비안의 교제의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 그 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교제는 급강하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라비안의 고요의 교리때문이었다. “고요의 교리는 필립 헨리 몰더(Philip Henry Molther)라는 사람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는 알사스 사람으로 진젠돌프의 영향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바니아에 가는 도중에 선편 사정 때문에 영국 런던에 왔었는데, 런던 체류 기간동안 페터골목 단체에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 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차고 넘쳤고, 낮에는 가정을 방문하여 권고하였고 밤에는 그룹 집회를 가졌다. 그의 은혜의 강조의 설교에 청중은 큰 축복을 받았다. 몰더의 루터가 말한 칭의 교리의 강조와 히스테릭한 청중의 감정의 표현에 대한 반대는 웨슬레의 찬성을 얻지 못하게되었다. 드디어 1740년 웨슬레와 모라비아는 그렇게 이별하게 되었다. “페터골목의 단체가 원래는 앵글리칸이 주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모라비안의 완전한 단체가 되었다. 그로써 사람들은 그들을 분리주의자로 낙인을 찍게 되었다.

 

1741년 슈판겐버거(Spangenberg) 도착 후 모라비안의 독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리엔본(Marienborm)의 대회의 소식을 가지고 왔었다. 그 대회는 17418월 진젠돌프의 주제 하에 영국, 독일의 대표가 참석한 대회였다. 거기에서 그들 운명의 두 가지 방향이 결정이 되었는데, 우선적으로 관심의 분야는 해외선교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그들의 본부를 요크샤의 플레크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174210월 페터골목의 단체는 형제단의 회중)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교회로부터 분리를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하나의 분파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진젠돌프와 다비드 니춰만((David Nitschman)은 켄터버리의 대주교에게 그들의 입장을 밝혔을 데, 그들은 모라비안 이라는 말과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1742년 그들이 그렇게 하나의 단체를 형성함으로써 부흥은 일단 정지하였다. 그러나 웨슬레가 떠난 후 그들의 운동이 약화되지 않고 봉사의 정신“(the spirit of service)을 보임에 아낌이 없었다. 런던의 그들의 회중은 비상한 영적 능력을 힘입었고, 회중은 항상 차고 넘쳤으며, 비슷한 단체들의 생성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은 편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후원과 찬사를 보내었다. 그들의 인원들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고 위로를 줌에 인색하지 않았다. 방랑자와 타락한 자들을 위하여 구제의 손길을 폈다. 공장 노동자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걸인에게 음식을 주었다. 그들의 본부인 요크샤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거칠고 타락하고 잔인하였다. 닭싸운, 소를 괴롭히는 일 등을 즐겼고, 특별히 다른 군들의 사람들보다 더 그것이 심한 상태였다. 모라비안의 기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일으킬 부흥을 준비하셨다.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1737년 웨슬레 사람으로 옥스포드의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어 미국으로 갈 때 시몬드(Simmonds) 선상에서 모라비안을 본 것이 처음이었고, 미국 사바놀라에서 또한 그들을 인상깊게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들을 경건하고 평온한 천국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라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다시 돌아왔고 자기 고향 요크샤 지역에서 순회전도를 하였다. 그는 다시 죠지아에 가기 이전에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인디언 언어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본국에서나 해외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일하였다. 그가 웨이커필더(Wakefield)에서 설교하였을 때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그는 그처럼 옥스퍼드 의 메도디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모라비안에게 영향을 입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39년 모라비안의 새해의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자기 고향 요크샤로 돌아가 사도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그의 설교가 있은 후 그해 16일 요크샤 교구에서 더 이상 설교하는 것은 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그에게 내린 금지령이 그를 막지 못하였다. 그는 거리에서, 시장에서, 동네 어귀에서 어디서나 설교를 하였다. 그는 결국 50개의 우의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는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런던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런던의 슈판켄버거가 26명의 남녀 순례자들을 보내어 그를 보조하게 하였다. 그는 풀네크(Fulneck)에 본부를 정하였다. 10여곳에서 정규적인 설교의 장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락에 영적 조직을 가졌다.

 

요크샤에서 그들의 전도는 순전하고 간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형제단으로 만들려는 것보다 기독교인으로 만들려 하였다. 요크샤에서 그들의 노력의 열매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지만 형제단에 가입한 사람은 단지 62명 뿐이었다. 만약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2년의 시험기간을 주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양을 얻으려는 것보다 될 수 있는 대로 교인들을 자기교회로 돌려보내는 일을 한 것이다. 기어코 자기의 본 교회를 떠나기를 거절하는 자만이 엄격한 시험을 통한 후 회원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들의 그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크샤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게 되었다. 1749년 공식적인 인정을 얻을 때까지 그들은 분리주의자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흔히 독일인“, “헤른후트인“, “반 명목론자들이라고 불러졌다. 그들에 대한 반대는 1742년에서 1745년까지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러한 반대에는 다섯 가지 원인이 있음을 훌튼(J.E.Hulton)이 지적하였다. 그들의 운동이 독일인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 그들의 훈련이 너무 엄격하였다는 점, 그들이 감각적인 것을 피하고, 주를 조용히 기다림을 강조하는 고요의 방법에 원인이 있다는 점과, 불완전한 교리와 실천이라는 오해, 그들이 비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었다(: “피와 상처의 신학“)

 

노탐돈(Northampton)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 오클리(Francis okely)가 설교하는데 찾아 왔다. 랑크샤와 체샤에서 힌틴턴 후작의 종이었던 데이비드 테일러(David Taylor)를 찾았다. 쟌 카드웰(John Cadwell)은 스코틀랜드를 복음화하였는데 아일(Ayr)을 본부로 삼고 거기에서 40여개의 도시에로 전도를 위해 순회하였다. 에딘버러와 글라스고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 이들 모든 지역이 나중 장로교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형제단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잔 케닉(john Connick)월드샤의 사도“(Apostle of Wiltshire)로 불렸는데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17년간 축복의 전도를 하였던 사람이다. 대 영국에서 그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어떤 곳도 없었다.

 

이상에서 주로 18세기에 절정을 이룬 모라비안의 독일과 영국에서의 부흥과 선교 상황을 보았다. 그들의 교회는 홀랜드,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탄자니아, 남아프리카, 서인도, 가이라나, 수리남, 라부라돌, 미국 등지에 있다. 그들의 선교는 그린랜드, 남북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행하여졌다. 전세계를 걸쳐 361천명의 교세에 625교회가 있다.

 

 

 

맺는 말

 

거의 240년이 지난 후에도 모라비안들은 세계 각국에서 선교활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 곳의 주요 선교거점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서독, 영국, 덴마크, 미국 등이었다. 네 군데의 유럽국가에는 지원기관이 있었다.

 

덴마크의 할레와 모라비안의 두 선교기관들이 18세기 말엽(1797)에 이르러 네덜란드 선교회(N. M. C.)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19세기 동안 약 15개의 대륙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독일은 베를린 선교회(B. M. S, 1824), 레니쉬 선교회(Rhenish Mission, 1828), 고너스 선교회(Gossner Mission, 1836), 라이프지히 선교회(Leipzig Mission Society, 1836), 헤르만스버그 선교회(Hermannsburg Mission, 1849) 5개의 선교회를 통해 선교활동을 인도하였다. 1821년과 1874년 사이에 스칸디나비아 네 개국은 6개의 선교단체를 조직하였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복음선교회(Paris Evangelical Society)1822년에 조직되었다. 1815년에 시작된 스위스의 바젤 복음선교회(Bazel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는 이들중 최초의 것이었다.

 

이 모든 선교기구들은 계속하여 활동하였다. 독일의 선교기구들은 제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심한 타격을 받았다. 현재 독일 선교사들의 숫자는 1,300명 정도에 이른다.

 

모라비안 교회의 부흥운동은 오늘의 선교 방향에 중요한 빛을 비춘 역사적 운동이라 하겠다. 그들이 순수한 진리의 말씀에 열정을 가졌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타에 의하여 결코 판단적이지 않고 오히려 기성교회와 조력하는 관계를 갖고 동역자의 위치를 잘 고수한 점은 훌륭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뜨거움을 오히려 실제적이고 이성적이고 질서적인데 주위를 집중시킨 점 또한 훌륭한 점이었다고 본다. 그들의 운동이 실천적이고 우주적인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만한 점이라 본다.

 

또 그들이 단순한 복음 적인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그들의 많은 지도자들이 훌륭한 배경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 운동이 그처럼 부패되지 않고 오래 지속된 원인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모라비아 운동이 애써 교회나 교단 중심적이 되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 중심적인 운동으로 지향하였다는 점을 그들의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이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축복을 받은 것이라 본다. 그것은 교회 그리고 교단 중심적으로 치닫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사표가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18세기에 발전된 가장 분명한 선교전략은 진젠돌프 백작과 스판베르그 주교의 지도하에 발전한 모라비아 교회의 전략이었다. 모라비아 선교사들은 1734년부터 시작하여 의도적으로 종래에 경멸받고 무시되던 사람들에게로 파송되었다. 이 선교사들은 자비량선교를 해야 했다. 그런 결과 그들은 산업과 사업에 창조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일만 잘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도 맺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처럼 모라비아 공동체는 선교 전략적 차원에서도 현대선교의 방법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두보스(Francis M. Dubos)는 진젠돌프(1700-1760)를 일컬어 현대선교활동에 있어서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또한 영감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시인이요, 찬송가 작가요 행정가요,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여하튼 그의 선교적 활동은 현대선교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이 되었다. 그러므로 진젠돌프는 선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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