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성 공략 실패(수7:1-6)
아이성 공략 실패(수7:1-6)
주 바나바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전쟁의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침공을 미리 간파한 프랑스는 독일침공에 대비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1차세계대전시 천만의 희생을 치르고도 프랑스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작전을 도입하게 됩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만슈타인이란 독일 장군입니다. 독일은 자신들보다 배나 더 강한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벨기에로 우회하여 프랑스를 점령하고자 계획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벨기에 국경선까지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독일의 만슈타인 장군은 벨기에와 프랑스주력군사이의 숲을 통과하는 작전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독일군사령부는 그의 작전을 어리석은 생각이라 여기고 오히려 그를 좌천시켜버립니다.
우연히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이 히틀러의 귀에 전해지자 히틀러는 그의 의견을 듣고 전격적으로 만슈타인 장군의 작전대로 프랑스를 침공하여 이틀 만에 국경선을 돌파하고,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는 성공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승리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초반의 승리에 도취한 히틀러는 모든 게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자만심에 빠짐으로 부하참모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침공에서 만슈타인은 속전속결로 진격했으나 히틀러의 정지명령으로 오히려 러시아 군대는 군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독일군은 일대 타격을 받게 됩니다.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전략은 패배의 전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슈타인은 당시 많은 전술전략가들 사이에 독일군의 최고장군이라는 칭송을 받은 인물입니다. 만일에 히틀러가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대로 따랐다면, 히틀러의 위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전쟁사화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요단 동편의 아모리왕 ‘시혼’과 ‘옥’을 물리치고,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도하하고,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힘도 안들이고 쉽게 정복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와의 전투에서 는 역전패가 되어 아까운 병사들만 잃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아이성 전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교훈합니다. 우리 인생은 성공 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기 위해서 힘껏 휘두르다가 삼진아웃을 당하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시도하지 않은 계획들은 참으로 무의미합니다.
차라리 무의미한 것보다는 시도하다가 맞이하는 실패가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교훈을 줍니다. 아이성의 전투의 실패에서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은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 성은 벧엘에서 동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성읍입니다. B.C. 3,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나 B.C. 2,000년경에 강력한 외부 세력에 의해 멸망당한 후 소규모의 성읍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이와 더불어 싸운 전투에서 실없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여리고성의 승리 이후에 바로 나타난 하나님 백성의 실패의 역사를 말합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아이전투와 같은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비교의식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아이성과 여리고 성을 비교하였을 때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성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전투의 신중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판단력이 상실되었습니다. 전투의 대상을 숫자와 크기로만 파악했습니다. 비교의식입니다. 그래서 군사 3000만 보내면 이길 수 있다는 보고에 솔깃합니다.
여호수아는 전날 여리고성 전투에서의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약 3000명만 전투에 돌입했지만 결국 싸움에서 이스라엘 군사 36명이 전사하고 아이성 첫 번째 싸움에서 패전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비교의식의 결과입니다. 상대방을 얕잡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방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니까 행복하지?” 그러니까 그 학생이 대답합니다. “아니요, 대학에 다니면 뭐해요. 지방대학교인데요”또 목사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한 청년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 다니면 뭐해요. S대도 아닌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S대에 다니는 청년을 붙들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S대에 다니는 청년은 “S대에 다니면 뭐해요. 학과가 좋지 않은데.” 얼마 후 그 목사님은 S대에서 좋은 학과를 다니는 청년을 만나 물었습니다. “넌 정말 행복하지?”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은 과에 있으면 뭐해요. 수석도 못하는데.” 비교가 또 다른 비교로 인해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실화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태에서 한 계단 올라가면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우리 위에 또 다른 계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비교의식은 우리를 끝없는 경쟁으로 몰아넣고 쉴 새 없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월감이나 열등의식으로 자만심을 가지거나 주저앉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비교의식이 우리 가운데 너무 만연돼 있어 우리는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넓은 집, 큰 차, 학벌, 좋은 직장, 더 많은 봉급 등 우리는 남보다 조금 더 낫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사람도 비교의식 속에서는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보다 더 가진 사람을 항상 주위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비교의식이야 말로 이 시대에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압사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약 3m의 키가 되는 거인 골리앗을 작은 소년 다윗이 이길 줄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백성들 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사울도 못했고, 이스라엘의 용맹한 장수들도 못했던 일을 작은 소년 다윗이 해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적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적도 체험할 수 있고 위대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으키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통해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 적은 떡과 물고기가 그렇게 큰일의 도구가 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먹게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비교의식을 버려야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큰 것을 가졌어도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믿음의 조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혈혈단신이었습니다. 그는 의지할 사람도 없이 홀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12지파를 이루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지게 하셨으며 온 세상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지극히 적은 한 사람을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시는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살펴보십시오. 그 당시에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이 갈릴리 시골출신들이었고, 변변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세리마태 한 사람뿐입니다. 당시에서는 12명 제자들 중에 천한 어부출신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주님은 제자로 부르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3년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팔아먹고 주님을 버리고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어찌 보면 제자들은 하류인생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함으로 능력을 부어주셔서 온 예루살렘을 소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의 결과 로마가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고 온 세계에 복음이 편만하게 되었습니다. 지지리도 작은 인생들인 제자들을 통해서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의 적들 중에 하나가 비교의식입니다. 비교의식 때문에 열등감이 생기고 비교의식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일도 비교하다가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들에게는 큰일을 맡기신 것 같고 내게는 하찮은 일 아주 작은 일을 맡긴 것처럼 생각 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감사를 잃게 되고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비교의식을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승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이기주의가 실패의 원인입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만을 고집하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입니다. “이기주의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기심의 발로가 바로 이기주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을 잘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한 후에 여호수아는 실의에 빠져서 자기 옷을 찢고 저물도록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중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사람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스스로 찾아서 해결하도록 그들의 손에 맡겨두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백성들을 모으고 그 죄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뽑기방법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하나님이 찾아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방법입니다.
제비를 뽑으니 12지파 중에서 유다지파가 뽑혔고, 다시 제비를 뽑으니 유다지파 가운데서 세라 족속이 뽑혔고, 그 다음 삽디가 뽑혔고, 마지막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 전투에서는 백성들 모두에게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전쟁이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6:17에 보면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 명령합니다.
그런데 아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여리고 성에서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이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그 물건들을 자신의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런 아간의 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전투에서 패배하게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아간의 탐욕은 이기주의의 결과입니다. 지나친 이기주의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면 필연코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며, 이것은 성도의 경건 생활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한 여인이 높은 제방에 홀로서 있다가 흐르는 강물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으나 선뜻 아무도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물속으로 뛰어 들었고 그 여인을 구해서 제방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올려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의 손을 잡아끌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직 물에서 나오지 못한 청년을 두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갈 길을 갑니다. 높은 제방으로 인해 청년은 오랜 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청년이 벗어 놓은 옷에 있던 지갑과 전화기가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훔쳐갔습니다.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유익을 삼는 것은 이기주의의 한 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를 통해서 아간을 잡아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내속에 있는 아간을 잡아내야 합니다.
내 속에 숨겨진 죄악 즉 내 속에 숨겨진 이기주의를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셨던 것처럼 나를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경제력이나 인간적인 능력이나 세상적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것은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기주의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아간을 잡아내야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속에 아간을 두고도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영적이기주의를 버려야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아간을 제거하기 위하여 애통하십시오. 아간을 잡아내기 위해서 부르짖으십시오. 아간을 제거하기 위해서 철저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주체가 바뀌는 일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을 알고 난 후에는 주님이 주체가 되어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성공할 때 잘 나갈 때 조심해야합니다.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실패했다고 판단하십니까? 실패에는 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실패하게 만들었는지 찾아내서 원인을 재거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실패의 자리에 한탄하지 맙시다.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성경 속에 나타난 위인들은 모두가 다 실패를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울, 다윗, 솔로몬, 모세, 바울 등 모두가 실패를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삶을 승리하는 비결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재거하고 주님께 돌아와 주님의 사람으로 돌아서서 고난을 극복하고 삶을 승리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실패의 자리에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며 축복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편50: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