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시리즈

청지기 영성(베드로후서4:10-11)주바나바목사

주 바나바 2019. 10. 30. 20:40

청지기 영성(베드로후서4:10-11)

 

주바나바


19세기 말 미국의 영적각성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 가운데 아도니람 골든(Adoniram Gordon)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보스톤 지역에서 사역하면서 미국 침례교의 부흥에 큰 몫을 감당했고, 한국선교에도 보이지 않게 기여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영적으로 큰 사역을 하게 된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이분이 설교 준비하다가 피곤해서 그만 책상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꿈을 꾸게 됐습니다. 꿈에 주일예배의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중석을 돌아보니 낯선 30대 남자가 자기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왠지 자꾸 그 남자에게 시선이 끌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 남자를 찾으려 했는데, 먼저 가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내위원에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안내위원 말이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꿈을 꾼 후 이 골든 목사의 마음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자기의 설교를 들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만 의식하며 예배를 진행했고 설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은혜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설교를 준비하고 예배를 진행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 예배를 기뻐받으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뜻을 전할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예배는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이분의 설교가 달라졌습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됐고, 과거와 달리 큰 사역들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영성 즉 청지기영성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길 때 청지기영성의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입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특별히 분쟁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분석이 됩니다. !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나뉘어졌느냐? 그 사람에 대한 소속, 지도자에 대한 소속, 누구를 따라가야 되느냐? 바울을 따라가느냐? 베드로를 따라가느냐? 이런 사람에 대한 소위 소속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지도자가 더 똑똑하냐? 누가 더 많이 아느냐? 사람의 지혜를 높이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 대한 판단 결국 누가 더 나은 지도자냐? 이런 판단의 경향이 분파의식을 촉진시키고 있었습니다. 왜 교회 안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그것은 바로 청지기영성에 대한 결여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청지기영성에 대한 중요한 이미지를 소개합니다. 먼저, 일꾼의 이미지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일군이란 어떤 일군입니까? 본문 1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군이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했는데 일꾼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래 뜻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밑에서 노 젓는 사람입니다. 이 단어가 나중에는 노예를 뜻하는 말이 되기는 했지만 본래는 옛날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일 당시의 전함의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입니다.

 

노 젓는 사람들이 호흡을 맞추어 모두가 균일한 힘과 균일한 리듬으로 노를 저어야 배가 빨리 가고 똑바로 가며 오래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노 젓는 사람들이 누구는 빨리 젓고 누구는 천천히 저으며 누구는 힘껏 젓고 누구는 살살 저으면 배가 잘 나아가지도 않고 노 젓기가 너무 힘들어 다들 곧 지치고 맙니다.

 

노 젓는 배에 구령이나 북으로 노 젓는 속도와 강도를 조절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 젓는 노예들 중에 요령부리며 힘껏 젓는 자가 있지 않나 살피며 그런 자에게는 가차 없이 채찍을 후려치는 감독관도 있었던 것은 한 척의 배가 원활하게 항진하기 위해서 노 젓는 자들의 일치된 호흡과 동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다운 청지기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호흡을 맞추며 함께 섬겨야지 어떤 사람은 독주하고 어떤 사람은 방관하며,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는데 어떤 사람은 요령만 부린다면 교회가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또 노 젓는 사람들 사이에 파가 갈려서 저쪽 파 사람들이 노 저으면 이쪽 파 사람들은 손 놓고 쉬거나, 저쪽 파 사람들이 앞으로 가게 노 저으니 우리는 뒤로 가게 노 젓자 하면 그 배가 움직이겠습니까?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온 교인, 모든 제직이 한 마음으로 호흡을 같이 하고 같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고 빨리 목표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초 노릇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중심으로 파벌들이 있어 주도권 다툼하는 교회치고 성장하는 교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하듯이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가고 있는 교회들을 보면 다 파벌싸움에 빠져있는 교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소개하는 청지기영성은 맡은 자의 이미지입니다. 1절 후반절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맡은 자들을 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을 한다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 하우스 매니저, 혹은 하우스 키퍼, 집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혹은 스튜어드라는 낱말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청지기 영성은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스튜어드가 있습니다. 스튜어드, 스튜어디스가 있는데 그 분들은 거기서 열심히 손님들을 섬기고 서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단어가 본래 희랍어 단어로 씌어졌을 때 그 뜻은 부지런히 집안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주인의 양식이지만 주인이 맡겨준, 주인이 분배하는 배급하는 양식을 잘 받아 가지고 제 때에 양식을 부지런히 공급하는 사람, 그것이 맡은 자입니다.

 

맡은 자. 결국 우리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맡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맡긴 것, 맡겨주신 그것을, 잘 관리하는 자가 청지기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에게 맡긴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 에서 이 비밀을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청지기영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관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 성경대로 믿는 자,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자입니다. 청지기가 주인 되신 분을 외면하고는 바른 청지기가 될 수 없듯이 성도들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따라야 합니다.

청지기영성 세 번째 이미지가 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했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찾아보면 <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피스티스>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믿음>이라는 뜻입니다. <피스토스>라는 <충성>이라는 말과 <피스티스>라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같은 데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가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충성이란 믿음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인을 믿고, 또한 주인이 나를 믿을 수 있을 때에 충성이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은 다른 말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믿을만할 때에 복을 주십니다. 내가 아무리 잘 났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미덥지 못하면 그 무엇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돈만 주면 망가지는데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지식만 주면 교만해 지는데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잘살게 만들어 주자니 교회 안 나올 텐데 어떻게 잘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달라한다고 무조건 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을 수 있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내 믿음과 충성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충성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나 자신의 판단은 언제나 미흡합니다.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바울이 오늘 그것을 알았기에 남의 판단도 자신의 판단도 삼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3,4절이 그 말씀입니다. 특히 4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세상을 살면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만 본다면 이 이상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자기스스로의 기준으로 보상을 바라거나 결과를 기대하면 그 최선의 의미마저도 희미해져 버립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한 그 일의 성격마저도 하나님이 분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것만이 옳고 거기에 기준을 두고 충성을 다한다고 하는 사도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청지기는 바른마음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바로 청지기영성입니다. 청지기 영성은 노예와 같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지배자도 아니고 갑도 아니고 머리도 아닙니다. 오직 일꾼일 분입니다. 또한 맡은 자로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한 분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처음도 충성 마지막도 충성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끝까지 충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