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월드컵(히12:1-2)-목사 주태근
신앙인의 월드컵(히12:1-2)
미국에서 미식축구의 인기라고 하는 것은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어느 마을에 있든지 이 경기가 시작이 되면, 수 만 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함성을 지르고 굉장한 열기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식축구의 결승전 티켓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여기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결승전 열리는 날, 한 남자가 어렵사리 입장권을 하나 구했습니다. 그리고 먼 길을 차를 몰아서 경기장까지 달려가서 제 시간에 입장을 하고 보니까 자기 좌석이 그 큰, 십만 명이나 모이는 큰 축구장 맨 뒷좌석이었습니다. 거기서 바라보니까 선수들의 백넘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 합니다.
“아 이거 참 좌석 싼 걸 샀더니 이렇게 아주 잘못 구했구나!” 하지만 여기 들어와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하게 생각하며 구경을 하다가 보니까 저 앞자리에 멀리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하, 저거 어떻게 비어 있을까?” 그리고 슬슬 내려가서 그 옆에 있는 사람보고 “저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러니까 “앉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 감격해서 옆 사람에게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자리가 비어 있습니까?” 그랬더니 답합니다. “제 아내를 위해서 샀던 표인데 이렇게 비어있습니다.” “그럼 아내가 왜 여기 못 왔습니까?” “아니요,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든지 친지라도 모시고 올 것이지 이 귀한 자리를 어떻게 이렇게 비워놨습니까?” “그 친지들 다 장례식에 갔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아니 자기 마누라 장례식에는 친족들과 친구들이 다 참석하고, 자기 홀로 미식축구를 관람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미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포츠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매 4년마다 전 세계의 68억 인구가 열광한다고 하는 월드컵 경기가 금년에는 남아공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지역 예선을 치른 32개 나라가 모여 현재 8개의 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를 치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유럽축구연맹 타이틀은 쟁취했던 그리스를 2대0으로 이기자 16강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닐슨미디어리서치의 집계결과 이날 경기의 시청률이 서울 기준으로 48%였고, TV를 켠 가족 중의 시청비율을 따져 산정한 점유율은 61.3%로 나타났습니다. 공중파 방송 3곳 중 한 방송국에서만 독점적으로 중계한 결과가 이정도이고 보면 우리 국민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목요일 아르헨티나와의 결전에서 4대1로 패함으로 16강에 대한 희망이 어두워지고 있지만 나이지리아와의 남은 한 경기에 큰 기대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운동 경기를 좋아합니다. 선수들이 보여주는 굳센 체력과 불타는 투지가 하나로 엉켜 탄생시키는 극적인 장면에 통쾌함을 찾습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를 세계인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어찌 보면 공 하나가 날아가는 방향에 따라 때론 기뻐하고 때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축구라는 게임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개막전부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남아공이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와 1-1 무승부를 거두었고, 대한민국이 2004 유럽챔피언 그리스를 완벽히 압도하며 2-0 승리를 거두자 전 세계가 놀랐고, 축구종가 잉글랜드가 1-0으로 앞서나가다 미국에 덜미를 잡혀 1-1 무승부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일본이 아프리카의 강호 카메룬을 1-0 으로 잡는 대이변이 일어났고,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가 파라과이와 1-1 무승부에 그쳤습니다. 뉴질랜드 역시 유럽의 슬로바키아와 1-1 무승부를 거두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리고 세계랭킹 1위 브라질이 북한에 2-1로 이기긴 했으나 혼쭐이 났습니다. 그리고 최대 이변이 등장했습니다. 스위스가 우승후보 0 순위 스페인을 1-0으로 물리쳤습니다.
운동 경기가 주는 재미나 매력이 이런데 있습니다. 만일 모든 경기의 승부가 수준이나 실력에 따라 결정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 예측은 가능하지만, 한편 도처에 깔려있는 우연과 뜻밖의 상황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강자는 완벽한 승리를 준비하고, 약자는 기적 같은 승리의 꿈을 저버리지 않게 됩니다.
운동 경기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가 그러합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 배운 사람이 항상 뒤에 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 저 사람은 얼마만큼 성공하겠다는 예측 가능하지만, 때로는 우리 인생이 뜻밖의 일들을 만나 실패와 성공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삶의 모습의 축소판으로서의 월드컵 축구 경기가 지금 전 세계의 축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스포츠를 많이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축구만큼은 흥미 있게 바라보면서 흠뻑 빠질 때가 있습니다.
축구경기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영원한 승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승자는 내일의 패자입니다. 내일의 패자가 오늘의 승리도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승자나 권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영원한 영광도 없습니다. 이길 수도 질수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한, 자만은 금물임을 깨닫도록 만듭니다. 오만한 자세를 가지면 결국 패합니다. 자만해 경기 연습을 소홀히 하면 그 결과가 그대로 나옵니다. 승리에는 인내와 겸손과 자기 절제가 필수적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경기를 아직 안 해도 이미 진 사람입니다. 아니 앞으로 질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긴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고 남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정신력의 싸움, 자기 절제와의 싸움, 감정의 싸움, 끊임없는 훈련의 싸움 이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운동 경기는 상대방을 이김으로 승리자가 됩니다. 승리는 영광이요 패배는 비참합니다. 한 팀이 이기면 한 팀이 집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의 대부분이나 우리 신앙은 상대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또한 승리를 위해서 지불하는 대가가 크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는 바람직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때로는 힘듭니다. 때로는 고독합니다. 때로는 고통스럽습니다. 시간도 정력도 인생의 목표도 오직 하나를 위해 쏟아 붓습니다. 한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다 포기합니다.
승부는 몇 분, 또는 몇 초라는 잠깐 사이에 판가름이 납니다. 그러나 이런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 선수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불했는지 모릅니다. 경기의 몇 분, 몇 초를 위해서 10년 이상을 공들였습니다. 참 귀한 인생의 교훈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재미도 모르고, 일요일 쉬는 즐거움도 빼앗기면서 교회에 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장 큰 영적 만족을 위해서 덜 중요한 세상일을 버린다는 이 진리를 이해 못합니다. 은혜는 체험한 자 외에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신앙은 체험이요 경험이요 행복입니다. 영적 행복이 모든 것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부흥사 무디 선생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도중에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염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승리입니다. 오늘도 전도자의 책임을 다하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대로 죽는다 해도, 다른 기쁨 다른 즐거움 다 누리지 못한다 해도, 내 삶의 목표를 향해 살다 가는 것, 그 자체가 소중하다는 고백입니다. 궁극적 승리를 위해서 다른 것 다 포기해도 아깝지 않다는 말입니다.
또한, 반칙은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운동은 철저하게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규칙에 벗어난 행동을 하면 심판의 판정을 받게 됩니다. 경고를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퇴장을 당합니다. 아무리 골을 잘 넣었다 하더라도 규칙에 어긋난 것이면 인정되지 않습니다. 반칙으로 이긴 선수는 불명예를 남깁니다.
우리는 이 땅에 편만한 부조리를 강조한 나머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고 너무나 쉽게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거짓된 자에게는 결코 영광을 주지 않습니다. 공의의 규칙이 인생살이를 공정하게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잃지 말고, 이 믿음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유혹받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는 운동 경기를 통해 일체감을 갖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경기를 보면서, 선수 한 사람이 넘어지면 우리 모두가 아프고, 선수가 한 골을 넣을 때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까? 경기장에서의 우리 한국 팀의 승리가 마치 내 생애 최고의 날인 것처럼 많은 이들이 기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골을 넣은 그 선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가깝습니까?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러나 같은 동족이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합니다. 분명히 선수는 선수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운동 경기에 가 있으면, 선수보다 내 마음이 더 급합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입니다. 어떻게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분이 오늘 나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분이 나의 죄와 허물을 다 속죄해 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과 내가 일체감을 가질 때, 마음과 감정과 영혼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그 구원의 신비를 내 것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당신은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우리는 운동 경기를 통해서 느끼면서, 신앙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남아공에서는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들이 사는 이 자리에서는 신앙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는 국가 대표 선수들이 경기하지만, 여기서는 나 스스로가 신앙의 선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신앙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입니다. 선수들이란 뽑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 달리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낸 선수들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 월드컵의 선수들입니다. 우리는 이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4장8절에는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경기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신앙인의 월드컵에서의 승리의 비결을 본문에서 교훈합니다.
먼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무거운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불필요한 무게를 덜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체중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몸이 무거우면 이길 수 없습니다. 무거운 옷도 벗어버리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어야합니다. 무거운 짐이 있다면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앙에 방해가 되는 짐은 다 벗어 버려야 됨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는 취미 생활 때문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친구들과의 사귐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목회가 방해가 됩니다. 텔레비전에서의 드라마가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도 장사도 중요합니다만, 때로는 이것이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것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이런 짐들은 다 벗어 버려야 하는데, 이런 짐들 때문에 신앙의 경주를 포기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의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 이런 짐들을 벗어 버립니다. 결단력을 가지고 잘라버립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또한 얽매이기 쉬운 죄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 이것은 우리를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죄, 나를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죄를 말합니다. 사람마다 강하고 약한 면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붙어 다니는, 얽매이기 쉬운 죄는 각각 다 다릅니다. 에서는 사냥꾼 출신으로 남자답지만 배고픈 것에는 연약했습니다. 물질분야에 약합니다. 야곱은 지혜가 있었지만 남을 잘 속이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고등사기군의 기질이 있습니다. 모세는 지도력이 참으로 위대했지만 혈기와 분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만 바라보고 이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사울 왕은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남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육신의 정욕에 약했습니다. 평생 이 약점으로 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얽매이기 쉬운 죄가 하나씩은 있습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이겨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신앙인으로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또한 인내심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심입니다. 우리 현대인은 느긋한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진득한 마음이 없습니다. 너무 조급합니다. 한국인은 특히 빨리 빨리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도 그렇습니다. 여유가 없이 너무 서두릅니다. 매사에 조급하게 삽니다. 우리는 특별히 신앙생활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장거리 마라톤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주실 때, 우리가 그 응답받기를 포기하고 있다면, 그래서 인내가 부족해서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되 열매 맺기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생명이 천국 백성이 되는 것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존재가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돌아서는 것, 참으로 귀한 일인 만큼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전도하되 인내로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해야 합니다. 징계의 채찍을 맞을 때, 고난의 쓴 잔을 마실 때, 필요한 것은 인내하는 일입니다.
본문6절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지만, 인내의 결과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월드컵에서 이기는 길은 인내입니다.
또한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경주의 목표는, 골인 지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에 굴곡이 있고, 때론 신앙에 의심과 회의가 있지만, 우리 목표인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은 약하고 죄가 크고,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성공한 내 자신을 바라보면 교만하기 쉽고, 실패한 내 자신을 보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다가는 낙심하기 쉽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이제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의 월드컵에서의 승리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애 요인을 빨리 재거하십시오. 빨리 재거할수록 가속도가 생깁니다. 또한 잘 달릴수록 서두르지 마시고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당장 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기적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을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믿음이 있고 예수님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행복합니다. 신앙생활의 감격과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주님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들 모두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