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록

종교개혁기의 설교/설교의 황금기-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7. 27. 14:05

설교학 강의록(6) : 교수 - 주태근

 

6. 종교개혁기의 설교

 

설교의 동면을 깨운 것은 1)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운동 즉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는데서 설교의 재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2) 십자군 모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군으로서의 헌신을 부르짖었던 설교가 버나드(Bernard of calirvaux)에 의해 성지의 회복이 목적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다는 메시지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3) 설교의 재기에 큰 몫을 담당한 무리들은 도미니칸 수도원과 프랜시스 수도원 운동 등이다. 이들의 출발은 서로 달랐으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려는 의도와 방법은 동일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은 안토니(Anthony of Padua),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신비적 설교의 대가 엑카르트(Meister Eckhart), 타울러(Johannes Tauler) 등이다. 특별히 1361년 위클리프의 설교를 통해 설교의 불길이 일어났다. 개혁의 주역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루터(martin Luther),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칼빈(John Calvin), 낙스(John Knox)와 같은 설교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오늘의 개신교가 있도록 하는 데 그들의 생명을 다한 설교가들이었으며 동시에 개혁가들이었다.

 

1)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미사를 지적하며 초대교회처럼 말씀과 성례전이 동반된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2) 그들의 설교는 사도들의 설교내용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 사랑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를 외쳤다.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의미와 교훈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만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단순한 복음의 전달에 전심을 다하였다.

3) 설교의 사역이 목사의 가장 일차적인 사명임을 강조하였다.

4)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주시는 은총의 전달은 말씀과 성례전과 성령의 3대 방편을 사용하시며 그것이 오늘의 역사 가운데서도 계속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5) 개혁기의 설교가들은 설교를 결코 사변적이거나 수사학적인 능변에 의존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고 직선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현장의 인간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전달에 노력하였다.

6) 설교의 역사에 개혁가들은 설교의 바른 정신과 그 방향을 정립하였다. 다간(E. C. Dargan)의 말대로 "개혁가들이 복구한 설교의 방법과 내용과 이해는 오늘의 설교가 현대를 직면하는데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초석으로서 작용할 것이며 보호의 벽이 되어 줄 것이다."

 

 

7. 설교의 황금기

 

가톨릭교회마저 설교의 소중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 실례로서 자체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모였던 트랜트 회의(The Council of Trent, 1545-1563)에 보였던 설교의 관심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지난 세기들 동안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설교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때보다 자주 그리고 열심히 설교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572년 존 낙스의 죽음을 끝으로 개혁의 주역들이 떠난 다음 순수한 설교의 향상은 또 한 번의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지속적인 가톨릭에 대한 대항, 정교의 분리, 이단의 경계 그리고 개신교의 정비와 정착 등에 대한 비설교 영역의 시급한 활동 등은 설교자들로서 말씀의 선포와 해석에만 집착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설교의 사역(preaching ministry)은 다시 설교의 대역사의 장을 이 땅에 펼쳤다. 이 대역사의 장은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영국 개신교의 청교도 운동 2) 웨슬리를 중심한 복음주의 운동 3) 미국의 대각성 부흥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펼쳤다.

 

엘리자베스 1(1588-1603)의 치세 기간에 옥스퍼드 대학을 중시하여 일기 시작한 철저한 개혁의 추구는 칼빈의 신학에 의한 경건과 말씀의 추구를 신앙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설교의 사역에 불길을 던졌던 또 하나의 사건은 1611년 영국의 제임스와의 후원 아래 펴낸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성경의 출판이었다. 많은 설교자들은 말씀 속에 새롭게 발견되어진 진리를 설교단을 통하여 전달하게 되었고, 이 결과 영국사회의 제분야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밀톤(John Milton)과 번연(John Bunyan)같은 위대한 퓨리탄 문학의 기수들을 낳아 말씀의 생활화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치적 분열과 교회의 갈등에서 빚어진 혼돈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던 리챠드 박스터(Richard Baxter), 권력의 지배층을 향한 예언자적 설교 때문에 금지령을 받기도 하고 감옥생활도 한 존 번연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설교가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웨슬리 형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도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 성결해야 함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단체로 출발하였다. 이들은 안일한 생활에 젖은 성직자들에게 금식과 절제를 권하고 증산층의 아성으로 변해가는 교회는 가난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신앙생활의 성결을 강조하였다.

 

미국에서의 설교의 절정은 대각성 부흥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을 통하여 펼쳐진다. 1720년대의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초기 퓨리탄들의 개척정신은 쇠퇴해 가고 세속주의와 무신론주의가 점증되어 가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였던 교회는 교파간의 분열이 심화되었고, 인구의 절대수가 교회를 떠난 상태였다. 1720년 뉴저지 주의 화란 개혁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왔던 독일의 경건주의 목사 프래링허센(Theodore Jacob Frelinghuyseen)의 설교에서부터 새로운 부흥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는 신앙의 내적 경험을 통한 중생에 중점을 둔 설교를 계속하여 젊은이들과 가난한 회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결국 이 궤도는 미국을 새롭게 변화시킨 제 1 차 대각성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1730년대 초기에는 미국의 복음적 개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뉴잉글랜드에 등장하여 이 부흥운동의 불길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바로 이 무렵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주역이었던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미국에 도착하여 에드워드와 함께 이 대각성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미대륙에 10여년간 머물면서 매주 40시간씩 설교하였다.

 

2 차 대각성 운동은, 미국이 독립전쟁에 승리하여 자유 평등 민권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확립한 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자 현실의 만족이라는 세속주의를 가져오자 1801년 켄터키 주의 케인 리지(Cane Ridge)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캠프모임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영적으로 어두워져 간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였다.

1) 초기의 설교가로는 예일대 채플에서 3분의 1의 학생을 회심하게 했던 드와이트(Timothy Dwight), 19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전도자이며 능력의 설교자로 불리는 휘니(Charles Grandison finney),

2) 대각성 운동이 단순한 영혼의 각성으로 끝날 수 없으며 사회와 정치의 구석까지 파고들어야 함을 강조한 심손(Matthew simpson),

3) 프린스톤을 중심으로 한 설교자 그룹은 설교의 사역이 단순히 흥분과 자극을 주는 값싼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함께 설교자는 목사이면서 학자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신학적 바탕과 깊이가 있는 설교를 계속하여 중산층과 지성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여기에 속한 사람으로는 하지(Charles Hodge),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발판을 둔 캠블(Alexander Campbell), 매스컴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탈미지(Thomas dewitt Talmage), 테일러(william Mackergo), (John Hall), 브로더스(John Albert Broadus) 등이다.

4) 설교자와 회중의 인격체를 강조하면서 비중 있는 설교사역을 계속했던 부룩스(Phillips Brooks),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흑인의 세계에서까지 존경을 받았던 사랑의 설교자 죤스(Samuel Porter Jones),

5) 미국의 남북전쟁을 비롯한 사회적 혼돈 속에서 부흥의 불길을 확산시킨 평신도 설교가 무디(Dwight Lyman Moody)와 그 동역자들이다. 이러한 교회의 갱신운동은 사회 개혁운동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