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

종교개혁시대 예배-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7. 27. 14:14

예배학 강의록(4) : 교수 - 주태근

 

E. 종교개혁시대 예배

 

16세기 종교개혁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기적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그 시대의 현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퇴폐의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고 패역한 세대로 전락한 중세의 교회와 사회의 어두움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1517년에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교회 문에 그의 95개조문을 내어 걸므로 종교개혁운동이 실제로 폭발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중세기 예배의식에 대한 반대의견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형식적인 예배는 회중들의 깊은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교회 안에서 불안한 정신과 이에 개혁하려는 욕구가 발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루터,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청교도 및 반대운동을 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배의 개혁은 일어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예전(Liturgy)의 불만과 그 시정을 위해 발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황이라는 한 인간이 앉아서 믿음보다 제도 속에서 공적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서적 사실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인 예배 현장의 의미 상실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만남의 부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배학적인 측면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은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초의 서방교회에서 집레된 성만찬은 성찬으로서 보다 화체의 기적으로 절정을 이루었고 순수하지 못한 미신적 경배 속에 행해졌다. 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하였고 대부분의 교부들의 무식으로 성경말씀이 봉독되어져야 할 부분에 성자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이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 때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시급하고도 필연적이었다.

 

 

1. 루터의 예배

 

맥스웰에 의하면 루터는 첫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을 강조하였다. 둘째, 주님의 만찬은 중심이 되는 의식으로서 이것이 기독교회의 세계 전역에서 매일 거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셋째,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음식에 실제로 임한다고 믿었다. 넷째, 미사는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의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들을 바쳐서 그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다섯째, 자국어로 미사를 드리도록 권하였다. 여섯째, 루터는 라틴어와 대부분의 의식적인 등불과 분향과 제복을 사용하면서 로마교회의 옛 관례로 되돌아갔다. 이상에서 볼 때 루터가 의도한 것은 새로운 예배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 태도에 입각하여 초대교회 예배의 균형을 다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루터는 그의 개혁을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으나 회중예배를 더욱 알기 쉽게 해주었고 성경에서 금하지 않는 것이라면 교회에 도움이 된다 라고 결정될 때 허용하는 원칙을 제시했다. 또한 교회의 찬송가에 끼친 영향은 영속적이면서도 영광스러운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2. 존 칼빈(John Calvin)의 예배

 

칼빈은 예배의 두 중심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두고서 새로운 예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즉 그는 간편한 예배순서 속에서 초기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살리는 예배를 마련하기 원하였다. 칼빈은 개혁신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고 그 결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예배의식을 위한 예식서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칼빈은 급진적 개혁자였으며 그에게 있어서 완전한 표준은 성서와 고대교회의 관습이다. 그래서 그는 장식과 의식의 상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 내리는 비성서적인 인간의 고안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는 변질된 중세의 미사를 말씀과 성례전의 소박한 균형이 원상태로 회복된 매주의 성찬예배 곧 설교와 교제가 서로 정당한 위치를 가지는 주의 만찬에 대한 축하로 대치되기를 원하였다. 칼빈이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매주일 행할 것을 주장한 것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분명한 특징이기도 했지만 당시 제네바 행정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성만찬이 매달 한 번씩 거행될 것을 제시하였다.

칼빈은 성만찬의 신학에 있어서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신비하신 역사에 대하여는 깊은 관심과 존경을 표하고 있었으며 떡과 포도주 속에 깊이 들어가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나타내주는 상징이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칼빈은 시편 찬송이 공중 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는데 회중이 회중적인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어린이들을 뽑아 가르쳐서 회중 가운데 뚜렷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노래 부르도록 제시하였다. 그리고 칼빈의 예배의식 원리는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했고 조직화된 예배 형태 및 쯔빙글리의 극단적인 예배 형태에 결여되어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3. 쯔빙글리(Zwingli)의 예배

 

쯔빙글리는 예배의 개혁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종교개혁의 파문을 확산 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종국적 권위는 크리스천 공동체요 그 권위의 행사는 성서를 따라 정당히 행하는 조직된 정부를 통한다. 성서의 명령만이 구속력을 가졌다.”라고 주장하므로 예배순서나 의식에 대한 태도는 루터 계열과 완전히 달랐다. 쯔빙글리의 가장 극단적인 개혁은 예배 가운데 오르간을 비롯한 악기의 사용이라든지, 시편 교독을 대신하는 회중들의 찬송을 모두 삭제한 것에서 나타났다.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성경봉독과 기도, 죄의 고백과 설교만을 강조한 의식을 내세웠다. 그리고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주의 만찬이 1년에 4회면 충분하다고 믿었고 더욱이 주님의 만찬이 원래 상징적이라고 믿었다.

 

 

4. 자유독립교회의 예배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를 제외한 정치적, 사회적 제약에 억제되지 않은 급진운동들은 신약의 원시적 질서를 회복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비조직 방법을 찬성하여 많은 관례를 내버렸다. 자유교회는 전통적인 의식과 예식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주장함으로 예배의 참다운 특질을 추구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급진적이므로 새롭고 아직 해보지 못한 것을 갈망하여 관습적인 기정된 것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고정된 예배의식을 버리고 형식보다 정신을 강조하는 예배로써 더 단순한 방법을 주장하였다.

 

급진적인 개혁자들로 알려진 그리스도교 집단들은 침례교, 청교도, 독립교, 미국교도 분리주의자 및 국교반대자 등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이들의 예배 원칙을 살펴보면

첫째, 말씀전파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둘째, 예배의 활동에 회중의 참여를 강조하였다.

셋째, 교회가 성직자에게 맡긴 일정한 기능을 제외하고 성직자와 평신도 구별이 없었다.

넷째, 회중 찬송을 강조하였다.

다섯째, 신조보다 믿음을 강조하였다.

여섯째, 침례와 예배, 주님의 만찬만을 교회에서 거행하도록 하였다.

일곱째,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를 사용, 일반 사람들이 교회 예배의식에서 사용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교회에서 일어났던 예배개혁에도 다음과 같은 실패와 손해가 있었다.

첫째, 교역자가 계속 예배 의식을 주장함으로 성직 권위주의의 부활이 있었다. 그리하여 자유교회에서의 예배는 강단의 사람이 주관하고 회중은 듣는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말로만 표현하는 예배는 거의 전체인 것 같고 회중의 예배로의 참여를 방해한다.

셋째, 심각한 약점은 공중기도에 회중을 한목소리로 참여케 했는데 어떤 교회들이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교회의 예배는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서주의와 인격적 자유에 대한 열정과 교회 만능주의에 대한 배격과 같은 특징으로 인해 당시 교회들에게 커다란 파급효과를 주었으며 현대 교회의 예배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