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설교

교회의 직제(행6:1-7)-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1. 14:16

교회의 직제(행6:1-7)

 

 

목사 주태근

 

미국 정부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가 약 3,141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약 33만 명이 넘습니다. 이 때 미국 정부는 철저한 인재선발 기준을 근거로 사람을 선택합니다. 미국 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인재선발기준이 3C방법입니다. 첫째가 Competence’ (능력)입니다.

 

단순한 성적 좋은 수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업무처리 능력을 봅니다. 둘째가 Character’(인격)입니다. 사람됨과 성품을 봅니다. 그리고 셋째가 Commitment’ (헌신)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자세를 봅니다. 능력과 인격 그리고 헌신의 자세는 한 국가에서 요구하는 선발기준원리입니다.

 

유명한 테레사 수녀는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선택했을까? 인도 캘커타에서 사역하던 마더 테레사는 자기를 도울 조수를 뽑을 때 남다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인물 선택기준은 세 가지인데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는 잘 웃는 것이고, 둘째는 잘 먹는 것이고, 그리고 셋째는 잘 자는 사람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던 이유가 독특합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만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남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사역과 일치시킨 인물선택의 기준방법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사람들을 일군으로 선택하는가? 주님의 귀한 사역을 맡기실 사람을 뽑을 때 어떤 기준으로 뽑을까? 우리는 오늘 이 질문에 답을 찾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면에서 볼 때, 교회조직은 반드시 필요불가결요소입니다.

 

성경은 초대 교회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예를 들면, 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위한 자격 규정, 교회 집회의 순서들입니다. 또한 성찬의 규례, 헌금의 규례, 권징, 과부들의 등록과 관리, 교회에 시행되고 있는 규례, 질서의 필요성 등의 교훈이 그러합니다.

 

교회 역사상 교회정치에 있어서 세 종류의 형태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감독정치(Episcopalism)입니다. 감독정치는 교회가 주교들 혹은 감독들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정치입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주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교인들을 감독하며 그들에게만 교회 치리의 권한이 있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주교는 여러 교회들을 관할하고 치리하며 또 성직 임명권을 가집니다. 영국성공회와 감독교회가 이런 정치 형태를 취하며, 가톨릭교회의 교황제도도 감독정치의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두 번째는 회중정치(Congregationalism)입니다. 회중정치는 교회가 교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목사는 지교회의 한 회원에 불과하며, 교인들 위에 감독의 권위를 가지는 사람들이 따로 없습니다. 또 지교회는 개체성과 독립성을 가지며 그것을 간섭하는 노회나 총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단지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협의체 같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정치 형태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장로정치(Presbyterianism)입니다. 장로정치는 감독정치와 회중정치의 장단점을 성경적으로 보완한 형태로서, 교회가 교인들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들, 즉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의정치(代議政治)입니다. 이 방식에서는 일반 교인들의 권한과 목사의 권한이 둘 다 동등하게 존중됩니다.

 

우리는 이 정치형태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와 정통교회들이 장로정치 체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정치체제는 조직입니다. 교회도 조직입니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직제의 필요성을 가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관이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질투와 자존심, 불평과 원망 등 옛사람의 기질이 남아 있어 다양한 오해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갈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오해와 사건을 교회가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느냐? 입니다.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에 문제의 뿌리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갈등을 극복할 수 있으면 그것이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사도들이 지도하던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더 건강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6장은 교회의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공동체로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예배를 드리며 교제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모든 재물을 서로 통용하는 가족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는 주님의 축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전까지의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 중심의 교회성장입니다. 이제부터는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로 발전됩니다.

 

특별히 성경은 61절에서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그 때는 교회가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을 당시입니다. 사도들은 전도하는 일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도 올라가고 집에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제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교회는 모진 위협과 핍박 가운데서도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초대 교회가 문제없는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초대교회의 리더십을 말합니다.

 

예루살렘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놀라는 사실은 성경이 초대 교회의 내부 문제를 숨김없이 거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신자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바나바처럼 그들의 소유를 통용하기 위해서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부부의 신앙심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에 미혹이 되어서 성령을 속이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은 즉시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위선적인 신앙에 경종을 울린 사건입니다.

 

성경은 또 다른 문제가 교회의 성장과 함께 발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성도간의 원망입니다. 원망은 교회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러므로 원망은 초대 교회 안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61절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교회의 당파나 분쟁은 나중에 고린도교회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한 예루살렘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헬라파 유대인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기득권을 쥐고 있는 쪽은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외국 태생의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 내부의 원망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헬라파 유대인들 쪽의 과부들이 매일 음식을 제공받는 일에서 빠졌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갑자기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다보니 교회 성장에 걸 맞는 조직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역에서도 형평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사람들의 원망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원어는 공귀스모스’(goggysmos)입니다. 조용하고 나지막한 소리의 원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런 원망의 소리를 해결하는 방안을 서둘러 세웠습니다.

 

먼저,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직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역의 본질적인 부분과 중요하지 않는 부분을 선별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에게는 과부들에게 구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결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 사도들은 본연의 사역에 집중하기 위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구제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겠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3). 여기서 이 일은 구제하는 일입니다. 봉사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하라는 뜻입니다. 구제하는 일에도 자격조건이 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밥 푸는 봉사도 교회의 신망을 얻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머리를 때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봉사도 다 같은 봉사냐?아닙니다. 봉사는 다 같은 봉사입니다. 다만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른 봉사의 내용이 다른 것뿐입니다. 이것이 조직을 운영하는 교회의 직제입니다.

 

봉사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고 전하는 일이나 밥 푸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봉사입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개역개정 성경 각주에서는 1절의 과부들에 대한 매일의 구제4절의 사도들의 말씀의 사역을 동일하게 헬라어로 봉사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밥 푸는 봉사나 설교하는 봉사나 구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직제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또한 초대교회는 사역의 기득권을 양보했습니다. 먼저 가진 사역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기로 결정합니다.

 

사도들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고 안수하여 사역을 위임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사람들의 이름을 면면히 보면 모두가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니골라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사로 선택 받은 사람들은 기존에 기득권을 가진 히브리파 유대인이 아닙니다. 일곱 안수 집사는 아웃사이더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교회의 중심이 히브리파에서 헬라파 유대인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퍼져 나갔습니다.

 

특별히 성전의 제사장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믿음에 집단적으로 순복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성전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 성전을 넘어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게 됩니다. 놀라운 복음의 섭리입니다.

 

이렇게 헬라파 유대인이 교회 사역의 중심에 선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18절 말씀처럼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된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은 우선 신학적 입장부터 히브리파 유대인들과는 다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습니다. 구원도 이스라엘 중심의 배타적 구원입니다. 반면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개혁적인 신학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사고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정신은 예루살렘 성전을 넘어 세계로 향했습니다. 교회가 진보하고 개혁함으로 선교적교회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직은 힘이 있습니다. 조직력이 있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느 구성원들로 이루어졌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도 조직체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구성 멤버는 다양성을 가집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공동체 일원이 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영적리더십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른 세상의 공동체와 달리 영적리더십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디아코노스”, 집사를 세웁니다. 우리는 디아코노스라는 말에서 직분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이 말과 동일한 어원을 가진 단어가 6장에서 계속 등장하는 데 그것은 디아코니아입니다. 1구제”, 2일삼다”, 4힘쓰리라등입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 섬김, 일을 의미하고, ‘디아코노스는 봉사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즉 직분은 그 본질이 봉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직분이든 본질상 집사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봉사하는 사람이며, 섬기는 자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는 늘 섬김을 위해 영적리더십을 구비해야합니다. 성경에서 디아코노스의 자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3절을 봅니다.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입니다.

 

첫째, 반드시 지교회 등록한 성도이어야 합니다. 교회 정식 멤버로서 등록이 되어 있는 지교회 일원이어야 합니다.

둘째,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거듭남으로 성화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입니다. 세상의 지적 지식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지혜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인격과 덕이 구비된 사람을 말합니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존중 받는 인물로서 모범이 되어야합니다. 이렇게 자격기준을 놓고 교회는 직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이 자기의 본 업무에 전념하고 일곱 집사들이 사회사업을 전담하게 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교회의 부흥입니다. 직제의 결과로 인한 부흥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초대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적리더십에 의해서 무산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사단의 공격은 현대교회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꾼들의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합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교회 내부의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을 때 사역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고 사역자를 세워 사역을 분담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려놓고 사역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욱 발전하고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발전은 교회의 거룩한 속성을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직의 발전이 교회의 발전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발전이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들이 잘 드러나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유기체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정말 건강한 교회는 조직이 있지만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서로 협력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원리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3: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