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라(눅 4:1-13)-목사 주태근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라(눅 4:1-13)
설교: 목사 주태근
조지 바나(George Barnas)라는 분이 쓴 책 중에 "주전자 속의 개구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뜨거워서 얼른 뛰쳐나옵니다. 그러나 차가운 물에 개구리를 넣고 아주 서서히 데우면 개구리가 따뜻해서 잠들고, 결국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 책에서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사단이 교회를 그런 방식으로 넘어뜨린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광명의 천사를 가장해서 찾아옵니다. 사단이 유혹할 때는 항상 그럴듯하게 다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천사인지, 마귀인지 분간을 못하도록 만듭니다. 적그리스도는 참 그리스도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적그리스도인 까닭은 그리스도와 너무 흡사하여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적그리스도 실체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단의 유혹이 바로 그러 했습니다. 예수님더러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섬기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마귀의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시험의 내용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인양 나타나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사단의 요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라는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우리 주님이 인용하신 내용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신명기 본문에는 없는 한 단어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즉 영어로 "only"라는 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다만'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까? 신명기에는 없는 '다만'이라는 단어가 추가된 것은 신명기의 말씀을 더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말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만을 예배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함으로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미국 기독교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성인의 비율은 선진국 중에서 미국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시간 대학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주 드려지는 예배나 종교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전체성인 미국인 인구의 44%인 것으로 발표 되었습니다.
이는 전 인구의 38%인 카나다와, 27%인 영국 그리고 21%인 프랑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이밖에 독일은 14%, 일본은 3%, 러시아는 25%인 것을 각각 조사되었습니다. 이 조사를 실시한 로널드 잉글하트 연구원은 미국이 이처럼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은 노령인구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종교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가난한 나라 특히 경제적인 불안정이 만연한 곳일수록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통계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세란 자신의 부족함으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이나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란 말은 구약에는 ‘아바드’입니다. 이 말은 봉사 혹은 섬김을 의미합니다. ‘굴복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며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프로스퀴네오’란 단어인데 ‘경배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의 ‘라트레이아’(latrei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섬김’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행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예배의식’(liturgy)이란 단어의 어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깊이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에 그 핵심적 목적은 제사 즉 예배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애굽에서 나온 후에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마음껏 하나님께 제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예배하게 하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생활의 성막 생활은 출애굽의 또 다른 은총입니다. 성막은 막연히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성막을 중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예배 중심, 성막 중심의 삶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역시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생활입니다.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의로운 생활입니다. 아벨은 예배를 통하여 의롭게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이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예수님은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무지 가운데 드리는 예배형태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경전으로 믿습니다. 그들은 선지서를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편을 아예 읽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 지식이 제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배는 열광주의적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부분적 진리를 고수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예배에 대하여 예수님은 올바른 예배를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리라는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in truth)라는 말입니다.
성령이나 진리가 아닌 자기만족의 예배, 자기 위안의 예배, 이런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깊고 호소력 있는 설교가 였던 [웨렌 위어스비]목사님이 노년에 은퇴한 후에 쓴 책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그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동안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섰지, 예배하기 위해서 서지 않았다. 다시 내가 목회한다면 설교자가 되기보다 먼저 예배자가 되겠다.” 말했습니다. 그가 또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역, 즉 선교라든지 봉사라든지 가르치는 일이라든지 모든 사역은 예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역일 경우에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적 예배와 상관없이 그런 사역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야만 교회의 각 부분에 새로운 피가 전달되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도 개개인의 가정과 삶 속에까지 그 생명력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프로그램이 열매를 가져올 수 있고 모든 봉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병들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요란하게 늘어놓는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은혜를 못 받는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배가 살아서 끊임없이 맥박 치며, 하늘의 생명력을 얻게 될 때 나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의 총체적인 표현이고, 고백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 인생을 70 년으로 놓고 재미있는 계산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70년으로 볼 때 20년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20년은 잠자면서 보내고, 6년은 먹고 마시면서 보내고, 7년은 쉬면서 즐기면서 보내고, 3년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다가 보내고, 또 1년은 전화통 붙들고 보낸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보내는 시간을 1년 반 정도로 잡았습니다. 70년 중에서 1년 반이라고 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적어도 5분 이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해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적어도 5분 이상 하루를 잘 보내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에 나와 적어도 3시간 정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70년 중에 1년 반이나마 예배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어떻습니까? 조금만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조차 못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한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1 주일에 3 시간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70 평생 동안 1년 반 조차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년 반을 채우려고 해도 예배를 위해 지극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성공이 신앙생활의 성공을 가져오고 모든 삶의 성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이 교회 다니면서 무신론자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출석하였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이 사람이 어느 날 성경을 대하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랫동안 출석했는데 나는 이렇게 익숙하게 종교적 환경에 접했었는데 나는 설교를 수없이 들어 왔는데 어쩌면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까?”그러던 존 번연이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읽다가 어느 날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가는 것이 사단이라는 사실 앞에 그는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사단이 내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 안목이 없어져서 나의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자신이 사단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이 존 번연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부터 존 번연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진하게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마침내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는 참된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敬拜)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