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기능-교수 주태근
설교학 강의록(8) : 교수 - 주태근
2. 설교자의 기능
클레어몬트의 제임스 샌더스(James sanders) 교수는 설교자는 성경의 기록자들이 어떠한 종류의 해석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본문이 회중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제사장적(constitutive hermeneutic)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회중을 책망하고 소명 받은 자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예언자적인(prophetic hermeneutic)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야 설교자도 설교에서 제사장으로, 아니면 예언자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해이스(John Hayes)와 칼 할러데이(Carl Holladay)는 그들이 저술한 「성경적 주석」(Biblical Exegesis)이라는 책에서 제사장적인 방법과 예언자적인 방법에 교육적 방법을 추가하고 있다.
1) 예언자적 기능
교회의 실존은 예언적이다. 그래서 만일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세계에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휴브너(Harry Huebner)는 “교회를 단순히 하나의 예언적 임무를 띠고 있다고 보는 것보다 본래부터 예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가에 강한 영향을 준다.”고 말하였다. 또한 요더(John Howard Yoder)의 제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건들을 계속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모인 백성으로 시작되었으며 존재하였다고 이해될 때에만 예언자들의 중요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관점으로부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해석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실존에 매우 중요하였다.
설교자는 예언자의 전통에 서 있다. 설교자의 정체성은 예언자이며, 예언자로서 설교자는 ‘예언적 설교’(prophetische Predigt)를 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선포적 사명(kerygma)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전령이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와 어둠과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원형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며(막1:14-15),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을 부르셔서 그 기쁜 구원의 소식,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시대의 예언자로서 설교자들이 감당해야 할 선포적 사명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예언자로서 설교자들이 예언자적 감각을 가지고 선포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바로 이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고 이 시대의 풍조인 물량주의와 황금만능주의, 세속주의와 형식주의, 성공주의와 성장제일주의를 비판하고, 지금 거센 도전의 물결로 밀려 온 지구시장화-맘몬의 우상화, 정보화-다중매체의 우상화, 기술과학의 진보화-기계의 우상화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폭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구원의 길로 가게 하는 일, 이것이 설교자의 예언자적인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설교)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명료하게 선포할 수 있는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기상 곧 천기를 보는 눈을 밝히고,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아는 일이다. 이 일이 바로 설교자가 설교를 위해 글방에서 본문(Text)을 주석(exegesis)하는 일이고, 그 본문 (그 때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상황(Context)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오늘의 말씀)으로 듣기 위해 명상(meditatio)하는 일이다. 이 일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함께 본문을 주석하고 명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수 있다. 그 다음,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시대의 징조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예언자적 감각을 갖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일은 신문을 읽는 일이다.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인접학문인 인문학과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그들 학자들과 깊은 대화를 하며 배우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은 곧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인가를 밝혀 아는 일이다. 이렇게 예언자적 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Text, 하나님의 뜻)과 오늘의 상황(Context, 이 시대의 요구)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밝히고, 그 문제를 향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선포 할 수 있을 때, 이것이 ‘청중으로부터 자유로운 설교’가 되며, 이 같은 설교가 목회자의 권위를 갖게 하고 동시에 지도력을 갖게 한다.
2) 제사장적 기능
설교자는 제사장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정체성은 제사장(혹은 목회자)이며, 제사장(혹은 목회자)으로서 제사장적 설교 혹은 ‘목회적 설교’(seelsor-gerische Predigt)를 해야 한다. 설교자들은 제사장으로서 제사장적 연대감과 영성을 가지고 화해의 직책(봉사 및 치유)을 감당하기 위하여 ‘목회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 목회적인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언자적인 설교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예언자의 설교가 위기의식을 갖게 하는 심판의 설교라고 한다면, 목회적인 설교는 회개하게하고 용서하는 설교라 하겠고, 예언자적인 설교가 정의의 설교라고 한다면 목회적인 설교는 위로와 사랑의 설교이며, 예언자적 설교가 골수를 쪼개는 날카로운 칼과 같은 설교라고 한다면, 목회적인 설교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과 같은 것이고, 그 어머니의 손에 쥐어진-상처를 꿰매는- 바늘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또한 예언자적인 설교가 우리 사회의 죄악을 고발하고 비리를 들추어내고 파헤치고 비판하는 설교라고 한다면, 목회적인 설교는 사회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분열을 통합시키는 화해의 설교라 하겠으며, 예언자적 설교가 냉철한 지성을 가지고 말(언어)로 선포하는 것이라면, 목회적인 설교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몸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설교와 삶의 괴리가 없는 설교라고 하겠다. 그리고 예언자적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일반적으로 선포하는 ‘청중으로부터 자유로운 설교’라고 한다면, 목회적인 설교는 청중들의 아픔과 고통과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설교라 하겠다.
또한 제사장의 말씀 구현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예언자의 열정과 목자의 돌보는 힘(능력)에 “인간의 조건이 피할 수 없으나 인간이 된 말씀의 신비에 의해 변화되는 상황에서 성만찬을 축하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한다.” 라이스(Charles L. Rice)가 주장하듯이, 제사장적 설교자는 신앙부흥보다는 성례전에, 청중보다는 회중(Congregation)에게, 그리고 전자로 된 토크쇼 매개체보다는 인간화 된 공동체의 모임에 더 관계된다. 그래서 제사장적 설교자는 성만찬에서처럼 설교를 구체화하여 신앙공동체의 삶을 자신과 더 밀접한 것으로 확인하도록 한다. 설교의 예전적이며 성례전적 상황에 있는 제사장적 설교자는 “전체 공동체에 속하고 있는, 예수의 고난을 의미하는 부수어진 빵과 포도주와 같이 설교하는 순간에 나누어진 공동의 삶과 이야기를” 구체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의 말씀 구현은 예언자의 비전을 풍성하게 하여 예언적 설교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또한 셰퍼드(Massey Shepherd Jr.)는 “예전은 주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제공하고 그들이 그 사명을 위해 불타도록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적으로 올바른 예전에 의해 제공된 설교는 강제적인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를 피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일(the Work of the People: 예전)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요청할 것이다. 충실하며 창조적인 예전에서의 설교는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키고, 사람들의 필요를 향해 움직이도록 격려하고, 그리스도의 넓은 사랑을 기억하도록 집중하게 하는 믿음의 상징과 이미지를 높이고, 모든 형태의 억압과 노예화 문제를 제기하는 하나님의 나라나 통치를 향하도록 할 것이다.
3) 교육적 기능
윌리엄 칼 3세(William J Carl Ⅲ)는 그의 책 ‘Preaching Christian Doctrine'에서 "가르침의 사건으로서의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돕는다." 라고 말한다. 제임스 콕스(James Cox)는 “Preaching"에서 가르침으로서의 설교를 주장한다. 가르침은 복음의 선포의 부분으로서, 복음을 따르는 것으로서 복음을 들려지게 하는 적당한 준비로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설교자의 임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글 ‘When the Preacher as a Teacher’ 에서 ”역사적으로 교회의 설교는 강한 교육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교회 교육의 중심이었다.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믿고 행동하기 위한 부름으로서의 설득인데 이때의 설득의 수단은 분명히 복음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한다. 웨스트호프(Westerhoff)는 ”가르침을 복음의 방향성이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리고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여러 학자들이 설교에서의 가르침의 중요성이 제기되다가 로널드 알렌(Ronald Allen)에 의해 조심스럽게 발전되었다. 그는 ‘’Teaching Sermon"에서 모든 설교는 가르침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알렌의 글은 가르침의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정체성은 바로 ‘교사’이며, 교사로서 설교자는 ‘교육적인 설교’(pädagogische Predigt)를 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교육적 사명(didache)으로서 교인들을 ‘훈련’(disciplina)하여 예수의 제자로 삼는 일이다. 다드(C.H. Dodd)는 선포(kerygma)와 가르침(didache)을 구별한다. 디다케는 예수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신자답게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훈하고 훈련하는 일이다. 그래서 설교학에서는 ‘디다케’를 교훈적인 설교 혹은 교리적인 설교라고 한다. ‘사람을 교육한다.’는 것은 ‘사람을 훈련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성도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여 훈련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일이며, 또한 교회가 교인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다. 이것이 교회의 교육적 사명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교육적인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철이 들어 성숙한 교인이 되어 인간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이나 온갖 세상적인 풍조에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주께서 교회 속에 말씀의 봉사자들, 즉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는데, 이들이 하는 일이 바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이다(엡4:11-16).
칼빈은 교회란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연병장이며, 교회의 훈련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교회의 훈련(disciplina, 징계 혹은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반대하여 날 뛰는 사람들을 억제하고 길들이는 ‘굴레’와 같으며,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나태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박차를 가하고, 참혹하게 타락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 부드럽게 징벌하는 아버지의 ‘매’(회초리)와 같다고 한다. 이 같은 칼빈의 전통에 서서 복음주의적인 목회를 강조한 스위스의 실천신학자이며 목회자인 투루나이젠(E.Thurneysen) 역시 ‘교회의 훈련’(Kirchenzucht)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의 설교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워주며 말씀을 통한 신앙의 변화와 성숙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혼돈의 문제는 설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참 본질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