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수난(눅 23: 26-49)-목사 주태근
십자가와 수난(눅 23: 26-49)
목사 주태근 : 수난주일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해서, 제 삼일에 살아나야 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런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간청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는 것은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인데,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넘어지는 것 같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넘어지는 일이라고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특별한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징은 그 종교의 본질과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집니다. 중국의 신학자 C. S. 송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불교의 상징인 연꽃에 대해서 이렇게 비교를 했습니다.
연꽃은 물 위에 떠 있으면서 물결이 출렁이는 대로 함께 흔들린다. 자연의 변화에 자신을 순응시키면서 적응시키되, 결코 거역이나 충돌이 없다. 매우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 연꽃이다. 이에 반해 십자가는 땅 위에 서 있다.
반석 위에 서 있어서 땅이 갈라지고 지진이 났어도 결코 흔들림이 없다. 이것은 자연에 순응하거나 조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을 극복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두 종교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름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에 대한 상징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부터였습니다. 로마의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자발적으로 퇴위한 후 황제의 위를 다투는 자가 동로마 지역에 리시니우스와 막시무스-디아스 그리고 서로마 지역에는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황제가 4명이나 되었습니다. 막센티우스의 학정에 시달린 로마 시민들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를 불러드렸습니다. 이제 막센티우스와 한판 승부로 결단을 내야할 시점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아주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군대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고, 자기의 모친 헬레나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황제는 프랑스 지방 가울 지방에 있었는데 로마로 진격해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말과 함께 밝은 햇살이 마치 십자가의 형상과 같이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곧 바로 자신의 군대 군기를 십자가의 군기로 바꾸어 만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 군기가 바로 저 유명한 [라바룸]이라는 군기입니다.
그리고 그의 군인들의 방패에는 그리스도 즉 [크리스토스]라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두 번째 글자 즉 “크와 리”를 쓰게 한 다음 전쟁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군대는 312년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 군대를 멸하고 로마로 입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십자가의 형상은 독수리의 형상 대신에 로마 국가의 휘장으로 사용되었고, 로마의 화폐 속에, 군기는 물론이고, 군모와 방패에도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동로마 지역의 황제였던 그의 처남 리시니우스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었기에 그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리시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제국의 통일 황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계시를 통한 승리와 영광의 이야기였습니다.
포사이스 박사가 쓴 '십자가의 중요성(The cruciality of the Cros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적 권위와 생명력이 충족될 뿐 아니라, 복음의 올바른 방향 제시와 그 최종 목표가 달성 된다"
예수님 당시 범죄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은 유대인의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자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로마인들도 로마 시민권자나 그밖에 계층의 사람들을 십자가로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반란의 주모자나 폭동을 일으킨 노예, 또는 사회의 악과도적과 강도 같은 자들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했던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입니다. 순교자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듯이 유대인들은 주님도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처형으로 주결정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예수님이 사람들의 경배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형을 다룬 말씀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총독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갈대를 가져다가 오른 손에 쥐어 주고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여 합당한 예의를 갖춘다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고 채찍으로 수없이 내려 쳤습니다. 기진맥진할 즈음에 다시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골고다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사형수로 정죄 받은 죄인은 십자가의 가로지르는 나무 약150파운드-68Kg 정도 되는 나무를 지고 시내를 거쳐 사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총독의 관저에서 나와 골고다로 가는 꾸불꾸불하고 비탈진 언덕으로 올라가는 [비아돌로로사]라는 골목길에서 14번이나 쓰러지셨습니다. 주님이 지시고 가야하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당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인들을 동정하거나 물을 준다거나 하는 것은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자기네 나라에 반역하여 죽이는 죄인에 대해서는 가혹하기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마침 [알랙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에게 지운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횡목을 짊어지고, 뒤따르며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골고다라는 곳은 예루살렘 성밖에 조그만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두 개의 바위는 마치 사람의 두개골이 연상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곳 지형이 해골처럼 보이는 곳이었고, 이곳이 사형장으로 쓰여 지고 보니 자연스럽게 붙여진 지명이 골고다였습니다. 그 뜻은 "해골의 곳"이란 뜻입니다.
1968년 예루살렘의 기밧트 하미브타르 지역의 발굴에서 1세기경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의 유골함 속에는 요한난 벤하콜이라는 20대 남자의 유골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유골 중에는 매우 굵고 커다란 쇠못이 박혀있는 발뒤꿈치 뼈도 있었습니다. 발뒤꿈치 뼈에 대장장이가 불에 달궈서 망치로 두들겨 만든 굵고 기다란 쇠못이 박혀있었습니다.
이 못에 붙은 나무 조각들을 살펴본 결과 못이 나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못의 뒤끝이 안쪽으로 구부려져 있었고, 십자가 자체는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못은 죄수의 발등이 아니라, 발뒤꿈치 옆 복사뼈 밑에 박혀 있었으며, 아카시아 나무 조각이 죄수의 발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유골함 속에는 부러진 정강이뼈도 있었습니다.
이 뼈는 죄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후에 살아 있는 죄수를 절명시키기 위해서 큰 나무망치로 쳐서 부러뜨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발견된 손과 손목뼈에서는 손바닥이 아닌 손목 위 두 개의 팔뼈 사이에 큰 못을 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체중을 지탱시키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처럼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심은 인류구원을 위함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어떤 4층집에서 불이 나서 아래층에서부터 불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중 4층에는 아버지와 세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래층에서 불이 타 올라오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입구가 막혀 있고 불이 워낙 세차게 타올라서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층에서 타올라 오는 불길과 연기로 세 아들은 질식할 것 같았고 기침을 하며 견뎌 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옆에 있는 건물을 향한 창문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창문에서 옆집 창까지는 불과 1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향하여 건너뛰라고 재촉했으나 아이들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그 높이에 질려서 벌벌 떨고만 서 있는 것입니다.
불은 자꾸만 타올라서 이제는 4층까지 번졌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자기편의 창문에 발을 걸고 건너편 건물의 창문을 향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창틀을 붙잡고 몸으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들아, 어서 내 몸을 타고 건너라 어서!" 아버지의 외침을 들은 아들들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몸을 밟고 무사히 옆집으로 건너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시고 잔인한 방법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면서 피를 남김없이 다 흘리시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받은 고통은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의 수치는 바로 우리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