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및 기념 예배 설교

부활 신앙(눅 24:1-12)-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6. 16:31

부활 신앙(24:1-12)

 

 

목사 주태근

 

어느 TV 방송국에서 드라마 녹화가 있었습니다. 한 탤런트가 연기를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역은 사람이 병실에서 죽으면 들어가서 "이제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단역이었습니다.

 

드디어 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탤런트가 뛰어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시체 주위에서 울고 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운명하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감독이 말합니다. 시체라도 한번 쳐다보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녹화를 하러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시체 가까이 갔습니다. "운명하셨습니다." 그때 감독이 말합니다. 한번 죽었는지 살았는지 검사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눈이라도 한번 뒤집어 보아야 되지 않습니까!

 

다시 우는소리가 들리고 사인이 떨어져서 탤런트는 뛰어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막 말하려고 하는데, 그만 대사를 까먹어 버렸습니다. 그때 연출자가 자기 눈을 뒤집으며 빨리 눈을 한번 뒤집어 보라고 무언의 표시를 보냅니다. 그랬더니 탤런트는 급한 나머지 그만 자기 눈을 뒤집고 하는 말이 "운명하셨습니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배우도 자신이 맡은 역을 완전히 소화하지 않는 한, 비록 단역이라 할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역할이 쉽다는 생각은 연기자들에게 있어서 편견입니다. 배우에게 편견이 있는 한 배우다운 배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저녁에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이틀이 지난 주일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 몇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 갔습니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무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무덤을 막아두었던 돌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순간, 여인들은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예수님이 죽임 당한 것만 해도 억울하고 슬픈 일인데, 시신까지 도둑질 당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이 당한 처지가 인간적으로 너무나 안 되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동안 믿고 따르던 스승의 시신이 없어졌으니, 이런 소식을 들은 주님의 제자들도 방향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여인들과 제자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면에서만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식선에서만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사고 영역 밖의 것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거나 믿을 엄두를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편견입니다.

 

부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성인들과 같은 부류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다보니 조금은 도덕적이고 선구자적인 분으로만 인정하려 합니다.

 

요즈음 T. V. 코미디 인기프로 노 브레인 서바이버프로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여러 등장인물이 있지만 정준하의 연기가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미디 배우 정준하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대중들 앞에서 아마 이렇게 연기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는 편견을 버려, 그건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거야!”부활이 없다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우찌무라 선생은 일본에서 유수한 신학자 입니다. 그분의 제자 중에는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우찌무라 선생이 대학생 한명을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대학생은 선생님, 성경에 나온 이야기가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갔다. 또 처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런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강조하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이 우찌무라 선생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래, 나는 성경을 보니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맨 마지막을 보니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가 기적인데, 성경에서 기적을 빼고 나면 앞 뒤 껍데기 밖에 없겠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신앙은 기적입니다. 부활신앙 역시 기적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체도 기적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부활이 있음을 확실하게 말합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망의 부활입니다.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의 부활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사망의 특징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망입니다. 그곳에서는 죽지 않고 죽음의 고통만 당합니다. 그곳에서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러한 축복이 없습니다. 꺼지지 않은 불 못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음의 삶을 고통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부활입니다.

 

일부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건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랑을 베풀며 사셨듯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베풀며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신이 이 땅에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편견에서 나온 무지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역사적인 사건이 정말로 실제의 사건이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의미입니다.

 

요사이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란은 모두 무정란입니다. 이는 수컷이 없이 닭장에서 먹이만 주어 낳게 한 정자가 없는 계란입니다. 이 계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품고 있고, 잘 보관해도, 병아리로 부화가 안 됩니다.

 

그러나 부화할 수 있는 조건을 주어보면, 무정란은 생명이 없습니다. 속에 정자가 있으면 부화하고, 무정란이면 부화도 못하고 오래되면 썩고 맙니다. 계란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정자가 생명입니다.

 

수컷의 생명이 있는 유정란은 햇빛에 비추어보면 부화하기 전에도 생명이 시작되어 기관들이 형성되는 핏줄기가 뻗쳐나다가, 만기가 되면 부화하여 병아리로 태어납니다.

 

무정란은 아무리 품어도 그 어떤 변화도, 생명의 탄생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품으면 품을수록 곯고 부패할 뿐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을 갖지 않은 믿음은 무정란과 같습니다. 생명이 없는 신앙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글을 소개합니다. 꽃을 파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항상 환하게 웃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얼굴에는 주름살투성입니다.

 

그러나 할머니 얼굴의 주름은 할머니의 웃음을 더 아름답게 장식해 줍니다. 지나가던 한 젊은이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무척 행복해 보이시네요."

 

할머니는 말합니다. ", 행복하구 말구요할머니가 걸치고 있는 옷은 허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외모도 형편없었습니다. 몸은 허약해 보였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변명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은 온 세상이 가장 슬펐던 날입니다. 그런데 사흘 후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무슨 근심걱정이 있으면 사흘만 절망한답니다.

 

그렇게 사흘만 절망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모든 일이 제자리로 잘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볼 이야기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