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부활의 증인(요 20:19-29)-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6. 16:35

부활의 증인(20:19-29)

 

 

목사 주태근

 

차를 타고 다니노라면 길거리에 부착된 큼직한 현수막들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이 지점에서 어느 날, 어느 시, 교통사고 현장을 본 목격자를 찾는다라는 내용입니다.

 

누군가 그 현장을 본 목격자가 나타나 증언해 준다면 고마움은 물론 현상금으로 얼마를 후사하겠노라고 적혀있습니다. 목격자는 어떤 사건을 친히 본 사람을 말합니다. 목격자는 사고 현장을 직접 본 증인이기에 가장 중요한 단서입니다.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증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재판에서 이기려고 거짓 증인을 동원하기도 하고, 상대방 쪽에 유리한 증인이 등장하면 어떻게든지 그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증인의 사생활까지 들추어내서, 증인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들게 해서 그 사람의 증언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거짓 증거는 언젠가는 밝혀지게 됩니다. 거짓 증인들은 결국 자기의 거짓말이 자기의 발목을 묶어서, 스스로 자기가 거짓말한 것을 드러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증인이란, 성경에서는 법정용어입니다. 공정한 법정 판결을 위해서는 두세 명 이상의 증인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들 증인들은 정직해야 했고 거짓 증언을 하는 증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자적인 태도로 어떤 상황에서도 사실만을 말해야 증인다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양심을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주님의 사도들은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영향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들 침통한 표정이었고, 어디 한 구석 웃음을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두려움과 공포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게 되지나 않을지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인 곳의 문들을 꼭 닫아 두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앞서서 듣긴 들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와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 하긴 했지만, 제자들은 그런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은 끝이라고,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는데예수님께서 모여 있는 제자들 앞에 떡 하니 나타나셨습니다. '환상을 본 것일까?', 아니면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자들은 제 살을 꼬집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제자들에게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서야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아니 "미칠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들에게 드리웠던 슬픔은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부활신앙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을 분명히 믿게 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도마만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그 자리에 없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신 후, 도마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들어섭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합니다. 불과 얼마 전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안은 저녁임에도 환했고, 웃음꽃이 만발했고,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너무도 여유로운 얼굴들이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에게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자기만 빼놓은 채 도대체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마는 자기만 빠졌다는 소외감에 속이 상합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도마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은데 어쩌란 말인가?'. 내심 도무지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체면 때문에 혹은 분위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도마는 정직합니다. 그때 도마가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다". 지금 도마는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 만져본 것만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8일이 지났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한 집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금 찾아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제자 도마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도마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지금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과 믿지 못함을 꾸짖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도마에게 믿음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믿음 주시기 위해 주님은 여드레 만에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냥은 도무지 믿지를 못하는 도마를 위해서 주님은 주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주님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아버지께로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지금 도마를 위해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도마가 정말 주님의 몸에 손을 대어보았는지는 모릅니다. 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도마가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도마가 어떻게 감동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기만 소외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부활신앙을 가지고, 자기만 그 믿음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는데 예수님께서 자기 한 사람을 위해서 찾아오시고, 그것도 의심하며 불평하는 자신에게 믿음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시고, 더욱이 자신이 믿음을 갖도록 아무도 만지게 허락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몸을 만지도록 하시는데 도마가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의심하는 사람'에서 '믿는 사람' 도마로 변화되게 하셨습니다. 도마는 주님을 향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른 사람을 위한 부활, 혹은 저들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부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도마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정말 지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당하고, 추방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박해하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박해할수록 기독교신앙은 번집니다. 처음에는 로마시에서 시작된 박해가 나중에는 로마제국이 통치하는 모든 땅에서 박해를 해야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황제들이 곤혹스럽게 됩니다. 자기들의 사랑하는 가족들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기독교 박해를 그칩니다. 아니 아예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를 인정하고 맙니다.

 

역사가들은 기독교의 승리의 이유를 말합니다. "생명력"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부활신앙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만 아니라 로마를 바꾸어놓았고,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비록 도마처럼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만드십니다.

 

인디아나주 출신의 미국의 대법관으로 있었던, 윌리엄 본 트레이져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본 트레이져 라는 분은 비교적 늦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여러 건의 죄질의 질이 나쁜 강도질을 저질렀던 헤리 팔머라는 사람을 마지막 대법정에서 심의를 하고 다루는 책임을 판사로서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강도도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본 트레이져 판사는 이 헤리 팔머라는 사람의 회심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판사로서의 공인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정상적인 판결에 의하면 적어도 한10년쯤을 언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언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합니다.

 

10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이 사람을 교도하기는커녕 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고 판단한 후, 그는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심지어 그는 금식기도까지 하고 나서, 마지막 언도를 내릴 때 1 , 그리고 몇 년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그에게 선고했습니다.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법률 쪽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판결이다라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코너에 몰렸고, 어떤 법적인 제재를 받기 위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본 트레이져 판사는 주저하지 않고, 그는 사표를 냈습니다. 대법관의 자리를 미련 없이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그가 언도를 내렸던 헤리팔머가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오던 그날, 교도소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트레이저는 팔머라는 죄수를 끌어안았습니다. 죄수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본 트레이져 판사 앞에 엎드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그때 본 트레이져는 그를 향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요.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죄수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일어나서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사는 정말 변화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감격과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으로서 인생을 살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부흥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쓴 글에 인상 깊은 말 한마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빌리 그래함은 죽음을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그는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에게 새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가장 큰 복음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