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서 설교원고

주님의 공동체(시133:1-3)

주 바나바 2022. 8. 8. 19:49

주님의 공동체(133:1-3)

 

 

목사 주태근

 

재미 교포 사업가가 한국에 나와서 주일날 교회를 갈려고 하는데 지리도 잘 모르고 교회도 잘 몰라서 교통경찰한테 물었습니다. "교회를 가야겠는데 가까운데 어느 교회가 있습니까?" 했더니 한 교회를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700m쯤 떨어진 저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면 교회가 있습니다." 이 재미교포 실업가가 그 약도를 따라가는데 그 중간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르쳐준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교통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처에 교회가 많은데 왜 하필 그 교회 가라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통경찰이 "저는 교회를 안 다니니까 잘 모르는데 그 교회 교인들이 예배드리고 나올 때 보면, 얼굴에 웃음이 있고 사랑이 가득한 것을 늘 느낍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소개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본문 시편 133편은 형제들간의 화목한 연합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이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시편을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도 즐거울까 성도가 모두 모여 함께 교제하는 일,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타고 흐르며 옷깃으로 흘러 내리는 향긋한 기름같구나.

 

헤르몬산에서 시온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이슬같구나. 그 곳은 여호와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대한 상징적 의미입니다.

 

천국의 모형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연합하고 교제하는 곳에 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한다면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혼자 사는 곳은 수도원이나 움막집입니다. 천국은 함께 연합하며 사는 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때마다 큰 도성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 산등성이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그곳에 거하였는데 이것이 마치 아론의 후손 제사장의 임직식에서 흐르는 기름이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같이 널려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헐몬산에서부터 내려진 이슬 위에 비친 햇빛처럼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인 이 연합은 모든 남자는 세 절기, 곧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이 순례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행사입니다. 이때 남자들은 친구를 만나고 그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밤새워 의논하며 함께 아파하고 방법을 모색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의무를 어떻게 잘 수행할 것인가를 논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함께 모여 절기를 지키는 기쁨 때문에 1년 내내 이 절기를 기다립니다. 다윗은 이 모임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본문의 형제는 단순한 가족적인 혈통 관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을 중심하여 살아가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령한 면에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이기 때문에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한 형제로 만나야 합니다.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나 빈부의 차이나 학벌의 차이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한 형제로서 함께 살기 위해 들어가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친구는 좋아하면서 성도간의 교제가 별로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령한 형제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연합, 성도들의 연합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교회를 통한 하늘나라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이런 교회 공동체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을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공동체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유일한 기관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기관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복을 나타내십니다. 천국의 축복과 천국의 기쁨을 우리로 하여금 맛보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중요합니다. 나의 행복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카네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을 통계적으로 보면 15%가 실력이고 나머지 85%가 인간관계라는 평가입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실질적으로 강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그의 회사의 총책임자로 선택했던 [찰스 쉐아브]라는 사람 역시 강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하루에 품삯을 200만원씩을 지불하면서까지 고용을 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가 좋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잘 다스릴 줄 안다는 그 자체가 바로 큰 자원입니다.

 

미국 경영인 협회 200명의 경영자들의 통계 결과가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가치 있고, 뛰어난 기술과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능력 즉, 친화력이다."

 

개인적인 삶에서 올바른 관계가 성공의 중요한 요인 일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다윗 왕은 자식들의 불화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형제끼리 서로 죽이고 갈등하고 싸우는 것을 볼 때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에 모여서 화목한 모습을 보이니 "형제가 이렇게 화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탄성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어늘 내 자식들은 어찌하여 서로 싸우고 죽이고 갈등이 심한고" 하고 탄식한 것입니다.

 

서로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부가 연합하고 형제가 연합하고 자매가 연합하고 성도가 서로 연합하는 것, 이것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모습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기숙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합니다. 그때 각자의 인간성이 다 드러납니다. 공동체생활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알고 사랑으로 감쌀 줄 아는 사람이 나중에 목회에서 성공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만 잘 나고 자기하는 일은 옳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목회에서도 화목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여러 사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연합하여 사랑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분의 차별을 없애 버렸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양반과 백성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린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의 혁명입니다.

 

신분의 격차가 심하던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며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꿈꾸노라. 언젠가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 소년 소녀의 손을 잡고 형제와 자매로서 같이 지내는 날이 올 것을 나는 꿈꾸노라. 언젠가 피부 색깔이 아닌 인격에 따라 평가되는 그런 나라에서 사는 날이 올 것을 나는 꿈꾸노라"고 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던 백만이 넘는 군중은 워싱턴 광장에서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저들은 형제가 연합하는 날을 소망하면서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 계층간의 갈등이 없는 나라, 누구나 다 수용하고 연합하는 그런 공동체가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의 비전입니다.

이러한 일을 성도들이 앞장서서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격이 다르고, 받은 은사가 다 각기 다를지라도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화합하려면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와 맞지 않아도 서로 수용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공동체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랑하고 반복해서 읽고 있는 책 가운데 탈무드가 있습니다. 탈무드 가운데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각색이 되어서 옛날 초등학교 책에 실린 적도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남겨 놓은 모든 농산물들, 쌀과 과일 같은 것들을 다 나누었습니다. 2등분을 했습니다. 형님을 이미 결혼을 해서 자식이 있었습니다. 동생은 총각이었습니다. 둘이 똑같이 반씩 나누었는데 그 밤에 형님이 생각을 합니다. "우리 동생은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미천이 많이 있어야 되고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니 이미 장가간 나의 동생을 위하여 한 몫을 떼어 주리라." 곡식을 가득 실어서 동생 집에 갖다 주었습니다. 동생도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혼자 사는데 많이 필요 없어. 형님은 식구도 많으니"하고는 역시 곡식을 준비해 형님 집에 갖다 주었습니다. 아침을 되어 창고를 열어 보니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이상합니다. 그날 밤에 형제는 각각 생각을 하고 또 형님 집에 동생 집에 곡식을 옮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또 역시 창고는 가득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그 날밤 동시에 형과 동생은 집을 출발했습니다. 길 복판에서 두 형제는 만났습니다. 그들이 싣고 오고 있는 곡식을 보면서 모든 일의 자초 지정을 알았습니다. 두 형제는 길에서 끌어안고 서로를 축복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벌어진 그 장소,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바로 그 곳에 다윗이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예루살렘 성을 짓게 했다는 그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는 점점 공동체가 와해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개인 체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국가 공동체, 학교 공동체, 직장 공동체 등 모든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까지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지나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짚신 장사가 짚신을 만들어 파는데... 여느 짚신장사보다도 몇 배나 더 손님들이 몰려 들고... 그래서 매번 많은 짚신을 팔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법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지만,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조차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짚신장사는 병들어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고, 결국 숨을 헐떡이며 운명할 순간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아버지. 짚신 만드는 비법을 알려 주십시오."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짚신 장사는 마지막으로 어렵게 유언하듯이... "털털털"하면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고, 짚신의 털을 잘 다듬어서 내다 팔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많은 짚신을 팔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하나의 비약인지는 몰라도, 우리 선조들은 비법을 남에게 잘 공개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사라진 것들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정보를 공유하는 사회입니다. 서로 정보를 나누고 공유해서... 함께 잘 살아 보자는 것이 현대사회 존재 방법입니다. 함께 사는 세계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행복이란 나 혼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공동체 운명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고 남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고 또 기쁨과 슬픔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