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역사(행2:1-21)
성령님의 역사(행2:1-21)
목사 주태근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목사님께서 어느 날 깊은 명상과 함께 주님을 생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며 기도하는 중에 환상 중에서 천국 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 사도께서 그를 맞이하였는데 요한 웨슬레는 천국에 들어서지를 않고 문간에서 베드로 선생님께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리교를 위하여 전심전력을 했는데 자기가 전도하고 자기와 같이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질문합니다.
"나와 함께 영광스러운 감리교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천국에 얼마나 들어왔는지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그랬더니 베드로 사도께서는 어떤 명부를 한참 뒤적거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그렇다면 나의 신앙은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장로교인들은 도대체 몇 사람이나 들어왔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한참 살펴보고 역시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때에 그는 더 놀라, "그렇다면"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운동은 대단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한 가지 더 물읍시다. 그럼 천주교인은 얼마나 들어왔습니까?"
베드로 선생님은 한참 있다 대답하기를 역시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더욱 놀란 요한 웨슬레 선생은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 천국에 들어 올 수 있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까.
베드로 사도께서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리교인이냐 장로교인이냐 천주교인이냐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 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라고 말씀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님이 교회를 세우려고 이 땅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기쁜 날이며, 신비스러운 날이요,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은 그 어느 교회절기보다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축제를 벌여야 됩니다. 교회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의 현장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오늘 본문을 상고해보면 하나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일으키는 변화는 피상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변화입니다.성령님이 일으키는 변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프로그램이나 조직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변화는 하늘에서 임하는 변화입니다. 위로부터의 변화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면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종류를 알아야 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연인이 있습니다. 자연인은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14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에 대해서는 중생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고 영적으로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리 영의 일을 이야기해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 지옥? 하나님이 계심? 심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육신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정말 믿기는 하나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1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의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말했습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기와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육의 열매가 많이 나타납니다.
세번째로 신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15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다 분별할 수가 있어서 이단 사설에 현혹되거나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l서 2장 20절과 27절에도 보면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 마음속에 오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주께 맡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바로 성령님을 충만히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면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루소는 인생에 대해 “인간은 10대에는 먹는 것에 따라 움직이고, 20대는 사랑, 연인에 의해 움직이고, 30대는 쾌락에 의해 움직이고, 40대는 야심에 의해 움직이고, 50대는 탐욕, 60대는 명예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것 때문에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쾌락과 야심과 탐욕, 명예심, 이런 것들 때문에 살아가고 그것들을 좇아 움직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어떠한 사람의 모습으로 인생을 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이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움직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움직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한국의 민족 지도자, 독립운동가 조만식(曹晩植 ; 1882~1950) 선생님은 16세까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도박하고 싸움을 하는 길거리의 불량배였습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서당에 가서 한문도 공부했지만, 친구들만 만나면 불량소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해 길을 걷고 있는데 미국 선교사가 그를 보고 “이 사람아,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일본이 이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는 데, 젊은 사람이 술 마시고 방탕하면 되겠나?”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그의 귀에 맴돌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자신을 책망했던 선교사의 집을 찾아가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으로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도박을 끊을 수 없습니다. 건달 생활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능력과 권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제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지 않고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자신과 계속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읽고 그 당시에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숭실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한 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어 오산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가르쳐 지도자를 배출하고 3·1운동을 주도하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 받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집니다. 악한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죄인이 의인이 됩니다. 신령한 사람으로 성공적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도에서 한 도둑이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가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밤새 이웃마을까지 달아났습니다.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도둑은 피곤에 지친 나머지 마을 입구의 커다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때, 때마침 염소젖을 짜러 나온 처녀 하나가 이 도둑을 보고는 진리를 추구하는 요가 수행자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처녀는 인도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아침의 첫 염소젖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수행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찾아와 그에게 절을 하며 꽃과 돈을 도둑의 무릎위에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도둑은 요가수행자처럼 똑바른 자세를 하고 앉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침묵의 성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둑으로 가슴 졸이며 사는 것 보다는 성자 흉내를 내는 것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둑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 성자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도 않으며 -마음까지도 단순하고 평화롭게 갖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십 여년이 흘렀을 때 너무도 열정적으로 성자 흉내를 낸 나머지 도둑은 진정한 성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단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앙망하면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충만히 입합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언가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런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 16). 여기서 다른 보혜사는‘알로스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나와 똑같은 다른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보혜사이고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이기에 그가 온 것은 내가 온 것이고, 내가 온 것은 그가 온 것이며 똑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심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똑같은 하나님으로서 똑같은 사역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승하셔서 계속 행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주의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자리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를 통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의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의 몸 된 교회 안에 계시면서 사역을 계속하는 생명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질병,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왔을 때 주님은 교회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도울 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승리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내 옆에 오셔서 나를 부르시며 늘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이 살고 삶이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