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제도-교수 주태근
교회론 강의록(9) : 교수 주태근
4. 교회의 정치제도
교회의 정치란,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부 받은 임무와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회의 행정체제’를 말한다. 역사적인 교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제도를 발전시켰다. 교황제도, 감독제도, 회중제도, 대의제도 그리고 무교직제도 등이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제도를 고찰하고자 한다.
1) 교황제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위계제도에 의한 법국가로 본다. 신학적 의미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세상법에 따르는 의미에서의 국가다. 이 위계제도는 군대처럼 계급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독(bishop)과 사제(priest)와 봉사자(diakon)로 되어 있다. 감독은 사도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 예수가 사도에게 약속한 것은 그대로 감독에게도 해당된다. 감독은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거룩한 예배의 제사장으로서 좋은 질서를 지키기 위한 감독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인의 위치에 서서 목회자로서 양떼를 지배한다. 그뿐만 아니라 감독이 있는 그곳에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신과 인간의 중보자다. 이렇게도 중요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독의 서품식을 예전(sacrament)으로 정했다. 그들은 모든 교회에 대하여 지도권을 가지고 있다. “감독들은 맡겨진 여러 교회를 그리스도의 대리인 또는 사자(使者)로서 조언과 권고와 모범으로써, 그러나 동시에 권위와 거룩한 능력을 가지고 통치한다.” 이렇게 감독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감독을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감독의 위에 절대권을 가진 교황의 위치를 더 굳히기 위한 것이다.
제 1 바티칸 회의가 결정한 내용을 더 알아본다면, “성 베드로가 모든 교회 위에 수위를 차지하고 있어, 단절이 없는 후계자를 가진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정해졌다.” “로마 교황은 사도의 머리이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참 대리인, 전교회의 머리, 모든 신도의 아버지요 교사다. 그리고 모든 교회를 양육하고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한 완전한 권능이 성 베드로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에게 주어졌다.” 교황이 행사하는 이 직능은 명예에 있어서는 수위에 있으며, 단순한 지도 감독상의 수위가 아니라 법적 수위성, 즉 교황이 최고의 입법, 사법, 처벌(형법)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수위성(首位性)은 그리스도가 직접(immediate et directe) 사도 베드로에게 약속하시고 주신 것이다. 베드로에 주신 것은 그의 대대의 후계자에게도 주어진다. “이 로마 교황에서 주어진 참 감독권 통치권(iurisdictionis potestas)은 직접적 권능이다. 이 통치권에 대하여 사목자(司牧者)들이나 신도들은 어떠한 의식(ritus)이나 지위(dignitas)에 있어서나 또는 개인적이든 전체적이든 간에 …위계제도의 종속 의무와 참된 순종을 가지고 복종하도록 구속되어 있다.”
“교황이, 교황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직접 세워 주신데 있다. 그 이유에서 교황은 단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위계적 제도적 구성의 정점이 될 뿐만 아니라 감독직과 전신도의 양쪽을 통일하는 항구적 원리요 가시적 기초다.” 이렇게 교황이 절대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항이나 이탈은 곧 징벌과 버림받음을 의미한다. “이 가시적 머리를 고려하지 않고 통일의 가시적 줄을 끊는 자는 구속주의 신비체를 기형화하고 불분명하게 하고, 영원한 구원이 확실한 항구를 찾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거나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로마 감독은 그리스도의 대리, 전교회의 목자로서 일하기 때문에 교회 위에 완전하고 최고이며, 가장 보편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권력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끝내 제 1바티칸 회의는 ‘교황의 무오설’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그가 교황의 자리(ex cathedra)에서 말하고 결정한 것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모든 신도는 교황이 성좌(星座)에서 말하지 않을 때에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2) 감독제도
현재 감독제도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고 추진하는 교파는 영국성공회다. 영국성공회는 그들이 인정하는 감독이 집례하지 않는 주의 만찬은 무효라고 믿는다. 영국성공회는 감독직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과거의 교회가 현재의 교회에 전달해 준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존케 해서 계승된 것이다. 그들은 감독직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핵심적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로, 감독직에 의한 교직이 어떠한 교직보다 교회의 보편적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말해 준다. 각 개교회의 교역자는 이 보편적 교회를 대표하여 예배나 예전을 통하여 구체적인 교회생활에 참여한다. 감독이 어떠한 다른 목회자보다 이 일을 효능적으로 한다. 감독은 넓은 지역을 담당하고 있고 많은 교회를 감독하고 많은 양떼들을 돌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총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한 지역이나 국한된 교회만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교회를 위해서 감독직을 수행한다.
둘째로, 감독제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교회의 사도성을 보수(保守)할 수 있다. 감독은 사도직 계승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 딕스의 주장에 의하면 초대교회의 감독은 사도직의 계승자라기보다 사도단(the apostolic college)에 가입되어 사도들과의 교제권 안에 들어있었다. 현재의 감독은 사도로부터 받은 은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때가 오면 다음 계승자에게 그것을 넘겨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셋째로, 감독제가 좋은 목회적 위치에 있다. “관리”라는 말이 곧 “에피스코포스”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감독제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양들을 목회적 입장에서 잘 돌볼 수 있다. 감독이 위에 있어서 양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감독이 곧 개입하여 그들의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방에 있는 사제들도 그들 위에 감독이란 어른이 있어서 자기들의 하는 일을 좋은 목자적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 사제들은 더욱 큰 용기를 얻는다. 이러한 이유를 들면서 영국성공회는 감독제가 다른 어떠한 제도보다 교회의 기능을 발휘하는 데 적합한 제도라고 한다.
행정적으로 감독제도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포함하여 성직자로 안수 받은 사제 이상의 교직자들이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이것은 곧 평신도에게는 교회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발언권이나 관여권이 일절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모든 일은 성직자들의 독무대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목회권이 사도직의 계승이란 제도에 의해서 감독에게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도 중요한 직책이기 때문에 그들의 성직 안수식은 매우 엄숙하게 집행한다.
현재 감독제도를 택하고 있는 교회는, 영국성공회(Anglican Church)를 위시하여 미국 내의 에피스코팔교회와 감리교회가 있으며 유럽대륙의 모든 루터교회와 모라비아파 등이다. 이러한 교회에 속한 평신도들은 실질적으로 교회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동방정통교회도 성직자 독재주의이므로 역시 감독제도의 범주 안에 넣는 것이 타당하다. 감독제도하에서도 초대교회에서 감독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장로직은 없어지게 되었다.
3) 회중제도
교회는 종교개혁 때까지 성직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일방적으로 지배되었다. 루터가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한 후에도 교회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에 의해서 독점되었으며, 영국성공회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참가한 후에도 교회제도는 감독제도를 그대로 고수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급진적 개혁자들이 유럽 대륙에서와 영국 남부에서 교회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으나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교회가 영국성공회나 장로회 제도처럼 개교회의 자주권을 무시한 그러한 제도가 아니라 개교회의 회중이 국가와 전통적 교회와는 독립적으로 성서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왕의 교회영주권(永住權)과 감독의 통치권을 반기독교적인 것이라고 하여 강하게 반대했다. 또는 장로교회처럼 개교회 위에 노회나 대회나 총회를 두어 행정적으로 개교회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도 반기독교적이라고 하여 반대했다. 그러한 외적이고 상회의 모든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모든 교인이 자유로운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여 구성한 자치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왕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관리하고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신 모든 권리를 즐길 수 있는 참 교회다. 그들은 신앙고백, 예전, 규칙, 목사나 집사 등 교직을 선임할 때 일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상회에 의해서 개교회가 모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만나고 모임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기성교회, 특히 영국성공회의 감독제와 감독의 사도계승제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개교회 회중의 완전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에 회중파(Congregationalism)라고 불리었고, 영국성공회에서 탈퇴했기 때문에 분리주의파(Separatists)라고 조롱받기도 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들과 침례교도들과 함께 영국(스코틀랜드는 아님)에서 자리를 굳히지 못하고 일단 화란으로 이주했다. 청교도이면서도 회중파의 지도자였던 브라운(R. Browne, 1550-1633)은 여러 곳에 독립파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투옥되기도 했다. 이들은 기성교회의 제도를 부인한 이유로 영국교회와 장로교회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지도자들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지도자 중에는 로빈슨(1575-1625)과 브류스타(W. Brewster, 1560-1644)등 유능한 사람이 있어, 그들의 영도 하에 미국 뉴잉글랜드로 건너가 그곳을 회중교도-청교도들의 새 천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회중교회는 감독들이 교회의 모든 운영권을 독점한 데 반대하고 개교회의 자주권을 주장함으로써 감독제도와 정반대되는 교회정치체제를 발전시켰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믿고,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도들이 모여 구성한 교회는 정치적으로 자유교회라고 주장한다. 정치적으로 자유인 교회는 자주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권리와 능력을 보유하므로 상회를 만들어서 지도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회중제도를 교회정치제도로 채택하고 있는 교파는 회중교회(때로는 조합교회라고도 함-일본)를 위시하여 침례교회와 미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회와 형제단교회 등이다.
회중제도의 특징을 몇 가지 지적한다면, ① 일체의 상회권을 인정하지 않고 개교회의 자주권을 기본구조로 삼는다. ② 성직자에 의한 교회운영을 강조한다. ③ 사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고 개교회 회중의 결정에 따라 목사나 집사를 세운다. ④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장로직은 없다. 다만 집사직만 있다. ⑤ 감독제나 장로제를 거절한 결과 교회의 지도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⑥ 에큐메니칼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과 회중교회의 자주권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⑦ 현재의 추세는 다른 교단과 합병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다같은 회중제도를 가지고 있는 침례교회는 타교단과 합동하지 않는다.
4) 대의제도(장로제도)
대의제도는 한쪽으로는 감독제도에 반대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개교회주의인 회중제도를 반대한다. 감독제도는 평신도의 존재를 경시하는 단점이 있는가 하면 회중제도는 상회와 성도의 교제를 경시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단점을 시정하고 교회를 신도 전체에 의해서 구성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의 교제를 두텁게 하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모든 교인이 힘을 합하여 수행하려는 데 이 제도의 특징이 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사와 장로가 회원이 되어 제네바 시내의 모든 종교적 문제를 관장하는 종무원(consistory)을 만들어서 그 일을 담당케 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평신도들의 대표와 성직자의 대표가 함께 교회위원회(당회)를 만들어 교회의 일을 대의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이 제도를 ‘대의제도’ 또는 ‘장로제도’라고 한다.
대의제도(장로제도)의 특징 몇 가지를 적는다면 ① 교회의 직무에 네 가지 기본적 교직이 있다고 본다. 목사와 장로와 교사와 집사다. 칼빈은 성서시대의 교회제도를 참작하여 상기한 네 가지 교직을 확립했다. ② 장로직을 부활시켰다. 우리가 신약성서 시대의 교직제도를 고찰함으로써 알게 된 것은 원시교회에는 세 가지 근본 교직이 있었다. ‘사도와 감독과 장로’다. 이 중 사도는 그들이 죽음으로써 자연적으로 없어졌다. 감독은 목사와 같은 교직으로 이해되어 후세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장로는 제 2세기까지는 교회 안에서 상당한 활동을 했으나 성직제도를 발전시킨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장로는 부각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직제도에 장로라는 직위가 포함되지 않았다. 회중교회도 장로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한 교직을 삭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교회는 성직자의 독재도 회중교회의 개인주의도 인정하지 않고, 성직자와 교인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함께 교회의 일을 관장하는 가장 성서적인 제도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장로의 위치가 부각되었다. ③ 개교회 위에 개교회에서 파송된 목사와 장로들이 회원이 된 노회가 있어, 이 노회가 교회의 건설과 폐쇄, 목사의 임면(임명과 해임), 신앙고백서의 개편 등을 처리한다. 여기서 또 다시 대의제도의 특징이 나타난다. 감독제도는 성직자들만이 모이는 회의에서, 그리고 회중교회에서는 각 개체교회가 그러한 중요한 사안을 처리하나 장로교회의 대의제도는 노회가 그러한 것을 처리함으로써 매우 건전하게 사안이 처리된다. ④ 일정한 수의 교회(당회)가 모여 노회를 조직함으로 교회간이 교제와 협력이 잘 이루어진다.(노회는 6-30당회를 요한다. 하나의 목사가 탄생되려면 목사 6인 이상이 안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함으로써 성도의 교제와 협력이 증진된다. ⑤ 교회 간에 지배나 피지배라는 경향은 전혀 없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에 따라 자의적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협력한다. ⑥ 교회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세 교직을 두어 각자가 맡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과, 성례전을 관장하는 목사와, 신도의 훈련을 책임 맡은 장로와 자선사업과 봉사와 재정을 맡은 집사가 있어서 각자의 임무를 통해서 상호간의 협조를 증진하도록 되어 있다. ⑦ 장로회 제도는 입헌적(立憲的)이고 대의적(代議的)이고 민주적이다. 본래 이 제도는 칼빈에 의해서 제네바에서 시작된 후 녹스가 스코틀랜드에 이식시켜 가장 대규모적 장로제도를 실시했다. 현재 대의제도를 채택한 교회는 주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뿐이다.
5) 무교직제도
기성교회의 복잡하고도 신비스럽게 꾸며진 예전과 제도에 대하여 외형적인 것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운동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 때마다 기성교회는 조직적 힘으로 그 비판과 도전을 극복했다. 종교개혁에 의하여 많이 시정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미흡하다고 느낀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교회라는 조직체 자체를 부인하고 순전히 내적이고 영적인 신앙생활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한 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스위스의 멘노파(멘노나이트라고 함)와 영국의 퀘이커파와 독일의 경건주의의 일파가 있다.
퀘이커 교도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외적인 형식이나 의식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특히 예전이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든가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신비적 체험을 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영향이라고 한다. 기성교회는 “힘과 본질보다는 형식과 그들을 더 즐긴다.” “물에 의한 세례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물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세례를 주라는 것이었다. 세례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능력과 권능에 의한 세례이다. 그러한 것이 집례자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적으로 주어지고 체험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방문화와 유대문화의 영향인 물세례나 할례 같은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주의 만찬도 마찬가지다. 최후에 제자들과 가졌던 만찬이 무슨 종교적 의의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저희들끼리 모여 먹고 마실 때마다 그를 기억하라”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롬 14:17).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함께 중생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외형적인 행사가 필요 없다. 교회가 이러한 예전(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퀘이커 교도들은 교회의 외형적 조직체를 부인한다. 교회라는 것은 “거룩한 빛과 자기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보편적 교회를 형성 한다”고 믿는다. 이 안에는 살아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과 “이교도사람, 유대사람들도 포함된다.” 교회라는 것은 일정한 장소에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도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하나가 되어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오류에 대항한다. 이 일 때문에 박해를 참는 무리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치 한 가족과 같다. “서로 모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은총과 은사의 각양 형편에 따라 서로 가르치며, 배우며 배려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타트 교회들이 외적 신앙고백과 외적 의식이 없이는 아무도 교회에 속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다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입장에서 퀘이커 교도들은 최소한의 봉사적 교직만을 인정하고 그가 하는 일의 성격을 정해 준다. 그들은 목사와 같은 교직을 거절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일정한 교육을 받아 기성교회가 정한 외적 형식에 따라 임직하면 영속적으로 그 신분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형제들을 위하여 교육하는”일만을 한다. 그는 “영의 조명을 받은 회원만으로 된 모임”에서 선택된다. 이들을 “등록된 봉사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교회에서 봉사할 문이 열려 있다.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나 주인이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교회에서 장로도 관리자도 봉사자도 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에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오늘 인류는 신적 사랑의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계의 필요성에 응하여 봉사적 사랑을 바쳐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써는 충분치 않다. 다만 봉사하는 사랑만으로써 우리의 입장이 설명된다. 이와 같이 퀘이커 교도들은 ‘내적 빛(inner light)’을 강조하고 영적 체험과 성령의 충만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신비주의라고 비판을 받으나 사회봉사를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러한 비판을 상쇄하고 있다. 즉 그들은 신비주의와 실천주의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천주의라는 것은 기성교회의 제도적 방법을 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에서 교회의 정치제도의 유형 다섯 가지를 고찰했다. 교황제도, 감독제도, 회중제도, 대의-장로제도, 그리고 무교직제도다. 이러한 다양한 제도가 형성된 데에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교회가 또 다시 다각적으로 심한 비판을 받고 있으므로 교회의 교직제도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교회 존립의 목적은 현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확산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견고히 서 있게 하는 데 있으므로 교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인간이 만든 어떤 구조나 제도 안에 안주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라는 조직체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언제든지 새롭게 되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