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전투(행13:13-19)-목사 주태근
목사 주태근
2차 대전 이후 독일, 프랑스, 덴마크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철학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실존주의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한계상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계상황이란 인간이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말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그런 한계상황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생로병사입니다. 둘째는 고독입니다. 셋째는 방황입니다. 넷째는 죄를 짓는다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가 전쟁입니다. 다섯째 전쟁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끼리 민족이 민족끼리 서로 대적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전쟁의 의미는 인생전투입니다.
인생이 살아있는 한 전쟁 혹은 전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이 바로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과 맞서는 적들을 설명할 때 그들의 숫자와 군마, 병거의 수를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전쟁은 세상의 전쟁과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병력과 무기에 의지해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이기다’, ‘승리하다’라는 단어와 함께 한 결같이 등장하는 문구는 ‘여호와께서’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이기니라.”(삿 3:10)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
이스라엘의 승리는 사람의 방법과 자원이 아닌 여호와의 방법과 자원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진퇴양난의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기도하는 한 사람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하나님이 도움과 방패가 되어 주셨을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명령에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는가?’의 여부가 결정합니다. 유명한 여리고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비록 비상식적이며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과 불만 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영적 전쟁과 승패 여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승리하게 하십니다. 무적의 하나님이 가장 강력한 도움과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바로 기도전투입니다. 인생을 기도로 전투해야 승리합니다.
사도행전 12장은 때때로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일군들이 망각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권능을 덧입고 빠른 속도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한 박해였으나 이제는 정치 지도자인 헤롯왕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헤롯왕은 4번째 헤롯왕인 아그립바 1세로서 대헤롯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아들로서 헤로디아의 동복 오라비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숙부 빌립의 영토였던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분봉왕으로 있다가, AD 39년에 안티파스를 몰아내고 그 땅을 장악했고, AD 41년에는 사마리아까지 차지하여 대헤롯이 지배했던 전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본문12:1,2은 말합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사탄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고 무너뜨리고자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사탄은 헤롯왕을 이용하여 성도들 몇 사람에게 해를 가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야고보의 순교를 통해서 교회는 더욱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의 순교를 통해서 기독교 교회가 뿌리를 내렸고, 그 후 야고보 사도를 비롯해서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를 인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름도 없는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의 피로 인하여 기독교가 발전해 갔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피로 시작된 순교의 종교입니다. 이와같이 기독교 교회는 희생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해 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우리들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본문12: 6-11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적적인 구출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왕이 사도 베드로를 백성 앞에서 끌어내어 죽이기로 한 그 전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쇠사슬에 묶여 두 군인 틈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문 앞에서는 파수군들이 옥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천사가 나타나고 감방에 환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깨우며 말하기를 “빨리 일어서라”고 재촉합니다.
그러자 육중한 쇠사슬이 베드로의 두 손목에서 힘없이 풀렸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또 천사가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겉옷을 두루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여 베드로가 감방에서 나와서 천사를 따라 갔습니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는 일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마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서 시내로 통하는 육중한 철문에 이르니 철문이 저절로 자동문처럼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서 거리를 하나 지날 때 천사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구출한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바로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시기였습니다. 본문 12:5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사도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 기독교의 수령인 베드로 사도마저 투옥되어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야말로 기독교 교회의 큰 위기였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절망하고 낙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위기를 맞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영적전쟁 바로 기도전투입니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옥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구출된 시기는 가장 큰 위기를 맞이했을 때입니다. 유월절 명절이 끝나는 밤에, 즉 사도 베드로가 사형당하기 전날 밤에 하나님은 그 천사를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이와같이 핍박자들이 교회를 삼키려 할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케 하시고자 함입니다. 기도전투입니다. 기도는 성도들의 삶의 무기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합니다. 기도 없이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훈련을 시킵니다. 군에 처음 입대한 훈련병들은 기초훈련을 잘 받아야 신병으로 합격하여 정식 군인이 됩니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군인이 되지 못합니다. 입영 발령 받았다고 군인이 아닙니다. 훈련병 과정에서의 기초훈련을 마스터해하고 합격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영적기초훈련과정은 무엇입니까? 기도훈련과정입니다. 기도훈련과정을 통과해야 인생을 이기는 십자군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원리가 있습니다. 원리를 잘 알아야 기도전투를 잘합니다. 원리와 요령은 다릅니다. 요령이 겉으로 나타난 방법이라면 원리는 속 깊이 감춰진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령을 배우면 당장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 원리를 터득하면 당장은 특별한 성과를 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령을 배우기보다는 원리를 터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하던 수재들이 외국에 유학을 가면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한국학생들 가운데 무려 45%가 졸업하지 못한 채 도중하차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첫 번째는 공부 방법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요령은 뛰어난데 공부하는 원리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원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단기간에 성공하려고 요령을 배우는 일에 몰두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도훈련에서의 중요한 원리가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에담이라는 곳에서 본격적으로 광야에 진입했을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마라의 쓴 물이 변하는 기적과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므리바의 기적으로 광야에서도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신광야를 지날 때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지자 하늘의 만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아주 특별한 은혜의 기적으로 여정이 잘 진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들어섰을 때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아말렉이 침공해 들어온 것입니다. 아말렉은 호전적인 족속이고, 대대로 광야에서 살아오며 무수한 전쟁을 치러왔던 족속입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노예로 살던 민족입니다. 전쟁 경험이 없는 민족이고,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칫 전멸을 당할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위기에 맞서서 모세가 한 일이 아주 특별합니다. 우선 여호수아에게 전쟁에 나갈 군대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과 맞서서 싸우게 했습니다. 다음으로 자신은 아론과 훌과 함께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두 가지 전쟁을 치르고자 한 것입니다. 산 아래에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이고, 산 위에서는 하나님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 군대와 싸워 이깁니다. 그러나 모세가 산 위에서 힘들어 손을 내리고 기도를 중단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 군대에게 밀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론과 훌은 양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해가 지도록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 군대를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을 무찌른 후에 모세가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붙였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깃발을 들고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승리를 주셨다는 말이고, 이 승리는 기도의 승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기도전투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두 가지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나는 산 위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산 아래의 전쟁입니다. 산 위의 전투는 하나님과의 영적 전쟁 즉 기도전투를 말합니다. 그리고 산 아래의 전투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쟁하면 산 아래의 전투 밖에 없는 줄 압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마 당시 모세를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 위의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산 위의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모세 역시 기도전투 훈련을 받았습니다. 출 14:13-14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 한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지금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추격해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도 나갈 수 없고 뒤로 돌아서 애굽의 군사와 맞서 싸울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이대로 죽게 놔두지 않으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서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기도전투의 승리를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선포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말렉이 쳐들어오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대로 자기들이 아말렉에게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으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 이 사실을 아뢰고 하나님의 도움을 계속 기도할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전투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산 아래에서 생각지 못했던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도 심각하여 내가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위기를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이대로 당하고 이대로 망하고 이대로 죽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전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전투입니다. 모세는 산 위의 전쟁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의 전쟁에는 자기의 제자인 여호수아를 내세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산 위의 전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산 위의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영적 지도자들은 전쟁의 승패는 산 아래의 전쟁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산 위의 전쟁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산 위의 전쟁이 더 중요합니다. 산 위의 전쟁에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산 아래 전쟁에 개입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전투입니다. 우리는 산 위의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 역시 성도들의 기도전투를 증거합니다.
베드로를 묶은 쇠사슬을 어떻게 풀어 줄 수 있습니까? 몇 겹으로 갇혀있는 감옥에서 베드로를 어떻게 구해낼 수 있습니까? 인간의 방법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전쟁입니다. 기도전투입니다. 온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위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전쟁입니다. 전투에 임한 군인 같은 삶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승리는 영적무장입니다. 성도들의 영적무장은 기도전투입니다. 성도는 기도훈련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기도전투 할 수 있는 사병으로 태어나야합니다. 그래야 삶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기도전투는 하나님과의 전쟁을 잘하는 성도가 싸우는 무기이며 전술입니다. 사람과의 전쟁을 잘하는 자는 인생을 이기는 것 같지만 그것은 패하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전쟁을 잘하는 자는 지는 것 같지만 이기는 승리의 전쟁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영적무장은 기도입니다.
주님은 기도로 승리하기 원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하며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장 13절~18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