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성탄절(마1:18-25)-목사 주태근
요셉의 성탄절/마1:18-25
목사 주태근
'연탄길'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국립묘지 앞 좌판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파는 꽃은 묘지에 꽂혀 있던 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할머니는 이른 아침에 전날 묘지를 방문해서 꽃을 꽂아둔 그 묘지에 가서 꽂혀 있는 꽃을 몰래 가져다가 파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국립묘지 앞에서 꽃가게를 하고 있는 민혜네가 알고 있었습니다. 민혜는 그것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물론 그 할머니 때문에 꽃가게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할머니의 양심적이지 못한 행동이 더 미웠습니다. 그리하여 민혜는 투덜거립니다.
"도대체 팔게 따로 있지 어떻게 묘지 앞에 놓인 꽃을 몰래 가져다가 파는 거야?" 이런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딸에게 말합니다. "오죽 살기가 힘들었으면 죽은 사람들 앞에 놓인 꽃을 가져다 팔겠느냐?"며 그냥 모른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날씨가 추운 겨울날이면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묘지에 꽂히는 꽃도 자연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추워진 까닭에 꽃을 파는 할머니는 묘지에 꽂힌 꽃이 없어 그냥 왔다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멀리 보이는 묘지 중앙 쪽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고 그가 양쪽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꽃을 가져가는 할머니인 것 같아서 민혜는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그런데 그분은 바로 할머니가 아닌 자기 아빠였습니다.
민혜의 아빠가 묘지 앞에서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혜가 다가가서 왜 묘지 앞에 꽃다발을 들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빠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겨울이라 하도 꽃을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어! 묘지 앞에 꽂힌 꽃이 없어서인지 할머니가 며칠째 보이시지 않는구나,
그래서 아빠가 묘지에 꽃을 갖다 놓은거야" 민혜 아빠는 며칠째 보이지 않는 할머니를 위해 자기 꽃가게의 꽃을 가져다가 묘지에 꽂아 두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애의 드라마입니다.
하루는 여 선교사가 힌두교를 믿는 어느 부유한 여신도 가정에 모여 있는 힌두교 여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말씀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자가 갑자기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선교사는 놀라고 당황하면서 '왜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힌두교 신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저는 자녀를 가진 엄마예요. 저는 우리 애들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하는 친구라 해도,
그 친구를 위해 내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원수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하셨다니, 그걸 어떻게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위대한 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을 인류를 위해 주신 사랑을 단순히 사랑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언어라는 의미입니다. 오래 전에 중동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흉년이 몇 년 계속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난한 가정에 아들이 넷 있었습니다.
부부와 아들 넷이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두 부부는 중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는 물론 아들 넷이 다 죽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소. 아들 넷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 중에 하나를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서 나머지 셋이라도 살립시다.'
이런 얘기가 부부 사이에 오고 갔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팔지 아들 넷 중에 고르는데 먼저 큰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하는 말이 '큰아들은 집안에 기둥이니까 못 팔아'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은 제처 놓고 둘째 아들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부인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당신을 쏙 빼 닮았어요. 이 아이는 안돼요' 부인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도 제처 놓고 셋째 아들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남편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얼마나 정이 많은데요. 지난 번 내가 아플 때 잠도 안 자고 나를 지켜 줬소.
이 아이는 안돼요' 그래서 셋째도 재껴 놓았습니다. 이제 막내아들이 남았습니다. 부인이 말렸습니다. '막내도 안돼요. 이 애는 미운 데가 하나도 없는 애예요'. 이렇게 하다 보니까 팔아 버릴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네 아이 중 하나도 내 놓을 자식이 없어 같이 굶어 죽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넷이 있어도 자식은 다 귀한 자시이란 말입니다. 아니 열이 있어도 내 놓을 자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죄 값으로 영원히 죽어야 마땅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게 하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죄 값을 지불하시도록 십자가에 제물이 되게 하려고 보내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이런 사랑이 나타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계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셉이란 사람은 정숙한 시골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정혼이란 오늘날처럼 쉽게 파기할 수 있는 약혼이 아니라 이때 당시의 유대의 풍습으로 매우 중대하고 강한 결속력을 갖는 법적인 부부와도 같은 관계입니다. 요셉은 아브라함의 41대 손, 이스라엘 다윗의 가문입니다. 왕족의 핏줄을 받은 사람입니다. 젊은 나이, 앞길이 창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혼한 마리아가 자기와 결혼하여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고 자신의 인생 앞길이 실패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어쩌면 분통이 터지는 갈등과 번민과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인생길에서 저와 여러분들도 때론 황당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과 같은 그런 때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칠흑과 같이 캄캄한 한밤중일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고, 방향도 알 수 없는,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대로 서 있어야 할지, 뒤로 물러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밤하늘이 으레 까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밤하늘은 파랗습니다. 사진을 찍어 보면 밤하늘이 파랗게 찍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각대를 받쳐놓고 카메라의 조리개를 최대로 작게 한 다음 셔터속도를 20초 정도 누르고 있으면 그런 사진이 나오게 됩니다.
살다보면 까만 밤하늘처럼 정말 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으리만큼 암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의 셔터를 20초만 누를 수 있다면 까맣게만 보이던 마음의 하늘이 파랗게 찍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조금만 여유를 가져야합니다.
본문19절을 보면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의로운 사람이란 죄가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와 폭력으로 자기가 받은 상처를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불륜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로부터 사랑의 배신을 당했습니다. 이 경우 돌로 쳐 죽여도 좋다는 율법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의로운 사람은 극한 상황에 가서 그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진짜 의로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정죄할 줄 몰랐습니다. '나쁜 여자, 죄를 범한 여자'그렇게 정죄하지 아니했습니다. 요셉은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이러합니다. 본문 24절에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19절을 보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찾으려고 뒷조사하며 찾으면 그것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도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려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치료해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깊이 숙고했다는 뜻이요,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마리아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팔 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실수를 허물을 덮어주고 아내의 인격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바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셉처럼 살려는 사람은 드뭅니다. 천사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났습니까? 이런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격려하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하나님의 섭리요 인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성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모든 불행과 절망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요셉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천사가 전하여준 이름입니다. 이름마다 뜻이 있습니다. 예수란 무슨 뜻입니까?
'도와준다.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메시아의 기다림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천사의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게 되었고 그 뜻에 복종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기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태어날 예수가 메시아가 되시며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하시는 증거요 표적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성탄을 통한 인류에게 미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하고, 냄새나고, 추한 죄인들과 함께 하시려고 임마누엘 하신 성육신 사건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여건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약속의 사건입니다. 지금도 역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24-25절을 보시기바랍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로부터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을 듣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드렸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고민과 갈등, 번민을 벗어버리고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2장 13절 이하에서도 요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의미 있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요셉의 인격이요 그의 믿음입니다. 요셉은 내 뜻 때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문제, 불행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임마누엘 되신 그분이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요셉은 난처한 상황과 문제를 법률과 관습으로 풀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녀에 대한 그의 결심을 섭리와 은총이 이끌어 가도록 내어 맡겼습니다. 그는 관습의 힘에 의해 이끌려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간 것입니다. 성탄은 바로 이렇게 시작한 절기입니다. 이 땅에 구세주가 오실 수 있는 길을 위해 요셉은 거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성탄절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나타낸 절기입니다. 요셉처럼 성탄절을 의미 있게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성탄절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고 그 은총을 체험하는 절기입니다.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이웃에게 임하여 성탄의 기쁨과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