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록

설교와 커뮤니케이션-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18. 09:50

설교학 강의록(10) : 교수 주태근

 

. 설교와 커뮤니케이션

 

 

현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발신자가 메시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해서 반응을 일으키고 상호 작용을 가져오는 일차원적인 데만 머물러 있지 않다. 전자매체, 복합매체, 대중매체의 발달로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매체의 혁명일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설교자도 오늘날 사회의 매체언어(media language)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교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데, 문제는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넓게는 설교를 커뮤니케이션의 한 부분으로 취급할 수 있다. 일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론뿐만 아니라 설교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론도 학자들마다 주장이 일치하지 않고 견해가 다양하다. 그러나 보통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포함시켜 설명하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근원(source), 메시지(message), 청중(respondent) 그리고 채널(통로)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은 설교자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경적 진리를 언어적, 신체적, 음성적 자극을 통해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대상자-청중, 받는 자-를 향해 방출(decode)하게 되는데, 방출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1. 기독교 Communication의 배경

 

 

복음의 메시지가 Communication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룰 때 기독교 신학사에 두 거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는 427년에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De Doctrina Christiana)라는 책을 펴낸 Augustine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성직자는 성서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과 그 진리를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 Communication의 이론을 상세히 기록한바 있다. 또 하나의 신학자는 1959문화의 신학(Theology of Culture)을 펴낸 조직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이다. 그는 20세기의 실존적인 질문 등을 신학적으로 대답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고 있던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그는 차원 높은 신학을 담은 설교를 수없이 했었다. 그러한 그의 설교가 때로는 회중들에게 싫증과 졸음을 주었고, 전달되어지지 않은 채 독백으로 끝날 때도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아픈 경험은 그로 하여금 73세가 되던 해(1959)에 그가 발표했던 논문들을 문화의 신학이라는 책으로 엮어내면서 그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Communication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Communication의 이론이 학문의 분야로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Communication의 학자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을 들 수 있다. 그는 인간역사의 발전을 지배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자아인식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도 커뮤니케이션을 배우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자체의 절대적인 과제가 바로 복음선포의 현장에서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을 시급히 도입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 시민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이다.

 

 

2. Communication이 되지 않은 설교현장

 

 

'설교의 전성기는 이제 지나갔는가?' 이 질문은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설교자 대학(Preachers College)의 학장으로 있었던 데오도래 베델(Theodore O. Wedel)이 수년전에 설교의 위기를 논하면서 발표한 글의 제목이다. 이 질문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같은 신학자는 '오늘의 설교는 이제 임종단계에 와 있을 정도로 쇠하고 붕괴되었다.'고 베델의 질문을 한층 더 지원해 주고 있다. 하비 콕스(Harvey Cox)도 그의 세속도시(The Secular City)에서 '오늘날의 설교는 힘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현실과 맞부딪치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부르는 어조가 듣고서 달려가고 싶은 간절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 설교의 쇠퇴를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설교자(Sender)와 설교를 듣는 회중(Receiver)간의 원만한 만남이 이룩되지 않고 설교의 사역(Preaching Ministry)은 계속되고 있다. 설교는 설교대로 참된 의미를 던져주지 못하고, 회중들은 그들대로 들을 귀를 준비하지 못한 채 만남의 단절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곧 '설교의 위기' 또는 '설교의 몰락'을 가져오는 근본 원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Communication의 기본이해와 전달과정

 

 

기독교에서 설교자가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듣는 사람이 나와 함께 그 메시지 속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대이다. 더 나아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관적으로 수립하여 전달자와 피 전달자가 공통분모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가 추구하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메시지를 외치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메시지에 대한 듣는 자의 이해와 태도가 설교자의 것과 동일하게 나타나야 만이 커뮤니케이션이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지금껏 우리의 설교자들이 듣던지 안 듣던지 외치기만 하면 된다는 구시대적인 메시지 전달의 태도를 탈피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형태의 이론과 주장을 집합하여 정리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Communicator(송신자-Sender), Message, Media, Receiver, Feedback, 그리고 Context 등으로 일치된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를 형체화 시킨 것이 곧 과정(Process)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을 단순화 시켜서 설명해 본다면, 'AB라는 내용을 C라는 채널을 통하여 D라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거기에서 E라는 효과를 얻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중요성을 한층 더 강화시킨 멕루한(McLuhan)'미디엄(Medium)이 곧 메시지이다.'라는 말과 함께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content)보다는 Communicate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매개체(The Media)에 의하여 그 양상이 형성되어 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들의 기본적인 뜻은 전달되는 과정이 효과적이지 못할 때 그 메시지는 언제나 사장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가 여기에서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가 현시대에 메시지 형성보다 더 앞서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설교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부문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설교자와 회중들 사이에 적용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과정이 제시되고 있다. 리드(Clide Reid)가 제시한 과정을 소개 한다.

1) 전달(Transmission)--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 단계로서 정보원(Source)이 된 송신자가 그의 메시지를 내놓는(delivery) 단계이다. 이때의 Communicator는 목적의 수립, 메시지의 정립, 미디어의 선택, 수용자의 선정을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사용할 언어. 시간. 장소를 선택하는 임무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2) 접촉(Contact)-- 수신자가 전달된 메시지와 만나는 최초의 교류점을 뜻한다. 이 지점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회중들이 집중하여 메시지를 깊은 관심 속에서 경청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이때만이 보다 성공적이고 인상적인 접촉을 가져올 수 있다.

3) 반응(Feedback)-- 일반 엔지니어링에서는 이 단계를 최종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설교학적 측면에서는 메시지의 공유화라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메시지를 듣고 우선 그 내용을 어떤 형태로든지 표현해주는 것을 말한다. 즉 여기서는 수용자(Listener)가 자신이 들은 메시지에 대하여 질문이나 평(Comment)을 하는 관심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4) 이해(Comprehension)-- 앞서의 자기표현을 거쳐 거기에 대한 대답들이 분명해 졌을 때 수용자는 전달자의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을 해독화(Decoding)라고 하며 여기서 수신자가 전달된 메시지를 자신의 의미체계 속에 집어넣고 공유의 가능성을 찾는다. 만약 수용자 자신이 이 과정에서 메시지와 무관성을 고집할 때 커뮤니케이터는 즉각적인 새로운 내용과 방법의 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용자가 자기반응을 통하여 이해가 되어졌고 그것이 자신과 관계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다음의 단계를 찾는다.

5) 수용(Acceptance)--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했더라도 수용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해버리는 세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듣는 사람이 메시지를 무시 또는 거부를 해버려도 전달자는 그것을 쉽게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거부의 경우는 그 근거추종에 전달자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최종적인 노력을 쏟아야 한다.

6) 내면화(Internalization)-- 받아들여진 메시지를 확고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 메시지가 어떻게 자신에게 전달되었든지 이제는 자기 소유화시켜 전달자와 똑같은 입장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 단계는 자기만의 보존이라는 수동적인 차원을 넘어 능동적인 자세로서 그 메시지를 위한 커뮤니케이터로 출발을 가져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 단계이다.

7) 실천(Action)--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인 목표는 메시지대로 행동이 나타나는데 있다. 이 행동은 전달받은 메시지가 더 이상 전달자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임을 입증하는 상태이며 전달자의 도움이나 간섭이 필요치 않은 완전히 독자적인 존재로서 메시지의 소유자가 된 것을 입증하는 최종적인 단계이다.

이상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단계적 과정은 복음 전달에 있어서 깊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현대와 같이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누구나 이 분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시대를 우리 설교자들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특별히 현대의 젊은이들은 T.V 시대에서 성장한 최초의 역사적 세대임을 인식할 때 이들을 향한 메시지 전달의 책임이 더욱 무거움을 실감치 않을 수 없다.

 

 

4. Communication으로서 설교

 

 

영국 성공회의 신학자였던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1877년 예일대학에서 설교학 특강을 할 때 그는 설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바 있다. '설교란 한사람(설교자)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진리를 운반하는 방편(means)이다.' 이 정의 속에서 부룩스는 설교자와 회중이라는 두 인격적인 요소를 다루면서 양자 간에 이룩되어야 할 진리의 상호전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양방관계의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은 1950년째에 와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이론이다. 그 전까지는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왜 라는 독백적인 패턴(Monological Pattern)속에 커뮤니케이션이 머물러 있었다. 즉 전달자가 메시지를 청중에서 독자적인 수단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오게 되었다. 양방통행이 설립될 때만 진정한 의사 상호전달이 이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방관계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할 때 듣는 사람(Receiver)의 책임은 말하는 사람의 책임과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설교현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로서 즉 듣는 파트너가 수동적인 것보다 능동적으로 메시지의 획득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함을 증명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Communication의 시도는 참여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위주(Verbalism)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나 언어만으로는 신뢰성이 결여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전달자의 모순점 때문에, 설교는 지금껏 고립된 사건으로 취급받을 때가 적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언어보다는 커뮤니케이터의 행동과 참여가 있는 기독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생동력 있는 말씀의 흐름과 만남은 우리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원동력이며 성공적인 Communication의 교류이다. 이 소중한 원동력이 커뮤니케이션의 상실 속에서는 메시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 교회가 긍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