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마 5:1-12)-목사 주태근
긍휼히 여기는 자는(마 5:1-12)
목사 주태근
《미국 뉴욕에 가면 나과다 공항이 있습니다. 나과다 공항은 오래 전 나과다 뉴욕 시장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공항인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판사로 있을 때에 한 노인이 재판을 받으러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죄를 저질러서 여기에 왔습니까?” 하고 나과다 판사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저는 빵을 훔치다가 잡혀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왜, 빵을 훔쳤습니까?” 하고 묻자 “배가 너무 고파서 훔쳤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과다 판사는 “당신이 빵을 훔쳤으니 그 죄로 벌금 10달러를 내셔야합니다” 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가 “재판장님, 저에게 10달라가 있었다면 왜 빵을 훔쳐 먹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호소를 합니다. 이때 판사가 말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법은 지켜져야만 합니다. 당신은 죄를 지었으니 벌금을 내야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돈이 없으니까 내가 대신 내겠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주머니에서 10 달러를 꺼내서 벌금을 대신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향해서 “여러분! 여기 이 사람이 돈이 없어서 도둑질을 했습니다. 또 다시 빵을 훔치다 죄인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말하면서 모자를 돌려 가지고 즉석에서 모금을 하였습니다.
나과다 판사는 모금된 돈을 그 노인에게 주면서 "형제여,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이곳으로 오지 마시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에 존경을 받고 후에 뉴욕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사랑을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공항을 새우면서 나과다 공항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긍휼의 마음은 사람들을 움직입니다.
인종차별이 아주 심할 때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아메리칸 인디안 한 사람이 마침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의 곁으로 찾아와 물을 구합니다.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잔만 좀 주시지요" 하니까 "인디안 놈한테 못 줘!" 그래서 인디언은 맥없이 떠나갔습니다.
바로 몇일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렸고 길도 잃어버려 조난당한 채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쓰러졌습니다. 깊은 산중에 쓰러져 있는 그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발견하고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해주고 죽을 써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인디언 추장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깜짝 놀라니까 그 때 그 인디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을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이란 당연히 보복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역동적인 사랑의 마음입니다. 긍휼이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우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행복론을 말씀하십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오늘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긍휼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인데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헬라어로는 엘레에몬으로 약 500번 이상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의 90% 이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긍휼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베소서 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러므로 긍휼이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바클레이는 [긍휼의 마음]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처지와 형편을 보고 함께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긍휼은 단순히 죄인의 죄를 눈감아 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죄로 비참해진 사람의 비참한 결과를 바라보는 불쌍히 여김과, 그 결과를 해결해 주고자 하는 마음과 그 행위가 함께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심부름을 간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 거절당했다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집에서 이 집에 도끼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도끼를 빌려주라고 말합니다.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들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며칠 전에 자기들은 낫을 빌려주지 않았으면서 무슨 얼굴로 도끼 빌리려 왔는지 모르겠네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복수이다. 복수를 해선 안 된다. 또한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 준다"라고 말하면서 빌려주면 이건 증오이다. 미워해선 안 된다.
상대방이 나를 섭섭하게 했더라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도끼가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곧 긍휼이다."》긍휼은 조건없이 베푸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번에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은 지난 100년 동안 발생한 최악의 지진 가운데 10위권에 드는 규모입니다. 미국 지질연구소 측정결과 리히터 규모 8.9였습니다. 진앙에서 각각 2000㎞,1000㎞ 떨어진 방콕과 싱가포르에서도 고층건물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특히 해저에서 지진이 발생한 후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벵골만과 안다만해에 접한 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해변 마을피해가 상당히 컸던 것입니다. 미국 지질조사국은 이번 지진은 환태평양 지진대상의 1000km에 걸친 안다만 단층선에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안다만 단층선의 균열이 발생한 원인을 판구조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충돌하면서 안다만 단층선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지구표층이라고 하는 수십km 혹은 그 이상의 두께를 가진 암석권은 유라시아판과 인도판, 태평양판, 북미판 등 10여개의 판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들 판은 서로 부딪치거나 밀고 때로는 서로 포개지면서 각각 매년 수cm 정도의 속도로 점성이 있는 맨틀 위를 제각기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적인 힘이 판의 마찰저항을 초과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갑작스런 미끄러짐 현상이 일어나는 데 이것이 바로 지진입니다.
이러한 지진으로 해일이 일어나 엄청남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이번의 해일을 쓰나미(tsunami)라 부릅니다. 바다에 큰 파도가 일어나 바닷물이 육지로 넘쳐 들어오는 것을 해일이라 말하고, 그 해일이 폭풍으로 일어나는 것을 폭풍해일, 바다에서 지진이나 화산 폭발 등으로 일어나는 것을 쓰나미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여러 과학자들이 내놓고 있는 원인 분석에 따르면 환경보호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하고 드디어는 자연환경을 무차별 파괴하다보니 여기저기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상에서 이런 사태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이 사태는 발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 주는 경고의 메시지로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의 위대한 위력을 통해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벌써 해일이 일어 난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22일 현재 사망자가 23만명선에 근접하고 실종자 수색 작업이 진척되면 최종 사망자수는 25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합니다.
지진해일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인도적 구호활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구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피해 범위가 워낙 넓고 이재민수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 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지난 13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번 지진해일로 아시아에서 200여만명이 빈곤상태에 빠질 것으로 우려했습니다. 수많은 이재민들이 구호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의 존재를 믿습니다. 나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도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이 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치하의 대학살을 경험한 엘리위젤의 신앙고백입니다. 대학살의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절규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이런 질문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CNN 등 서구 언론들은 아시아 지진 해일이라는 엄청난 자연 재해를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최근 CNN은 간판 시사 토크 프로그램인 ‘래리 킹 라이브’를 통해 ‘하나님과 쓰나미’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남침례신학교의 앨버트 몰러 총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사랑의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을 지닐 때 이 세상의 사건을 통해서 제기되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있느냐?”라는 래리 킹의 질문에 “한번도 없다”대답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번 사태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며 과학과 문명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교만함을 버려야 한다”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영원의 삶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이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토론회에 함께 참석한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학자들은 이번 참사를 통해서 각 종교가 긍휼의 관점에서 서로 연대하며 세계적 차원의 구호 활동을 벌인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긍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성경에 사마리안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와의 대화 중에 율법사는 자기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서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긍휼의 모델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보다 어려움을 당한 동족들을 돌보는 일에 더욱 열심이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은 오히려 강도만난 자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 당시에 유대인들의 의해서 멸시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로 그를 치료하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담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난당하는 남아시아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는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눠주기를 잊지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