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영성수업(신 8:1-10)=목사 주태근
광야의 영성수업(신 8:1-10)
목사 주태근
현대시대를 가리켜 인재 전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모든 나라가 경제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인재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나라가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기업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수한 인재의 발굴 및 유지가 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이 되었습니다. 탁월한 기업이 되려면 전략, 기술, 시스템이 탁월해야 하지만 결국 전략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람이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재가 중요합니다.
세계 초인류 기업이라고 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300여명으로 구성된 '캔디데이트 제너레이터(Candidate Generator)'라는 인재 발굴 팀을 운영합니다.
만약 꼭 필요한 인재가 있는데 회사에 대한 신뢰나 다른 이유로 이직을 꺼려하면, 아예 그가 속한 회사를 사버립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빌 게이츠의 기술자문 겸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아눕 굽타를 영입하기 위해 아눕 굽타가 다니는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 일입니다.
그만큼 인재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막상 사람을 구하려면 지원자는 많지만 구하는 파트의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재의 덕목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합니다.
전경련은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현대자동차 등 국내 굴지의 11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을 상대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조사했는데 주요 요건의 공통점은 네 가지입니다. 개인 역량, 국제 감각, 원만한 대인관계,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 등입니다.
학자들은 핵심인재의 특성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가 전문능력으로 향후 회사의 주도할 인재를 말합니다. 둘째가 변화주도 역량으로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인재입니다. 셋째가 도덕성으로 투철한 가치관과 조직관을 갖춘 인재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미 즉 사람과 '운' 이 따르는 인재 등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한 시대의 인재, 위대한 민족 지도자로 사용하길 원했습니다.
모세는 이미 40년에 걸쳐 애굽 왕실에서 당대 최고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모세의 인재 됨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 7:22)”
그런데 무엇이 부족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광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을까요? 그 광야에서 무엇을 훈련시켰을까요?
모세는 아침에 일어나 양들을 끌고 밖으로 나가 풀을 먹이고 저녁이면 들어오는 그런 반복적인 생활을 40년 동안 했습니다. 바로 광야영성수업입니다. 성경은 당시 훈련받은 모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8) 광야에서 모세는 인재 다운 인재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람에게 존중되는 탁월한 지도자로 구비되는 온유의 영성을 구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인재 다운 인재로 세우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광야영성수업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의 연단을 끝마치고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그들에게 그 동안 저들을 인도했던 영적 지도자 모세가 남긴 마지막 권면과 당부의 말씀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모세는 이미 므리바 연못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민족이‘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모세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모로 저들에게 경계하고 권면하는 말을 남기었는데 오늘 말씀은 그 가운데서 특별히 광야 4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말씀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달이면 능히 통과할 수 있는 광야 길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지나게 하신 뒤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광야 40년의 세월은 무의미한 시간이요, 피하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야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혹독한 연단을 받으며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맡기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광야 40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광야의 영성수업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광야의 영성을 세우시기 위함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교훈하고 계십니다. 광야는 고난의 땅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살기엔 너무나 척박하고 메마른 환경입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와 싸워야 하고, 밤에는 그 반대로 거의 영하로까지 떨어지는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물을 구하기도 힘든 척박한 땅이기에 농사를 짓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기에 언제든지 사나운 짐승이나 적들에게 쉽사리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장소입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지 축복의 땅이라면 광야는 그야말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고난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이 광야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40년이나 모진 연단을 받으며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광야의 영성수업입니다. 광야영성수업은 어떤 내용입니까?
첫째로 바른사람의 영성수업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케 하는 시간입니다. 본문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애굽 땅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연단이나 고난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저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특별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 가나안 땅을 얻은 것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쉽게 얻은 축복이 저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빠르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늦은 것이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교만을 꺾기 위해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고난을 겪게 하시고 이 고난을 통해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배우게 하신 후에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광야 40년은 저들을 낮추는 시간입니다.
왜 우리가 낮아져야 합니까? 겸손이야말로 바른사람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잠언 말씀에 보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교훈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 했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심령 속에 머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한 마음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대부분은 고난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고 겸손케 하사 마침내 가나안의 축복을 얻게 하시려고 광야 길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바라카 현장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책임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그 많은 해외 공사 현장 중에서 이곳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사막 한 가운데 원전공사현장으로 보내셨을까?
바른사람이 되게 하는 겸손의 수업을 위해서라면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겸손은 최고의 덕이며 영성입니다. 사람됨의 경지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광야는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광야는 고난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광야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훈련하는 고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른사람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광야의 영성을 거쳐야합니다. 겸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성품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바른믿음의 영성수업입니다.
본문 2절 후반부를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라고 말합니다. ‘너를 시험한다’는 말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영성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른믿음의 확립입니다. 영적혼란기에 바른믿음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만한 믿음이 있는가? 가나안 땅은 일곱 족속들이 머물고 있는 세속의 땅인 동시에 이교도의 땅이요 영적으로 황무한 지역입니다. 철저한 믿음의 무장이 없이는 영적전쟁에서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지녀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영적전투의 방어적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되는가? 자기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바른믿음이 저들에게 형성되었는가? 믿음의 영성을 세우는 수업이 필요했습니다. 자기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40년의 광야 길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광야 40년은 저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애굽을 빠져 나온 지 2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가데스바네아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들의 불신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저들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정복 전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하는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이스라엘은 고집을 부렸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죽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저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한 체 또 다시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저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 결과로 또 다시 광야에서 남은 38년 동안 믿음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축복을 주시기 전에, 혹은 사명을 맡기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시험하시고 되었다 싶으실 때에 축복과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바른믿음이 중요합니다. 국내의 영적 환경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벼랑 끝에 서 있는 한국교회입니다. 목회자들의 세속화, 교회들의 부패, 이단들의 성행 등 겉 잡을 수 없는 영적으로 어두운 한국기독교의 영적상황입니다.
바른믿음이 없으면 이단에 빠져 영원히 멸망하는 자리에 떨어지게 됩니다. 영적으로 혼미한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가 적그리스도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광야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킵니다. 바른믿음의 영성을 위해서입니다.
바른믿음이 세워지면 시련도 극복하고 고난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말씀 안에 굳건히 서서 끝까지 인내하며 영적으로 승리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1서5장4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광야에서 바른믿음이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바른마음의 영성수업입니다.
본문 2절 후반부를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아니 오직 그것만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로 그것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시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을 때, 칼을 잡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 너무나 궁금해 하십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답답하지 않습니까? 장로님들의 마음이 어떤지, 교인들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서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내의 마음, 딸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몰라 답답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신 곳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동시에 마귀가 노리는 곳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마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마음에 정말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교회에 올 때도, 얼굴이나 옷은 단장하면서 마음은 단장하지 않습니다. 누가 본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이나 옷은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마음 단장이 필요하지만 사람 사이에도 마음 단장이 필요합니다. 배우자나 자녀들, 교우들이나 직장동료들에게 무슨 말을 할 때, 항상 자신의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거짓된 마음이 되고 음흉한 자가 되고 결국 사람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바른마음이 세워져야 순종이 순종되고 헌신이 헌신되고 축복이 축복됩니다.
우리 한국교회 축복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광야에서 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그 많은 환란, 순교, 엄청난 핍박, 6.25사변의 그 많은 전쟁, 우리 한국 교회는 광야가 있는 민족입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눈물로 모두 밤을 새워 부르짖고 우리 믿음의 어머니들, 믿음의 선조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잊지마십시오. 이것이 한국교회의 힘입니다. 눈물로 기도할 때 교회는 살았습니다. 광야가 있으니까 삽니다. 광야가 있으니까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광야를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많은 축복 속에 은혜 속에 부유함과 번영 속에 광야에다 나무를 심어 교회마다 에덴동산 같습니다. 풍성합니다. 잘 살다보니 바른성도의 영성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광야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광야의 영성을 통해 바른교회로 회복됩니다. 성도들도 광야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단순히 허허벌판을 뜻하지 않습니다. 광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드바르(medebar)의 문자적 뜻은 하느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입니다. 인공과 꾸밈이 없는 자연 그대로 속에서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력의 사순절 기간은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는 기간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광야와 같은 형편에 처해 있는 분이 있습니까? 메마르고 거친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못할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죽을 곳은 아닙니다.
지금 이곳이 하나님을 만날 때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입니다. 믿음과 용기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실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말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