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주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눅1:30-38)-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9. 16. 11:40

주께 은혜를 얻었느니라(1:30-38)

 

 

목사 주태근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지혜롭고 충성스러워 보이는 목동을 만나서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바대로 그는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해 나갔고, 마침내 왕의 신임으로 왕궁의 재산관리인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신하들은 하찮은 목동 출신이 왕의 신임을 받는 에 시기와 질투를 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의 허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사에 신중했고, 진실하여 허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그에게서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끔씩 왕궁 꼭대기에 있는 창고에 몰래 들어갔다 한참 만에 돌아오곤 하였으며, 그 창고의 열쇠를 자기만 간직하고 그 근처에 아무도 접근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그가 왕의 재물을 빼돌렸을 것이라 여기고,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고 왕은 그 말을 듣고 엄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신하들은 그에게서 열쇠를 받아 창고의 문을 열고 그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한쪽 구석에 다 낡아 빠진 조끼 한 벌과 너덜너덜한 장화 한 켤레가 놓여 있을 뿐 이었습니다. 왕은 이런 보고를 받고 그 목동출신의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그 보잘것없는 누더기 옷과 다 떨어진 장화를 그토록 보물처럼 감추어 두었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왕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왕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제 마음대로 살고 교만해질 때마다 저의 부족한 과거를 보고 제 마음을 바로 잡고, 왕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거주하는 시리아 한국어교육 국내 유학생(인천공항롯데백화점에서 기념 사진)

 

 

나비와 나방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비는 낮에 햇빛 아래서 활동합니다. 그러기에 꽃과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삽니다. 하지만 나방은 주로 밤에 활동하기에 사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뜨거운 등불에 현혹되어서 자신의 몸을 뜨거운 불에 던져 타 죽기도 합니다. 죄 가운데 있었던 인류는 불나방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잘 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죄의 거짓에 현혹된 삶의 결과가 죽음인지도 알지 못하고 착각 가운데 살았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나방과 같이 사탄의 거짓에 현혹되어 죽음으로 날아갔던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여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이에 대처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알았어도 인간으로는 이 죽음의 사슬을 끊을 어떠한 자격도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하시고 영생의 길을 조명해 주신 절대가치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능히 구원에 이르게 되어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복을 은혜로 거저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은혜란, 전혀 받을만한 조건이나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짜로 베풀어 주시는 결과를 말합니다. 은혜의 결과는 기쁨과 감격입니다. 반대로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써서 얻는 것은 성취입니다.

 

자기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내가 그렇게 했다.' 라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교만이 싹틉니다.

 

결국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되고, 넘어짐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은혜에는 반드시 선택이 있습니다. 따라서 선택과 은혜와 구원은 언제나 짝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먼저를 우리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15:16)" 택함 받았다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죄 가운데 신음하는 수많은 인생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들이 구원을 얻은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공기를 얻기 위해 수고를 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햇볕을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까? 우리 삶 속에서 필수품들은 모두 하나님이 공짜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성도의 삶은 성취 지향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적 노력을 통한 성취는 끊임없는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이 없습니다. 결국은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성도의 삶은 은혜 지향적인 삶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임을 깊이 깨달을수록 감사가 넘칩니다. 기쁨과 감격이 넘칩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성도가 추구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인간적인 조건이나 모든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을 잉태할 만한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가 없는 무흠한 여인이 아닙니다.

 

모래 바람 부는 팔레스타인 나사렛 동네의 한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요셉이라는 목수 직업을 가진 남자와 약혼을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일방적으로 선언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

 

그 인사를 들은 마리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인사법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더욱 놀라 묻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만 해석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이성적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혜가 깨달아 집니다. 마리아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여인이 없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인이라는 것을 마리아 자신보다도 하늘에 있는 천사가 먼저 알았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마리아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 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삶은 은혜 받았음을 알고부터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사람을 달라지게 하고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에게나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선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은 하나님이 그 여인을 특별한 일을 위해 선택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는 일입니다. 이일을 위해 마리아는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에 비를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서 임하는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헌신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헌신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도 헌신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정혼한 남자가 있는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힐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법이나 관습으로는 처녀가 잉태하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같이 위험하고 어려운 일에 헌신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헌신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은혜가 마리아로 하여금 어려운 일에, 위험한 일에 헌신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헌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지 않고서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헌신은 불만과 교만만 키우고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하는 헌신은 감사가 있고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찬양할 일입니까? 그런데도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은혜를 받고 보니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일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본장41-48절에 의하면 "찬양은 하나님께서 비천한 계집종을 돌아 보사 은혜를 얻어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찬양하였고 앞으로 만세에 이르러 자기를 복 있는 여자라고 일컬을 것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을 찬양 하였습니다.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찬양이 없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0절에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청지기를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라 부릅니다. 이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집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요만큼의 영역을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입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 됩니다. 이것이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에요.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싶습니다.

 

미국의 월리엄 헐스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사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고, 돈이 모이는 데로 취미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골동품 수집가였습니다. 귀중한 세계적인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을 마치

생의 목적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진귀한 미술품이 있다고만 하면 세계 어디라도 좇아가서 그것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이미 많은 귀중한 것들은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유럽에 왕가에서 사용했던 도자기하나가 있다는 것을 정보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잡지에서 그 그림을 보는 동안 그는 마음이 뛰었습니다. 아주 그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저것을 내가 꼭 사들여야겠다.' 그리고 구라파를 여러 번 여행을 했고 추적을 해보았지마는 종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이 귀중한 물건이 어디가 숨어있나.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심지어는 실망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잡지를 보는데 잡지에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났는데 그 골동품이 미국인에게 팔렸다. 라고 써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하고 이름을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이름입니다. 벌써 그 소장품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마는 그것을 가져다 두기만 했지 살펴보질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다니면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것,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바로 그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만 은혜가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 가장 소중한 자기건강, 자기가 지금 처하고 있는 이 현실의 귀중한 의미를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도 은혜 될 수 없고 복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멀리서 부러워할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만 같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만 나는 나 됨에 대한 만족이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로 느껴야합니다. 은혜로 감격해야합니다. 그리고 은혜로움 그 안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 된 현실을 보면서 은혜 앞에 자기 자신을 위탁해야 됩니다. 바로 그러한 생이 그리스도인의 생이요 바른 생이요 행복한 생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