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이신 예수(막 11 : 1-11)-목사 주태근
평화의 왕이신 예수(막11:1-11)
목사 주태근
U. N. 국제 연합 본부 건물 앞에 U. N. 이 하는 일을 상징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동상은 바로 전쟁 무기를 가지고 농기구를 만드는 모습입니다. 즉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인간 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는 U. N. 의 목표 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자"라는 이사야 2:4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계속되는 전쟁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평화의 세상이 되기 위함입니다. 어느 굽비오라는 마을에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밤마다 내려와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쌓이게 하곤 했습니다.
이 때 성자 한 분이 이 늑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맨 먼저 느낀 것은 그 늑대에 대한 동정심이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먹이를 삼키는 야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사냥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한 마리 늑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성인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무릇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선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해치고 있는 그 늑대가 그처럼 무섭게 되었다면 거기에는 필경 어떤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무서워하고 있는 저 늑대를 통하여 사랑은 어떤 악이나 두려움도 없애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여러분들 눈앞에서 실제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늑대가 있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늑대가 살고 있는 바위틈 가까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게 하고 그 성인은 마을 청년 한 사람과 함께 늑대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바로 그때 눈에 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 늑대 한 마리가 이빨을 벌리고 당장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죽은 꼴이 되어서 뒤로 자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성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늑대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늑대는 그 성인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약간 주춤했지만 계속해서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성인은 계속 늑대에게 다가가서 부드러운 눈으로 조용히 늑대를 바라다보았습니다. 한동안 숨 막히는 긴장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형제 늑대여!” 너무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습니다. 그 소리에 늑대의 으르렁 소리가 그쳤습니다. “형제 늑대여, 나는 우리의 형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이처럼 찾아 온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네가 마을로 내려와서 다정하게 살았으면 하고 있다. 자, 네 생각은 어떠냐? 나하고 약속하지 않겠니?” 그런 다음 늑대를 향해 손을 내 밀었습니다. 늑대는 저쪽 마을 사람들을 한 번 건네다 본 후 천천히 다가와서 그 성인이 내 민 손에 자기의 앞발 하나를 들어 올렸습니다. 성인의 눈길과 늑대의 눈길이 마주쳤고 성인과 늑대는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주고받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드디어 성인은 몸을 구푸리고 늑대의 목을 껴안았습니다. 그러자 늑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그 성인의 깊고 넓은 영성과 사랑에 감복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늑대는 곧 그 성인을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굽비오 마을로 내려와서 2년 동안이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친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전합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평화의 도구라는 유명한 시를 지은 성 프랜시스의 실화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정신은 짐승들도 감동시켰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양극화(兩極化) 현상으로 많은 갈등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념의 대립이 남북을 분열시켰고, 사상적으로는 우익과 좌익으로, 혹은 진보와 보수로, 정치적으로는 주류와 비주류로, 사회적으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양극화되었습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갈등과 대립을 불러 일으켜 이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흑이냐 백이냐 라는 선택만이 강요됩니다. 여당 아니면 야당이고, 보수파가 아니면 진보파가 됩니다. 우리는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상대방을 공격하여 없애버리려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들 모두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나도록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 중에 유월절을 세 번 맞으셨는데 그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행차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의무적인 3대 명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 끝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유대인들의 소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바로 이 유월절로 예루살렘과 더불어 주변 마을들은 모여온 순례자들로 메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마침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유월절에서 제물로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256,500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규정에 의하면 어린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숫자대로 계산한다면 유월절에 약260만 여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필히 유월절을 지키러 와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좋은 극적인 순간은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망으로 잔뜩 고조된 사람들이 붐비고 몰려 들어왔을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스가랴에서 예언된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신 모습을 연출하셨습니다. 로마는 힘을 통하여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는 도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가 부족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평화의 왕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평화는 무력으로 만드는 평화가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으로 만드는 평화임을 몸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귀의 주인에게 가서“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주인이 나귀를 보내 줄 것이라.”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왕적 권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나귀의 주인도 아무런 거부 의사 없이 순종하여 나귀를 보낸 것을 볼 때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입성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시는 과업의 표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입성하심으로 평화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순례자들은 그를 환호하면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로마의 학정 하에서 시달리며 살아 온 순례자들은 가난한 마음으로 평화의 왕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순례자들은 정성을 다해서 뜨거운 사랑으로 메시아를 영접했습니다. 평화의 왕 그리스도께서 안장도 없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거친 길을 따라서 입성하시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초라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제물과 간절한 소원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들의 소원 중에는 개인적인 필요가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민족적으로 피맺힌 염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의 왕이 오셔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글에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면서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스가랴서에 예언된 평화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씀과 일치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들은 놀라움과 기쁨에 북받쳐서 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호산나”노래하면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여행길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었으나 그들의 순전한 사랑을 주님께 바치며 승리의 메시아를 맞이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하고 속박보다는 자유를 원하며 슬픔보다는 기쁨을 소원합니다.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꿈을 이루기위해서 노력해 왔으나 허사였습니다. 카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가는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으며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불행의 고리를 끊어 버리시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말구유에 오셨고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드는 분이며 평화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방법을 채택하셨습니다.
세상의 임금은 창과 칼을 가지고 말을 타고 정복하러 오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세계 1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강제노역을 하던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예전처럼 노역을 하고 수용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수용소에 돌아와서 점검해보니 장비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누군가가 탈출하기 위해 숨겨놓은 것 같았습니다. 이에 일본군 지휘관이 나와서 포로들을 다 세워놓고 숨긴 자는 빨리 자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자 지휘관은 계속 아무도 안나오면 한사람씩 차례로 총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한 포로가 나왔습니다. 이제 즉시로 총살당합니다. 죽은 포로를 땅에 묻고는 식사시간이 되어서 모두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가서 다시 장비를 세어보니 장비가 모두 있었습니다. 그 포로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포로로 인해 남은 모든 포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용소는 전에 없던 활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한사람의 희생으로 평화가 수용소 안에 깃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은 평화를 낳습니다. 평화는 인류에게 생명을 기칩니다. 구약에서 평화는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샬롬'의 평화개념은 개인적인 종교체험이나 신비적 경험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닙니다. 또한 금속적 생활에서 오는 체념주의적 평화가 아닙니다. '샬롬'의 개념은 관계적 평화입니다. 너와 나, 또는 나와 너,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의 쌍방관계에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화해와 사랑, 협력의 관계에서 이루게 되는 정의와 공의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와 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정의와 공의가 행하여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평화란 진정한 '샬롬'이 아닙니다. 관계상황 속에서 쌍방에 사랑과 긍휼 없이 '샬롬'이니 평화니 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또한 성경적 평화는 종말론적 평화입니다. 종말론적 평화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서 비추는 빛 아래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구원의 약속을 예언으로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지금 우리 가운데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약속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 미래적인 구원의 약속은 믿음에서 창출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종말론적 평화는 점진적입니다. 내 마음에서 작은 평화가 깃들고, 이것은 이웃에게 영향을 주고, 사회를 새롭게 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실 때 가능하며, 그리스도인적인 삶에 기초하는 평화입니다. 종말론적인 평화는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구겨지거나 없어지거나 퇴색하지 아니하는 절대 완전한 평화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약속의 천국을 현재적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평화가 바로 종말론적인 평화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가정에는 이 같은 평화가 있기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봉사하고, 기쁨으로 회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요, 명철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참 평화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평화자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고 화평을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담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담은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화평의 주인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무너지면 인간 사이에 막힌 담도 무너지게 됩니다. 인간 사이의 담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담이 무너져야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담을 그대로 두고는 인간 사이의 담은 절대로 허물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고난주간은 서로의 담이 무너지고 평화가 임하게 하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주간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3)." 아멘.
평화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