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감정의 치유(엡4:26-27)-목사 주태근
상한 감정의 치유(엡4:26-27)
목사 주태근
벌서 4년 전에 일입니다. 경기도 분당 지역에서 대학교수와 노모가 흉기로 찔려 살해된 끔직한 사건입니다. 범인을 잡고 보니 바로 살해된 교수의 스무 세 살 된 대학생 아들이어서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아파트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의 가슴을 흉기로 여섯 군데 찌르고, 마침 신음소리를 듣고 건너 방에서 나온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자 할머니의 왼쪽을 가슴을 한차례 찔러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휘발유를 사들고 와서 집에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그는 경찰에서 범행동기를 말하기를 "명문대를 졸업한 아버지의 권위적인 엘리트의식과 독선적인 행동에 평소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는 살인동기고백입니다. 이 아들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한 감정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분노라는 감정으로 폭발하고만 것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서 오는 나쁜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그 통계를 적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속이 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20대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잔뜩 취하게 술을 마신다. 디스코텍에 가서 진땀날 때까지 흔든다.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른다. 문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친구들에게 전화 걸어 만난다. 등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30대나 40대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술을 마신다. 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드라이브를 한다. 책을 본다. 친구를 만난다. 노래방에 간다. 등등 입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게 풀렸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단 한 명도 속이 풀렸다든지 상한 감정이 그런 방법으로 치유됐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더니 속이 쓰려 죽을 뻔했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그 다음날 해장국 먹느라고 돈만 들어갔다." "차 몰고 집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돈만 손해 봤다."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다가 이비인후과 신세만 졌다." 등등, 자신들이 선택한 방법들로 인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인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고 답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은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느냐 있다면 몇 명이나 있느냐?" 라고 물었는데, 92.5%가 “그런 친구가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친구가 없어 상한 감정을 치유 받을 길이 없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교수님이라는 분은 나이 서른일곱 살에 자기 마음의 상처를 고치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고, 그리고 '재봉틀'이라는 별명입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들을 무서워했고, 또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다리가 사정없이 떨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들입니다.
그만한 이유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정교수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친어머니가 계셨지만 제법 돈이 있었던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나 어린 젊은 여자를 작은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본 부인에게서 4남매를 낳고, 작은 부인에게서 5남매를 낳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다정할 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폭군으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정교수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캄캄할 때까지 함께 놀 친구도 없는데 집밖에서 마을을 빙빙 돌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일에만 파묻혀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운 가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나다 보니까 자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성격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상처가 주인이 되어 이유 없는 분노와 불안, 짜증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쌓이게 되자 화풀이의 대상으로 만만한 사람을 골라서 골탕을 먹이게 됩니다. 교수님 댁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의 아들을 이유 없이 못살게 군것입니다. 부모님께 분풀이를 하려다 보니까 도저히 무서워서 못하고, 그 대신 애꿎고 죄 없는 그리고 아무 힘도 없는 아이를 무조건 괴롭혔던 것입니다.
교수님의 간증에 따르면, 자기 속이 아주 분노로 들끓어 오를 때면 그 파출부 아주머니의 아들을 빈 항아리에 들어가게 하고 뚜껑을 닫아서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풀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수님이 가진 병적인 분노의 희생자는 집에서 키우던 얼룩소였습니다. 형이 맡은 소는 살이 잘 찌는데 교수님이 기른 소는 바짝 바짝 말라가고 고삐만 잡으면 안절부절못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얼룩소를 때리고 못살게 구니까 소 역시 히스테리 신경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치유하지 못했을 때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부부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습니다. 이 분은 서른일곱 살 때까지 인생을 늘 우울하게 비관적으로 살아오다가 어느 기독교치유그룹 공동체에 들어가서 마침내 이 상처를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잘려진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일생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의 나이테에는 아픔의 상처가 있고 나무의 역사의 모든 일들이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도 생애의 나이테가 남아 있습니다. 단지 외적 모습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 마음속에는 오래된 아픈 상처가 나름대로 남아있습니다. 상한 감정의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한 채 나이테가 형성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상한 감정들은 구원이나 성결케 되는 체험 혹은 정상적인 기도의 효력만 가지고는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경험이 아주 귀중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서적으로 입은 상처가 곧장 낫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격에 손상을 받은 정서적인 문제들은 빨리 낫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감정이 상할 때 터뜨리는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우리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길이 탈 때 잘 연소되면 빛이 되고 열을 내어서 폭발적인 힘을 갖습니다. 그러나 잘못 타면 연기만 나서 다른 사람 눈에서 눈물을 내고 주변을 어둡게 하고 주변을 불살라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가운데 분노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분노는 곧 죄의 출발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분노로 살인이 시작됩니다. 최초의 범죄가 창세기 4장에서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열납 하고 가인의 것은 거절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것은 거절당하고 아벨의 것은 열납 되니까 얼굴색이 변하면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쳐 죽입니다. 이것이 분노가 저지르는 최초의 죄악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자체는 죄가 아닌데 이것이 이기적인 미움과, 원한과, 보복으로 드러날 때 무서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분노는 죄 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악이 없더라도 해가 지도록 품으면 결국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의가 없는 분노, 가령 불의한 것을 보았을 때 분노가 나면 그것으로 끝나야지 '자기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쁜 놈 같으니라고' 하면서 다음날까지 그 마음을 품고 있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헤치거나 모욕을 줄 때, 돈을 떼었다든지 할 때 속에서 증오심이 타오릅니다. 보증을 서 주었더니 집까지 날라 버렸습니다. 직장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퇴출당합니다. 그럴 때 분노와 원한이 사무칩니다. 이때 분노를 잘 조절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죄를 짓고 망하게 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친히 바울을 통해서 감동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분노의 감정이 악의에서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50년을 함께 산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어느 날 미닫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밖에서 욕설을 퍼 붙고 있던 아내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조용해졌습니다. 이 남편은 자기가 이겼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기세가 등등해져서 더욱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났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 노인은 자기 부인이 혹시 밖으로 나가 버렸는가하여 미닫이문을 열어보니 아내는 거기 쓰러져 죽어있었습니다. 평소에 심장이 약하던 아내가 극도로 화가 나서 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그제야 '이런 바보 같으니, 방금까지 기세 좋게 싸우다가 죽어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바보 같은 사람, 바보 같은 사람.' 하며 울부짖어 보았지만 숨진 아내는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50년 부부생활의 끝맺음치고는 최악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19:11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 잠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를 승화시켜야합니다. 분노의 원인은 상한 감정입니다. 우리의 상한 감정이 치유되지 않으면 강한 분노로 나타납니다. 데이빗 A. 씨맨즈의 저서 '상한 감정의 치유'에서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단계를 소개합니다. 상한 감정이 치유되려면 여섯 단계를 거쳐야합니다.
먼저,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는 일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기억하기조차 싫은 어린시절의 경험과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먼저 시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고백하고 나누는 용기를 통해서, 깊은 마음의 치료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문제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다 내 책임으로 시인하는 일입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나의 문제를 직시할 용의가 있는가?" 입니다.
넷째,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과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지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거의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다섯째,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셨지요. 그런데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합니다. 이 말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린 것을 우리가 다시 끄집어 낼 권한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 나를 용서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성령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잘못된 것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상담자나 목사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당신이 진정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께 여쭈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상한 감정은 반드시 치유됩니다.
헨리 나우엔 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뭇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았으며, 마지막 십자가의 상처를 받고 그는 거기에서 살이 찢겨 지고 피 흘리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상처받은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상처를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예수님은 결국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 받은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처를 받으면 받은 만큼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내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을 때를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린 나날을 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삶이지만 그것 때문에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치료받고 건강해져 그 상처를 사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오히려 나와 같은 상처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해 주는 치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상처를 그냥 상처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모든 상처를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처를 예수님이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처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바로 부활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상처로 모든 아픔을 격고 죽음의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 그 상처가 부활로 승리해서 상처입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허덕이는 모든 인류에게 치유자로서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상처가 치유된 삶의 회복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 역시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치유자로 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 5). 아멘.
상한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