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13) : 예배와 성만찬(글-주태근)
예배와 성만찬
글-주태근
A. 성만찬의 신학적 고찰
기독교의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은 초대 사도들로 시작된 기독교 예배 원형에 속한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예배와 유대인의 회당예배에 참예 하였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떡과 포도주로서 상징적으로 예고하시고 새 언약 또는 계약을 셰우셨다. 그리고 이 성찬식을 행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탁과 명령을 살려서 사도들이 교회를 시작하여
예배하러 모였을 때마다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였다. 따라서 성만찬은 교회가 형성될 때부터 예배의 요소로써 말씀 선포와 함께 예배 안에 존재하였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확신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같이 떡을 떼면서 순수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성만찬의 교훈과 의미를 회상하였고 기쁨과 찬미의 모임을 가졌다(행 2:46,47). 성만찬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고, 그리스도와의 일체를 경험하는 거룩한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성만찬 의식을 뺀 기독교의 예배는 불완전한 것이다.
1. 성만찬의 성서적 근거
ⓐ 성만찬의 성서적 중요성
기독교 공예배는 말씀과 함께 드리는 성만찬 예전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고 세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성만찬 식탁에 의무적이면서도 특권적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개신교의 상황을 관찰해 보면 성만찬의 본래의 보편적이며 성서적인 의미가 많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 성만찬을 기념의식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있다.
성만찬은 언제나 교회의 거룩한 예배행위이며, 또한 그 생활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교회의 기나긴 역사 가운데 참된 신자들은 이 성례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최고 행위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응답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으며 초대 기독교 공예배의 성서적 원형은 설교와 성만찬을 행하는 것이었다. 쿨만(Oscar Cullman)은 이러한 성만찬을 새 계약의 재 다짐 또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즉시 성만찬에의 참여를 허락받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은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지닌 예전으로써 공예배에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예전의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였고,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만남이라는 생동적 신앙을 갖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현장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한 무리들은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의 사건을 이 예전 속에서 이루게 됨으로써 이 성례전을 가리켜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the central act)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현재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진정한 형태와 기준, 그리고 원천은 하나님의 아들이 겪은 수난과 승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성만찬은 예언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성만찬 가운데서 죄 사함을 보증받으며(마 26:28),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다(요 6:51-58). 이상과 같이 예수께서 자신들의 존재와 삶의 근거를 발견한 새 사람들을 위해 제정하신 이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 속에 중심적 위치를 지켜왔다. 때때로 지나친 해석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독교 예배 중심으로써 그 소중한 의미는 지금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바르게 선포되고 집례되어지는 곳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신앙적 전통으로 우리에게도 전수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례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성만찬의 예전은 나를 기념하라 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 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더욱이 현장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개신교회 집례자와 참여자 모두가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발굴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깨 달은 신앙으로 예수님과 연결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전이 이상적으로 살아 집례되어지는 교회로서의 바른 출발을 위해 성만찬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성만찬의 역사적 기원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하나로써 교회의 새로운 유월절 식사, 즉 새 계약의 식사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아남네시스(anamnesis: 기억)로서, 어린양의 잔치(계 19:9)에 대한 예상으로 베푸신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한 다락방에 모아 놓으시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다. 그것은 유월절 축제의 만찬이었다. 성만찬의 기원은 이 만찬이 있었던 저녁 식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이것은 저녁에 있었고 밤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마지막 식사 곧 유월절을 지키는 관습적인 한 행위를 위하여 함께 식탁에 앉았다. 예수님은 떡을 취하여 제자들에게 주시고, 다음에 포도주 한 잔을 가지사 이것을 마시라고 명하시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 만찬은 찬송 한 장을 부르면서 마쳤는데 이 찬송은 114편 또는 115편에서 118편까지의 시편 중에서 한 부분 곧 유월절 식사를 마치는 그 찬송이었을 것이다.
신약은 주님의 만찬에 관한 기사를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즉 이것들은 마태복음 26장 17절-30절, 마가복음 14장 23절-26절, 누가복음 22장 14절-23절 및 고린도전서 11장 17절-34절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식사에 관한 기사는 사도행전 2장 42절-46절, 20장:7절-11절, 고린도전서 5장 17절, 10장 3절-4절, 요한복음 6장 15절에 기록되어 있고 그 외에도 많이 있다. 신약에서 그 저녁 식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주의 만찬 (고전 11:20), 주의 잔과 주의 상(고전 10:21), 축복의 잔 과 우리가 떼는 떡 , 떡을 뗌(행 2:42), 그리스도의 피에……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 (고전 10:16)과 같이 다양하다.
알프레드 엘더샤임(Alfred Eldersheim)은 최초의 이 성만찬 사건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⑴ 그 장소는 마가 요한의 가정으로 추측되는 큰 다락방이었다. ⑵ 그 시간은 초저녁 또는 밤이었다. ⑶ 그 만찬에서 유월절과 관계가 있었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언급이 있었다. ⑷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예수와 12제자에 한하였다. ⑸ 그 식탁에서 사용되었던 성물(elements)은 빵과 포도주였다. ⑹ 예수님은 그 만찬을 예배하는 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⑺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받아먹게 한 후 다시 포도주가 든 잔을 그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였다. ⑻ 예수님은 그 빵과 잔의 의미를 설명했고, 하나의 예전으로써 주님의 재림시까지 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⑼ 그들은 만찬 이후에 시편송을 함께 불렀다. ⑽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식사를 끝낸 후 모두 감람산으로 나갔고 그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별도의 장소에서 기도를 드렸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 모두가 일치된 견해로, 이것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만찬을 비교 연구한 발표들이 나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은 키디쉬(kiddush)라고 불리우는 유대인들의 랍비와 제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연구이다. 이 키디쉬는 일반적으로 선비인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이나 특별한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하여 식탁을 함께 하면서 모였던 것이다. 이때 이들은 간단한 식사로서 빵을 먹었으며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서로 돌려 가면서 마셨고, 그 후에 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모임은 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경건한 생활의 지속을 위하여 행하여진 것이었다. 이와 같은 키디쉬의 행사가 예수와 제자들의 3년간 생활 속에서도 계속 행하여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는 성만찬을 가리켜 최후의 만찬 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껏 키디쉬를 행하여 온 것 중의 최후 의 것이라는 데서 최후의 만찬 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요한복음서의 관련 기사에서 근거를 두고 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의 처형은 유월절 준비의 날 혹은 유월절 전날 즉 니산(Nissan)월 14일에 일어났기 때문에(요 19:14), 유월절 식사가 있는 유월절 예비일에 이미 예수는 처형되고 있으니 이로써 최후의 만찬 은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유월절 24시간 전에 있었던 유대 종교의 공동 식사인 카버락(Chabrak)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첫째 그 식탁에는 주인이나 또는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 둘째 빵을 들어 쪼개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가 있었으며, 세째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떼어 먹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고, 넷째 잔을 들어 축사하고 함께 드는 관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하여 지금으로써는 어느 것을 확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그러나 비록 그것이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확실한 것은 예수와 제자들의 심정 속에는 유월절에 대한 생각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써 성만찬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며 그 식탁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단순한 식사만을 나눈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하나의 성례전으로 제정된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것이다.
이 성례전 행위의 과정은 다음의 일곱 단계로 세분하여 살필 수 있다. ⑴ 먼저 주님이 빵을 취하셨고 ⑵ 축사하셨고 ⑶ 그것을 쪼개었으며 ⑷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셨고 ⑸ 그 후에 잔을 드셨으며 ⑹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⑺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 이상과 같은 7 단계의 성만찬 제정이 곧 개신교 성만찬의 최초 모델이며 또 가장 근원적인 형태이다. 결국 성만찬은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성례전적 식사이며, 이 사랑은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인 것이다(요 13:1). 그러므로 이 예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행하는 것이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임무라 하겠다.
ⓒ 성만찬의 성서적 의미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이 구원의 은사를 받는다. 성만찬에서, 즉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교류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행하시사 그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시고 각 신도들을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써, 사람이 그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깊은 의미가 담긴 예전인 것이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정하셨으며 이는 곧 사도적 전통의 핵심이며 또한 사도적 전통의 본질을 규명해 주고 있다. 이는 결코 진정한 예배 에 앞서 예비적으로 거행되는 이따금 한 번씩 하는 행사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성만찬의 성서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배설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고 말씀하셨고, 또 식후에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성만찬은 예수의 살과 피 즉 죽음을 기념한다는 듯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도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고 하였다. 이상의 말씀을 보아 성만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에 대한 가시적 의미를 나타내며 회상을 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대한 회상의 성만찬인 것이다.
둘째로, 성만찬은 단순히 하나의 기념만이 아니고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거룩한 영교(Holy Communion), 혹은 동참의 뜻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6절 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 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성만찬은 단순히 기념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친교의 식사에 참여하는 자에게 평화를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의 가시적인 요소를 통해 성만찬의 참여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만나고,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성만찬은 소망의 선포라는 뜻이 있다.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한다(고전 11:26)는 말씀과 같이 모든 참여자가 주님의 재림의 소망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전 백성이 앞으로 장차 오게 될 왕국에서 주님의 식탁에 둘러 앉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떡과 잔을 받을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고대하면서 소망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 소망을 밝게 하며 그 사실을 위하여 늘 새롭게 증거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성만찬은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로써 처음부터 중요시 되어 왔다. 초대교회에서는 매주일의 예배 때마다 행하여져,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졌던 성만찬 속에서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았다는 점이다.
결국 성만찬은 신령한 영적인 은혜와 영적인 본체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시각, 촉각, 미각) 물질의 상징적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며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찬예식은 말로써 하는 설교나 글로써 표현되는 설교의 내용을 우리가 얻을 수 있게 해주며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의 지성과 정서가 함께 운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찬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교훈의 총체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 나타난 성만찬의 의미는 때에 따라 굴절되고 왜곡되어 때로는 성만찬에 대한 지나친 열심 때문에, 때로는 그것에 대한 강한 반동 때문에 성만찬은 교회의 중심인 제자리를 잃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고통이며, 한국교회 역시 하나의 커다란 짐으로써 이 문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