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케 하는 자(마18:1-10) : 목사 주태근
실족케 하는 자/마18:1-10
목사 주태근
걸프 전쟁 때 아주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적진에 추락한 헬리콥터의 상황을 자세히 조사해 본 후에 밝혀진 사실인데, 그들이 이라크에 추락하게 된 이유는 아군의 폭격을 받아서 추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을 '친구의 폭격'이라고 말합니다.
'친구 즉 아군의 폭격'이라는 말은 적진을 향한 폭탄 공격이 실수로 아군 진지에 가해져서, 오히려 아군에게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군대용어입니다. 이런 중대한 실수는 기계적인 잘못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기술적인 문제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런 잘못은 사람들의 실수로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 '친구의 폭격'으로 인해서 아군들이 희생되기도 하지만, 실수로 그런 죽음과 파괴를 일으킨 사람들도 심리적으로 상당히 큰 타격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상처는 받는 자도 상처를 입지만 주는 자 역시 같은 상처를 가지게 됩니다.
뉴욕에 가면 인형병원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에게 인형을 사줍니다. 아이들이 그 인형을 가지고 놀다 보면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목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 고장 난 인형을 아이에게 들려서 인형병원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네가 가서 고쳐 와라."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들고 가서 "선생님, 고쳐주세요." 하고 맡기고는, 나중에 고쳐오면 "야, 우리 인형이 이제 건강해졌다." 하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고치는 값이 사는 값보다 더 들기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고장 난 인형을 아이에게 들려서 병원으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물건 하나라도 아껴라. 귀하게 써라. 소중하게 다루어라.' 하는 가치관을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인형은 인격을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인형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가짐이 나중에 커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만일 인형이 조금 고장 났다고 해서 발로 밟거나 집어 던지는 습관을 키웠다면 나중에 한두 사람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실족}이라는 용어입니다. 헬라어 원어에서 실족이란 남을 넘어뜨린다는 뜻과, 혹은 남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남을 잘못 판단하게 하여 낭패하게 만드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가족들의 과거 신앙 경력을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비록 현재는 교회 생활을 하지 않는 가족일지라도 과거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교회를 옮기든지 아니면 대부분 신앙생활을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은혜를 체험하고 제직이나 교사 혹은 성가대원으로 봉사 생활을 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섬기던 교회를 떠나며 교회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교회 생활 중 남에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교회를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물질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부도덕한 행실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 다툼과 분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 이모 저모로 실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을 넘어뜨리는 결과는 큰 비극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이 세상은 실족케 하는 일로 말미암아 화가 있도다.
화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불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적 의미는 영원한 불, 혹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걸려 넘어졌든지 스스로 넘어졌든지 신앙에 실족한 결과는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 때 주님 앞에 서서 남들이 나를 넘어뜨려서 신앙을 팔아먹었노라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족케 만드는 사람도 화가 있지만, 실족하는 자 자신도 화가 있습니다. 법정에서 죄인을 처벌할 때에 주범이 있고 공범이 있습니다. 주범은 대개 범죄를 앞장서서 꾸민 사람이고, 공범은 이 범죄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주범만 죄인이고 공범이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많은 범죄자들로부터 자신의 범죄가 사회 탓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가장 무책임한 말입니다. 굶는다고 모두 남의 것을 훔쳐야하겠습니까 ? 속상하다고 남에게 분풀이를 꼭해야합니까 ? 유혹받았다고 해서 범죄에 빠져 들어야하나요 ?
남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꼭 내가 신앙을 버릴 이유가 성립 됩니까 ? 모든 범죄의 일차적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1:32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죄는 사형이니라. 왜냐하면 범죄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기 때문이고, 그 범죄의 상대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실족하는 사람과 실족시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범과 공범들로 충만합니다. 국가법을 어긴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어긴 불신앙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이나, 신앙에서 떠난 사람들은 실족으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소자를 넘어뜨리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주님은 위대한 자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고,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자란 말은 첫째로 어린 아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어린 아이처럼 소홀히 취급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4:18-19에,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은 모두 다 남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입니다. 비천하고, 가진 것이 없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소자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상대해야 될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명성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유명 인사들이 예수 믿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여기고 자랑합니다. 간증 집회를 했다 하면 무슨 유명한 가수요, 배우요, 전직 고관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마치 창경원에 원숭이 구경하는 것처럼 신기한 일로 생각합니다. 물로 위인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될 사람들은 무명하고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성의 열 문둥이, 열두 해를 혈루로 고생하던 여인, 갈릴리의 순진한 어부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베다니의 가난한 고아들 나사로 남매, 백부장의 하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간질병 걸린 아들 … 이들 모두가 다 주님이 만난 사람들입니다.
작은 소자 중 하나가 구원 받는 것 ! 그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극히 미미한 한사람 한사람의 신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천한 사람 하나가 실족치 않고 신앙에 서도록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요즘은 대형화의 시대입니다. 대형화 시대에 작은 자들은 멸시와 천대를 각오해야합니다. 서글픈 것은 교회조차도 대형화의 유행을 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인들 마다 대형화에 휩쓸려서 작은 자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강물에 자갈 밀려가듯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밀려다닙니다.
소자들이 실족하는지 죽어 자빠지는지 살필 길이 없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대형화가 사회 발전의 한 현상이지만 미래는 소형화 개인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보다 지금은 학급당 인원이 열명 이상 줄었습니다. 교육적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문화현상입니다. 크다고 좋은 것만 아니고 작다고 나쁜 것 만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세상이 바뀌고 있는 현상입니다. 교회는 작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합니다. 실족케 하는 원인을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가장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자신이 가장 신앙적으로 옳고, 자신이 가장 신앙이 좋고, 자신이 가장 고상하고, 자신은 결점이 적고, 장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남들은 다 잘못된 신앙을 가졌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결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점이 비극의 원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남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남의 이야기로 듣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너희가 남을 실족시키고 있지 않느냐 ! 바로 지금 너희가 남을 시험에 들게 하고, 남을 유혹하고, 남의 신앙을 약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넘어뜨립니다. 고의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려고 해서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가 남을 실족케 합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명령을 하십니다. 성직자가 되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입니다. 남보다 위대한 자가 되고 싶어 하는 제자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해내기 위해서 나선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남을 전도하고 남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하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작은 자 하나라도 넘어뜨리지 않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남을 실족케 만드는 결점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뽑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결점이 많습니다. 개성이 너무 강합니다.
이 개성을 요즘 아이들은 우스개 말로 개 같은 성질을 줄여서 한 말이라고 말합니다. 개성이 강함으로 상처 받는 이웃이 생깁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손 짓 발 짓 하나하나에 남들이 실족합니다. 남이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만 생각지 말고,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눈에 티끌만 찾아내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뽑아내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표정 하나 하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피차 넘어지고 실족하게 됩니다. 실족하고 나서 남을 탓하는 사람이나, 남을 실족케 한 사람이나 각자 자신을 먼저 뜯어 고쳐야 됩니다.
손이 범죄 하게 하거든 손을 자르고, 발이 범죄 하게 하거든 발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눈이 범죄 하게 하거든 눈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 땅에는 온 몸이 멀쩡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병신이 될지언정 지옥에 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남을 실족케 하는 사람들은 어떤 처벌을 받게 됩니까? 오늘 말씀에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말씀했습니다. 유대인의 사형 법에는 이렇게 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 방법이 없습니다. 당시의 시리아나 그리이스 로마의 사형법입니다.
특히 아버지를 죽인 원수, 혹은 사회의 공공 안녕을 파괴한 자를 죽일 때 적용한 사형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극형을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씀했습니다. 도대체 무엇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 살아서 남을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 불에 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죽고 영혼이라도 구원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꼭 필요한 사람,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은 남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신자입니다. 우리는 곡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악 세상에 교회를 만드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남보다 앞서서 예수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높아지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남을 시험에 들게 한다면 신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신자입니다. 20세기에 성자라고 흔히 불리 우는 테레사 수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극빈자, 병자, 고아, 죽어가는 사람, 노인들을 불러서 모아놓고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당시, 그의 사업은 전 세계적으로 펴졌습니다. 126개국에 600여 곳 이상 되는 사랑의 집을 만들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적인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굉장히 탁월한 어떤 C E O의 경영방법을 가지고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도무지 화두가 되지 않고, 큰 기업체를 움직이는 사고를 가지고 그런 일을 했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테레사의 말입니다."나의 임무가 대중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개인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거둘 줄을 모릅니다. 단 한 사람 … 당신도 내가 하듯 그렇게 한번 시작해보세요. 나는 단 한 사람만 인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2,000명이 넘는 사람을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바다의 물 한 방울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 방울을 보태지 않는다면 바다는 물 한 방울이 모자랄 것입니다. 당신 자신, 당신의 가정, 당신이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교훈에 집중해야 합니다. 실족한 자가 되지 맙시다. 아니 남을 실족하게 만드는 자가 되지 맙시다. 무엇보다도 소자를 귀히 여기는 인생을 살아 세상을 변화시킵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2-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