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마11:1-19) : 목사 주태근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마11:1-19)
목사 주태근
사람은 누구나 기대를 가지고 나날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갈 때 사람은 실망하게 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크게 됩니다. 그리고 실망이 쌓이면 급기야 배신감마저 들게 됩니다.
그렇지만 실망이 두려워서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하고 실망했다가도 또 다시 바라고 기대하며 삽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실망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남 못지않은 환경에서 살수도 있었는데 그를 마다하고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일생을 산 정의의 사람이었으며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이때 로마의 섭정 하에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 헤롯 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 자기 동생을 로마로 보내고 나서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취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은 의분을 느끼면서도 누구 한 사람 감히 입을 열어 왕을 충고하거나 책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이 불타던 세례 요한은 결코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헤롯 궁에 들어가 제수를 취한 불의를 책망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그 때의 감옥은 지하에 돌로 사방이 둘려있는 좁은 공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곳은 음산하고 냄새가 나고 건강에 좋지 못한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들소와 같이 드넓은 광야를 뛰어 다니며 자유롭게 살던 그가 좁고 습기 찬 돌 감방에, 그것도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실에 갇혔으니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았을 것입니다. 감방 문은 열리지 않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환경에 의해서 그런 의분이나 정의감이 약화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은 차츰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분명히 얼마 전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에게 세례를 준 적이 있었으며 세례받을 때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 만 예수는 분명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외치며 의롭게 살아온 자기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희생을 치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방문조차 하지 않으니... “왜 그는 말이 없을까” 하고 세례 요한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분이 그리스도일까? 이렇게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도 않는 그가 진정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일까? 이러한 의심과 실망이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만 의심하게 되었고 또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예수님에게 자기 제자를 보내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3절).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낸 이유에 대하여서는 오랫동안 두 가지 해석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이 마음속에 회의를 품은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너무 답답해하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보냈다는 동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날마다 찾아와 울분을 터뜨립니다.
선생님, 정말 메시야가 온 것입니까? 어쩌면 그가 이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하며 매일 감옥에 와서 세례 요한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직접 예수님께 가서 여쭈어보라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세례 요한 자신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비록 그가 분명히 계시를 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지마는 현재 그의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고 급박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에게 회의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6절). 이 말은 결국 세례 요한 자신이 실족하고 있음을 암시한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었으며 실망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 정의를 위해 살고, 믿음 안에 살던 이 사람이 왜 실족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그는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시면 권능을 행하고 능력을 베풀며 또 혁명을 일으키는 굉장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능력은 행하시지만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의외로 예수님은 너무나 조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실족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예수님께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들도 역시 권능을 행하시는 예수를 바로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만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의 생업을 계속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5:26)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당신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은 반드시 치루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만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메시야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아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로 받들고 따를 것이다"라고 유혹합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일,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이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요즈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시나 안 들어주시나 시험하는 죄,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했던 그런 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 역시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신이 메시야 인데 좀 화끈하게 내가 갇혀 있는 옥문을 부수고 나를 살려 주시지“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소경이 볼 수 있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있음을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굉장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능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향한 것이었고, 그의 복음 전도의 방법은 일대 일, 즉 맨투맨(Man to Man)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세례 요한은 그에게 좀더 정치적인 혁명을 기대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진정 그는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아주 초조합니다. 하루가 여삼추로 느껴집니다. 메시야가 오심을 믿기는 하지만 언제 그의 왕국이 건설될지 초조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처지로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자기를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은 시편 13편만 보아도 무수히 외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악인이 나를 조소하는 것이 언제까지이며,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언제까지입니까?"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옵니다.
내가 죽은 다음입니까?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하며 조급해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초조해하는 인간은 시험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마르다가 바로 이런 시험에 빠졌습니다.
오라비가 병들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은 오지 않고 오라비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가 요구한 시간 내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셨다고 해서 응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과 응답된 시간의 시차는 자칫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을 인간이 제한된 자기 시간으로 비판할 때 그는 절망하고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당했습니까?
사무엘이 온다는 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적군은 밀려오고 백성은 흩어지고 마음이 조급해져서 스스로 제사권을 행사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삼상13:10-14). 하나님의 시간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행7: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녀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계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여기 “차매”는 프레로덴톤은 [만족되다] [만기가 되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 즉 만기가 되어야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내 계획표에 맞추어 하나님보고 일하시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획표에 맞추어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자기 헌신의 시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는 세례 요한은 감옥 문이 빨리 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옥문이 열리는 기적은 사도행전에 여러 번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에는 옥문이 열렸지만 야고보는 오히려 목이 베여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옥문이 열려 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아 죽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의 경우, 여러 번 기적이 일어났었지만 마지막 로마에서 그대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왜 어떤 때는 기적이 일어나고 또 어떤 때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 시간이 바로 그들에게 한 알의 밀알로 죽고 썩어져야 할 가장 적절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당시 유대 법으로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던 시대입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여러 가지로 변명하지만 마지막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돌에 맞아 죽거나 내 약혼자가 나를 버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의 뜻대로, 당신의 역사에 필요한 대로 나를 써주십시오 라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지금 이 시간 "너는 나의 역사를 위해 썩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자기중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실망이 찾아올 것이 자명합니다. 오직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신앙만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우리의 소망과 기대와 사랑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에게만 빛이 있고, 그에게만 길이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위탁하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예수를 위해 죽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와 지혜를 얻습니다. 참된 믿음과 소망은 내 속에서 우러나온 욕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그 약속에 근거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이 것이 아닌 인간의 추한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에는 실망과 실족이 뒤따르게 됩니다.
기적은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실 때에 이에 응하고 절대 실족하지 않는 자는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메시야를 알고,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실족케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복시켜 정상으로 인도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금년 한해 주님의 은혜로 더욱 정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