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받는 사람(행1:23-26)-목사 주태근
쓰임 받는 사람(행1:23-26)
목사 주태근
스스로를 탁월한 인재요 수재라고 생각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아주 특별한 인물로 알았는데 대학 졸업 후 입사 시험에 거듭 실패를 합니다. ‘나 같은 인재를 몰라보는 이 어리석은 세상에서 살아 무엇 하나?’그는 죽기로 결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버리고 맙니다.
어느 한 노인이 그것을 보고 그 즉시 뛰어들어 그 청년을 구해 냅니다.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청년의 사연을 들은 노인이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를 주워서 청년의 손에 쥐어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 사람아, 자네 손에 있는 그 모래를 이 모래사장에 떨어뜨리게나.”
노인이 이른 대로 청년이 모래알을 떨어뜨리자 노인이 말합니다. “방금 떨어뜨린 그 모래알을 주워서 나에게 주게나.” 그랬더니 청년이 대답합니다. “할아버지, 이 모래사장에서 그 모래를 어떻게 찾아냅니까?” 그러자 노인은 자기 호주머니에서 진주 하나를 꺼내어 청년에게 주며 다시 말합니다.
“자, 이번에는 그 진주를 모래사장에 떨어뜨리게나. 그리고 다시 그 진주를 주워서 내게 주게나.” 청년이 진주를 떨어뜨린 다음 금방 다시 주워서 노인에게 건네줍니다. 노인이 청년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이 사람아, 모래사장에 있는 모래는 다 똑같아 표가 나지 않지만 진주는 금방 알아 볼 수 있네. 이처럼 자네가 진짜 수재이고 인재이면 사람들이 왜 자네를 몰라보겠는가? 착각하지 말고 자네를 진주처럼 값지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가꾸어 나가게.” 이러한 노인의 말에 크게 깨달은 청년은 ‘그래, 내가 착각을 했구나. 나는 그저 모래알 같은 흔한 사람이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구나.’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롭게 인생출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학력자일수록 취직하기가 매우 힘들어 다시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전문기술을 배워 취직해보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사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실력이 있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고 받아줄 직장이 없어 실업자가 된다고 하면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뿐 아니라 퇴직한 공무원들 중에도 실력이 출중하고 몸도 건강하여 얼마든지 더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인데도 노인 취급을 받으며 한가히 지내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재들이 쓰임 받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 여간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에 쓰임 받거나 특별히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부름을 입고 입각하게 되는 것도 개인적으로 큰 복이라 할 수 있지만, 이보다 더 큰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일에 크든지 작든지 쓰임 받게 되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여 그의 사역을 일임시킵니다. 바로 그 열 두 명 가운데 11명의 이름이 사도행전1장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대 자세히 보면 12제자 명부에 누락된 한명이 있음을 압니다.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의 이름이 왜 여기에 누락되어 있을까?
본문 25절에서 그 이유를 기록합니다.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가룟유다가 제자들의 명단에서 제외된 이유는? “제 곳”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룟 유다가 “제 곳으로 갔다”는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본문 18절-19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우리들이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가룟유다가 목매어 자살하는 것으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오늘의 본문을 종합하면, 목매어 자살할 때, 줄이 끊어져 시체가 땅으로 곤두박질하면서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룟유다가 간 '제 곳'입니다.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가룟 유다는 본래 사도의 직무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가서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 대하여 마태복음26장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여러분, 태어난 것 보다 더 못한 인생, 바로 가룟유다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바가 큽니다.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비록 실수를 했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돌이켜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는 그 중에 많은 실수를 했던 사람입니다.
‘물 위로 걸으라!’ 할 때 베드로는 의심하여 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해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을 지신다 말하니까? 죽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함으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 모두 다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말하자,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장담했다가 결국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 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놀라운 변화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도들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판단하십니까? 베드로의 돌이킴 즉 회개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곧 바로 돌이켜 바른 길로 걸었습니다. 이처럼 변화된 베드로는 초대교회 역사에 부흥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변화 받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라는 사람이 주님의 사도로 선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22절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맛디아를 선택할 때, 가문이나 학벌이나 외모를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생전에 그 곁을 따라다니면서 제자들과 항상 함께 동행 했던 사람 가운데서 선택했습니다. 배반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충성의 사람입니다.
에베소서6장24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했습니다. 변함없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충성 하는 자를 하나님은 쓰십니다. 초대교회에는 충성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굶주린 사자들이 들끓는 로마 제국의 원형 경기장 그곳에 사자들의 먹이로 던져졌던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할 때마다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나는 사랑의 숨결을 품어 낼 것입니다. 구타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신음소리로 사랑의 흔적을 보일 것입니다. 찔러 보십시오. 나는 사랑의 피를 흘릴 것입니다. 사자의 먹이로 던져 보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불태워 보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들의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충성심 그것이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의 자세입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턴의 마지막에 남아 있는 실화입니다. 리빙스턴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외딴 곳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대 그를 마지막까지 도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웨인 우리잇이란 흑인입니다. 이 흑인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리빙스턴의 시신을 항구가 있는 곳까지 수 천리를 걸어서 운반하여 영국으로 운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흑인은 영국에 까지 따라와서 리빙스턴의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그때에 모든 사람들이 리빙스턴을 존경하고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리빙스턴만 찬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리빙스턴을 따라서 끝까지 충성되게 리빙스턴과 일생을 같이한 그 흑인 동역자 역시 크게 존경하고 찬양했음을 역사가는 말합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쓰임을 받게 됩니다.
어떤 분이 교회 안에 다양한 교인들을 아홉 가지 유형으로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달구지 같은 유형이 있습니다: 항상 뒤에서 밀고 가야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절대로 스스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누군가 밀어야 능동형의 사람입니다.
또한 연(鳶)같은 유형입니다: 항상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종적 없이 날아 가버리는 유형을 말합니다. 수시로 전화하고 살피며 돌봐야합니다.
애완견 같은 유형입니다: 줄곧 안아주고 쓸어주고 토닥거려 주어야 짖지 않는 유형입니다. 잘했다고 칭찬하고 예쁘다고 칭찬하고 한동안 말해주지 않으면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좀 성가시게 콩콩 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럭비공 같은 유형입니다: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어 늘 조마조마하게 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예상치 않는 곳으로 튀어서 다른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만들곤 합니다.
풍선 같은 유형입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는지 모르는 항상 불안한 유형입니다. 또한 수명이 다 되가는 형광등 같은 유형입니다: 쉴 사이 없이 켜졌다 꺼졌다하여 주위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유형입니다.
그런가 하면 염소 같은 유형입니다: 항상 떠받기를 좋아 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목사도 떠받고 성도들도 떠받아 상처를 내어줍니다. 그리고는 다른 성도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항상 독불장군입니다.
양같이 아주 순한 유형입니다: 순박하게 그대로 믿고 잘 따라와 주는 유형을 말합니다. 매사에 교회 일에 순종하며 겸손히 임합니다. 얼굴에는 밝은 미소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 같은 유형입니다: 말없이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유형입니다. 변함이 없는 충성형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한다고 판단하십니까? 우리 모두 주님께 쓰임 받는 양 같은 유형과 소 같은 유형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선택할 때, 두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바로 유스도라는 별명을 가진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배수 공천하여 모인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맛디아입니다. 맛디아가 어떻게 열 두 사도직에 선택되었는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본문 21절, 22절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21절). 여기서 빈자리를 채우는 사도의 선택 조건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의 승천하신 날까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확실히 경험한 사람을 말합니다. 단순히 늘 주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식만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 다녔을 뿐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믿음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룟유다는 예수를 헐값에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가룟유다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마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이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믿음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사람이요, 결정적인 시간에 예수를 배반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가룟유다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쓰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지혜로 지식으로 경험으로 봉사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을 계속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2절전반부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22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말은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뜻을 나타낸 말입니다. 공동체를 잘 이루는 자입니다. 혼자보다 함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개인주의가 성행한다면 비극적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 아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되고, 나 아닌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해서 가치와 존재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맛디아는 공동체를 잘 이루는 생활을 했습니다. 나 혼자만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회는 불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는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복된 자가 될 줄 믿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자기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고, 남이 잘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남이 성공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행복을 느낀다면 그분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삶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성경에도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꼭 동행할 때에 실라와 더불어 역사했고,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역사했던 이런 사실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윗과 요나단이 그 함께 한 우정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를 많이 가져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기쁨과 슬픔을 서로 함께 나누고, 서로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됩니다.
각자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할 때에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누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쓰임 받는 인물입니다.
22절후반절입니다.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22절)라고 말합니다.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행함이 있는 신앙으로 열매 맺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맛디아는 제자들과 함께 다니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는 잘 사는 것보다 올바로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말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삽니다. 그러면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삶이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955년 어느 가을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시골마을의 회관에서 종교영화를 상영한다는 신문광고가 났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에 관한 것으로 그 고아들을 돌볼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곳에 참석했던 한 농민 부부는 “우리 같은 가난한 농부가 무엇을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문득문득 그날의 가슴 아픈 영화의 장면들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기도하는 가운데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농장의 일부를 처분한 돈을 들고 직접 한국으로 건너와 8명의 혼혈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왔습니다.
이런 사실이 마을 신문에 사진과 함께 기사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각처에서 이들을 돕겠다는 사람들의 편지가 쇄도했습니다. 이 농부는 차츰 차츰 농토를 팔고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들은 1만 6천여 명의 전쟁고아를 각 가정에 맺어주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홀트아동복지회의 해리홀트입니다. 비록 그가 돈이 많지 않은 농부였지만, 성령의 감동이 왔을 때 기쁨으로 순종한 결과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쓰임 받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행동으로 믿는 사람은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나아가는 우리들 모두를 향하여 이렇게 축복합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