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생명을 살리는 교회(요10:10)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3. 7. 20. 09:59

생명을 살리는 교회(10:10)

 

목사-주태근

 

페르시아의 유명한 대왕 다리오스가 구라파 침략을 할 때 첫 번째 전투는 알렉산더 대제와 치+러야 했습니다. 그때 대왕 다리오스는 알렉산더 대제에게 선물 하나를 보냈는데 그것은 참깨가 잔뜩 들어 있는 부대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군대는 이렇게 이 깨처럼 많다. 그러니 싸우려고 하지 말고 손들고 항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제는 답장을 작은 봉투에다 씨 하나를 넣어서 보냈습니다. 그것 이 바로 겨자씨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칠다. 우리는 너희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너희 군대는 많지만 죽었고 우리는 살았다"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전쟁을 하였을 때 알렉산더가 승리했습니다. 생명력이 없는 깨처럼 많은 군인보다, 생명이 있는 하나의 겨자씨가 낫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군인과 생명이 없는 군인이 다른 것입니다.

 

연세가 지긋한 한 대학 교수님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젊은 선원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철학을 아는가?" 그러자 선원은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이 연세 많으신 교수님이 "허허, 자네는 자네 인생의 4분의 1을 잃은 거야. 그럼 지질학을 아는가?"

 

"전혀 모르겠는데요!" "자네는 인생의 절반을 잃은 거야. 그럼 천문학을 아는가?" 젊은 선원이 그걸 알 리가 없습니다. "선생님, 그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교수님은 "자네는 인생의 4분의 3을 잃은 거야" 하면서 안타깝다는 듯이 선원을 바라봅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아 그러더니 배가 조그마해서 파도에 못 이겨서 결국 배가 뒤집혀서 둘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젊은 선원이 교수님에게 묻습니다.

 

"교수님, 수영할 줄 아십니까?" "아니 못하는데" 젊은 선원이 말합니다. "그럼 교수님은 인생의 전부인 생명을 잃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 있으나 건강한 생명이 있고 병든 생명이 있습니다. 인간이 제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살았다고 하는데 죽은 것입니다. 차라리 죽은 줄 알았다면 살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는데 산 줄로 알고 있으니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길어야 100년 안짝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해도 영혼의 생명을 잃으면 그러한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요 실패한 사람입니다. 영혼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두 나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벤진이라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열대성 나무로서 옆으로 가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뻗어난 가지가 땅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어떤 나무는 한 나무가 8km까지도 옆으로 계속해서 가지가 뻗어나가 결국 거목이 됩니다. 많은 가지로 새들이나 동물들이 와서 한가롭게 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결정적인 약점은 옆으로 뻗어나갈 때 그 밑에는 단 한 포기의 풀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거목이 영양분을 빨아 올렸기 때문에 땅은 척박해지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주위에 생명력을 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나나 나무입니다. 바나나 나무는 육 개월이 되면 반드시 옆에 한 싹을 냅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가 옆에서 자라 올라오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일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 바나나 나무는 계속해서 새싹을 만들고 다른 나무들이 자라도록 뒷받침을 해줍니다. 자기가 죽을 때에 무수한 다른 나무를 만들어내는 바나나 나무입니다.

 

교회 역시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10절 에서 "생명을 살리는 교회"2007년 우리교회표어를 삼았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주님의 몸으로서의 생명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많은 생명체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피는 온 몸을 돌면서 몸의 각 부분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고 노폐물을 수집해 오는 역할을 합니다. 이 피는 심장에서 보내집니다. 심장에서 나와서 동맥과 모세혈관을 통해 몸의 구석구석까지 보내진 후 다시 모세혈관과 정맥을 통해서 심장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세상을 인간의 몸에 비유한다면 교회는 심장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 말입니다. 또한 피는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장은 생명을 공급해 주는 창고이지만 그것을 운반해 주는 피가 있어야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피인 기독교인은 심장인 교회에서 생명을 받아서 세상이라고 하는 몸의 곳곳에 가서 죄악의 노폐물들을 거두어들이고 생명의 말씀을 공급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교회 입니까?

 

먼저, 자라나는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생명은 자라야 합니다. 천천히 자라도 자라야 합니다. 내게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장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자라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알게도 자라야 하고 모르게도 자라야 합니다. 자라나는 생명은 생명의 영향력을 끼칩니다.

 

만든 꽃 조화는 보기가 좋지만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진짜처럼 만들어졌어도 박제 호랑이는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에는 알로부터 큰 누에가 되기까지 몸무게가 약 일 만 배 가량 성장한다고 합니다. 자라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산호세에 있는 레드 우드 라는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레드 우드 라는 참나무가 있습니다. 이 참나무는 나이가 2-3천 년쯤 되어 예수님 태어나기 전에 태어난 나무입니다. 나무 높이가 무려 100m를 넘으며 나무 둘레가 15명의 사람이 팔을 벌려야 할 정도로 큰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를 그 누가 보아도 고목의 내부가 마치 불을 놓은 것처럼 숯처럼 까맣게 타 있습니다. 불을 놓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죽은 나무 같습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산화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이렇게 큰 나무가 어떻게 비바람을 이겨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덩치 큰 나무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뿌리를 깊이 박고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의 발견입니다. 고목나무가 죽지 않았기에 생존하는데 서로의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이렇게 늙은 나무인데도 계속 자라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조금씩 자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늙으면 줄어듭니다. 그러나 나무는 해가 거듭될수록 계속 자랍니다. 자라나는 나무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해야합니다. 자라는 교회가 생명을 살립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빨리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큰 믿음의 나무가 되기 위하여서는 천천히 자란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스트롱 박사는 성장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빨리 속성으로 학문을 읽히기를 원하는 한 학생에게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물론 가능하네. 그러나 그것은 자네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네. 하나님께서 참나무를 키우기 원하신다면 백년에서 천년을 들이지만 호박을 키우기 위해서는 육 개월밖에는 안 걸린다는 것을 알기 바라네!"라고 설명했습니다.

 

한 가지 사상도 짧은 시간에 생기는 것은 없습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후에 생기는 것입니다. 영국 수상 디즈 레일리 가 어느 날 하원에서 즉석연설을 하였는데 명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 한 숙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즉석연설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당신의 연설은 하루 종일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답니다. 어쩌면 즉석으로 연설을 했는데도 그렇게 잘 하십니까? " 이때 디즈 레일리 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인, 제가 그곳에서 한 그 즉석의 말은 20년 동안 제 마음에 있던 것을 말했습니다." 연설이 즉석이라고 사상도 즉석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믿음도 자라나야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생명이 태어나는 소리가 항상 들려야 하겠습니다. 새신자가 늘어나는 교회입니다. 전도하여 새생명을 구원하는 교회입니다. 전도의 폭팔이 이 일어나야합니다. 산고의 아픈 소리도 생명의 소리입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그릇 깨지는 소리도 역시 생명의 소리입니다. 죽은 교회에는 법도 있고, 직책도 있고, 제도는 있는데 생명은 없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창조적이지 않습니다. 권위와 정치적 선은 있어도 영적 선은 없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미국 여행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그 사원 무덤에 묻혀있는 지나간 세기의 영웅들의 사연 많은 삶과 이야기를 설명하였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이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을 훌륭하게 설명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 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 앞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잘 지었는데 죽어 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는 생명이 있어야합니다. 예배당이 작아도 낡은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려도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생산의 역사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우리교회는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 생명력 있는 찬송과 기도, 전도, 교육, 선교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네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8:37-38)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충만이 교회의 생명입니다.

 

성령충만한 초대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신선하였습니까?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람들이 변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들었고,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면서,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말씀이 충만하고 기도의 불이 타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모이면 사랑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였습니다. 체면이 하나님 영광보다 앞서지 않았고 그러나 무질서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의 말씀에 순종하되 이성을 잃지 않았고, 모두 성령에 충만하되 사도의 가르침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충만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그는 나이 50세가 되도록 하나님을 모르는 불가지론자였습니다. 내가 왜 지금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하는지 생명의 의미도 가치도 모르는 회의론자 였습니다. 게다가 자기의 삶을 혐오하고 저주했던 지독한 비관론자였습니다.

 

물론 그는 사회적으로 남부끄럽지 않게 풍요롭게 잘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황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풍요로운 인생인지 열심히 찾고 구해보았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문학과 철학과 예술의 세계에서 그것을 찾고 구해봤습니다.

 

그러나 헛수고였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허무와 절망을 느낄 뿐입니다.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는 바로 그런 정황에서 쓰여 진 책입니다. 톨스토이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방에 밧줄을 매어놓고 살기까지 했습니다. 용기 없어 죽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로 숲 속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이 불쌍한 어린양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그 황폐해진 인생에서 구원하리라."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그의 관계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인생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의 마음에 기쁨과 마음의 평화가 넘칩니다. 그의 삶에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그 황폐하고 빈곤한 삶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작품 활동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세 번째 장편소설 "부활"이 그렇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작품인지 모릅니다. 진실로 톨스토이의 인생을 보노라면 인간의 삶이 그토록 풍요로울 수 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삶은 오직 예수,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진실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이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는 실감하게 됩니다. 양으로서의 자존감, 예수는 나의 선한 목자, 나는 그의 양이라는 이 믿음과 확신, 이것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줍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아멘.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