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설교원고

사귐의 공동체로(요일1:1-3) :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3. 7. 22. 11:25

사귐의 공동체로(요일1:1-3)

 

목사 주태근

 

어떤 목사님이 다른 교인들과 전혀 교제를 하지 않는 성도의 집을 심방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집안에 있는 벽난로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벽난로의 불꽃을 몇 분 동안 바라만 보았습니다. 한참 후에 목사님은 부집게를 가지고 활활 타고 있던 석탄 하나를 집어서 화로 앞쪽에 놓았습니다.

 

곧 석탄은 빛을 잃고 식으며 검게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목사님은 말없이 다 꺼져 가는 석탄을 활활 불타고 있던 석탄 무더기 위에 다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자 석탄은 곧 전처럼 힘차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본 성도님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 목사님께 송구스러운 듯 말합니다.

 

목사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다음 주일 교회에 나가서 다른 교우들과 사랑을 나누겠습니다.” 인간관계의 중요성입니다. 교육학자 폴 투르니어 박사는 그의 책 "고독으로부터 도피"에서 오늘 현대인의 삶을 대표하는 고독한 한 여성의 삶을 소개 합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비서로 일하는 한 외국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라디오에서 그 날 하루 방송을 마감하는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 "오늘 밤이 당신에게 행복한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듣고 잠이 들곤 합니다.

 

그는 이 복지기관에 와서 근무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그의 상사를 비롯해서, 그 사무실에 찾아오는 어느 누구하나, 그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많은 사람을 대하지만 하루 생활 중 인간적인 대화는 그 날 라디오 방송 종료 시간에 듣곤 하는 아나운서의 인사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사무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주고받는 많은 말을 듣고 살지만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의 고독은 더욱더 깊어만 갔습니다. 투르니어 박사는 현대인의 이러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정신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의회주의 정신, 독립의 정신, 소유의 정신, 요구의 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관계가 없는 인간의 삶은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시골에 살던 두 명의 젊은이가 도시로 나와 어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시골 교회의 가족과 같이 따뜻한 분위기 대신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삭막한 도시 교회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의 일 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지만 아무도 아는 척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이들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음 주에 결판을 내자고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가면 누구에게든지 다가가 말을 걸어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한 친구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교회생활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람은 그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17c 영국의 청교도 운동을 주도했던 영적 거장 리차드 백스터 목사입니다.

 

카네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을 통계적으로 보면 15%가 실력이고 나머지 85%가 인간관계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실질적으로 강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네기는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또한 그가 그의 회사의 총책임자로 선택했던 찰스 쉐아브라는 사람 역시 강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하루에 최고 액수의 봉급을 지불하면서까지 고용을 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가 좋다는 그 자체가 큰 자원입니다.

 

미국 경영인 협회 200명의 경영자들의 통계 결과가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가치 있고, 뛰어난 기술과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능력 즉, 친화력이다." 개인적인 삶에서 올바른 관계가 성공의 중요한 요인 일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그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에서 함께 계시다는 단어는 정지된 상태에서의 함께 함이 아닌, 서로를 향하여 움직이고 대화하고 교제하고 계시다는 의미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존재하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인간을 하나님을 닮아 사회적인 교제 속에 살아갈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도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시지 않고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지체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근세의 유명한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이 나와 너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세 가지의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인간관계를 마치 물건처럼 서로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린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 관계입니다.

 

둘째로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은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부버는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대해 준다고 하여도 이 관계가 항상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 언제나 이러한 관계를 중매하는 촉매자가 필요한데 그것을 영원자인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관계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깨어지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교제는 믿는 자들과 많이 다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술로 교제합니다. 골프와 화투로 교제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 3절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너희와 우리의 사귐, 이 사귐의 근거는 우리가 꼭 같은 예수 체험을 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예수를 만났고 함께 그를 보았고 함께 그를 만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만나면 그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여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에 대한 간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코이노니아, 성도의 사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해 얻은 힘을 가지고 아직도 그분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 그분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또한 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지난 날 미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 폭발사고로 7명의 우주인이 목숨을 잃을 때 그리스도인 남편 릭을 떠나보낸 아내 에블린의 이야기가 커버스토리로 실려 있었습니다. “이제 2주간이 지나면 남편이 우주에서 돌아와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귀에 다정하게 속삭여 줄 것을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우주 왕복선의 이륙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21일 컬럼비아호는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던 중 텍사스 상공에서 폭발했다. 내 삶이 하늘에서 송두리째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 엄마, 내 수학 숙제는 누가 도와주나요? 내가 결혼할 때 누가 날 데리고 입장하는 거지요? 울부짖는 딸아이를 난 아무 대답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없는 미래를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과 절망감 -- 그런데 그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인생의 어려운 시절마다 한결 같이 위안을 주던 음성이었다. 주님의 음성이었다. 넌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큰사랑을 언제나 의지해 오지 않았던가,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은 내가 울부짖는 순간에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내 남편과 나를 그리고 내 예쁜 두 아이를 묶어 주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서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인간관계의 모든 위기를 넘어서서 성도가 누리는 교제, 그 끝없는 사랑의 기쁨과 승리가 우리 모두의 것으로 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단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방을 배정하는데, 평소에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과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주최 측에 쫓아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방이 다 짜여서 안 되니 그 사람과 같이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번 일로 여행을 망쳐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평소의 미운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그 사람과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해서 말도 곱게 하고 대화를 하며 노력하면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오해했던 것도 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가까워져 친구가 되어 여행이 끝난 후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사람과만 한방을 쓸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살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억지로 묶어주십니다.

 

가정에서 부부로 묶어 주시기도 하고, 교회의 한 성도로 묶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할 수 없이 싫은 사람과도 같이 살게 하고 말하기 싫은 사람과도 말하도록 하고, 나누기 싫은 사람과도 나누도록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서 시험 들지 않게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온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이나 교우들을 너무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존경하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결혼 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 가까이 하지 말고 따로 사는 것이 좋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지만 서로가 갈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 할 수 있습니다. 아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사회입니다. 건강이란 것은 질병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요소가 내게 침범해 온다할지라도 그것을 퇴치하고 해결하는 자생력이 내게 있을 때 그것을 건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극복하는 능력 그것이 건강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입니다. 그 아이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아이를 한 아이로 보아야 하는가? 둘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랍비가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넣어 한쪽 아이 머리위에 부었을 때 동시에 다른 아이도 울면 하나고, 그렇지 않고 한쪽 아이가 울지 않고 웃으면 그때는 둘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유대인이 고통을 당하면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개 교회의 범주를 넘어서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자매들로서의 교제입니다.

 

어느 날 어느 유대인 랍비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동이 트는 시간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랍비의 제자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멀리서부터 개와 양을 구별할 수 있을 때가 동이 트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다." 랍비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무화과나무와 포도덩굴을 구분할 수 있을 때가 아닌지요?”하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다."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답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하고 제자들이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너희의 형제나 자매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빛이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동이 트는 시간이다. 그 때까지는 밤이며, 어두움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두운 밤이라 말하면서 새벽이 다가온 것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니신지요? 새벽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동튼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셀그룹은 사랑의 관계를 가지는 모임입니다. 신앙공동체를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인간관계의 축복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이번 주부터 모이는 각 가정에서의 셀모임이 주님의 작은 교회로서 사귐의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한서신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14:16)아멘

 

 

 

 

 

인간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