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

예배학 강의록(16) : 성만찬 예전의 실천(교수-주태근)

주 바나바 2023. 8. 11. 10:06

예배학 강의록(16) : 성만찬 예전의 실천(교수-주태근)

 

B. 성만찬 예전의 실천

 

겟세마네 입구 : 이스라엘

금세기 중엽부터 태동한 세계교회 예배갱신 운동의 초점은 공예배의 성서적 원형을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공예배에서 본의 아니게 경시되어 온 성만찬의 바른 위치를 되찾아 온전한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노력이 교회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세계교회의 운동으로 다른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성서와 예전분야의 학문적 연구로서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의 공예배가 성서적인 근거에서 멀어지고 있고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지에서도 빗나간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만찬이 1년에 2회 내지 4회 정도만 집행되고 있는 것이 잘못 된 예배의 관습임을 깨닫고 매주일 예배에서, 아니면 적어도 월 1회 정도는 성만찬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함을 예배갱신 운동에서 강조되고 있다.

 

성만찬이 경시되는 세계교회의 예배에서 성만찬이 보다 중요시 되는 공예배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성만찬의 위치를 바로 이해하는 예배의 신학이 받아들여지고 그 신학이 예배의 현장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고, 성만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1. 성만찬의 현대교회의 견해

 

오늘날 세계교회의 예배갱신의 운동은 본래적인 전통교회의 예배를 새롭게 표현해 가려는 노력이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의 전통적 의미의 현대적 재구성이 중심적 과제가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성만찬에 대한 견해도 다음과 같이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어떤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왔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물을 드리는 봉헌에서부터 이런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2세기 중반의 순교자 저스틴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죄로 물들었던 자신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주신 은총 앞에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또 이러한 사상은 칼빈에 와서도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성만찬은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시는 모든 은총에 대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그리고 공동체적 측면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의 연합, 창조주에 대한 봉헌, 나아가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하여 드리는 거대한 감사제인 것이다.

 

성서를 보면 시편은 찬양의 제사와 감사로 가득차 있다. 시편 99편은 찬양의 제사의 내용이다. 시편 115편은 유월절 식사 예식의 부분이 있다. 예수는 성만찬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것을 노래했다. 사도 베드로에 따르면 우리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게 하신 왕같은 제사장 (벧전 2:9)이 되었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자는 이 길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 16, 참고 시 50:14,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이며 같은 것으로서의 예식과 실제적 봉사인 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은 찬양의 제사이며 관용의 제사로서 여기에 묘사된다. 결국 예수가 유월절 식사의 과정으로 첫 번째 성만찬을 거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위한 감사 기도요, 찬양의 제사인 것이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방법 안에서 그것을 이해했었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예식문들이 성만찬 기도의 처음에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을 위한 엄숙한 감사 기도나 축복으로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카리스트(Eucharist)가 찬양의 제사이며 감사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성만찬 기도를 감사 기도와 찬양의 제사 모형 안에서 시작한다.

 

ⓑ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

 

세례를 포함한 성례전 전체는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이다. 이러한 신학은 칼빈에게 아주 중요한 교리의 한 부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Seal)을 치고 계약을 확인해 가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사상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5: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성만찬의 제정은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성찬의식에 있으나 그 실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 속에 임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거룩한 영교, 혹은 동참의 뜻을 가진다 고 앞에서 말한바 있다. 바울은 성만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라고 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영적 친교의 식사에 참여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선상에서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며, 그 이름을 일컬으며, 그 능력으로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가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내용이라 하겠다.

 

ⓒ 회상으로서의 성만찬

 

주님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바로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하여 계속 시행할 것을 분부하셨다. 이것은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고 그 부활의 승리와 귀하신 교훈을 되새기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인 의미는 성만찬이 떡과 잔을 나누는 의식으로써 계속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념적 회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떡과 잔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지는 표적으로써 기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생명력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날마다 회상과 기념의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맥 튜리안(M.Thurian)에 의하면 이 회상은 유대 민족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를 재경험하는 유월절 식탁과 같은 성격의 성만찬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회상이란 원래 히브리 민족의 사상에서 단순한 기념적 의미만을 갖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를 현재 속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만찬 거행에 진지하고 섬세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겠다.

 

ⓓ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memorial)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예배가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진다(present efficacy)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이루신 모든 구속적 기념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교제를 나누시고 구속의 일을 행하신다. 주님께서 성만찬 제정시에 하나의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눅 22:19)는 말씀과, 잔을 부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예전으로서 성례전을 가져 왔었다. 여기서 참여자는 더 이상의 죽음을 통한 희생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그 대신 자신들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롬 12:1)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례전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전 11:26). 이렇게 함으로써 성만찬은 주님의 희생을 직접 보고, 그 살을 받으며, 그 피를 마시는 엄숙한 예전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계속 유지되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기념적인 의미만을 지닌 생명력이 없는 성만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신교의 성만찬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부활의 영광으로 기념하는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 가운데 말씀 선포와 함께 성만찬이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말씀은 성찬과 함께 선포되어질 때 그 말씀의 실제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실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예배에 말씀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제로 성만찬 가운데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스롤리(J.H.Srawley)같은 학자도 초대교회에서의 성만찬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재현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으심을 선포하는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오늘도 계속 되어져 야 하며, 또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희생에 대한 찬미의 제사의 의미가 이 성만찬 예전에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본질 중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자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이 성만찬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확대는 바로 이런 운동성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며, 땅 끝을 향하여 확대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표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서나 성례전을 행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이 성만찬 안에서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의 성례전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으로 끝나는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시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며, 이를 경험하는 신앙이 있을 때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일치된 온전한 형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만찬은 언제나 공동체의 모체인 그리스도의 하나인 몸을 가능케 하는 나눔의 제전임과 동시에 전체를 하나의 신령한 모체로 묶는 결합의 예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 가운데 항상 구속적인 나눔의 모체로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부활하셔서 첫열매되신 새 형상의 결합의 모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제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