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역사서 설교원고

이 땅에 성령의 불길이(왕상18장30절~40절)

주 바나바 2023. 8. 11. 10:21

이 땅에 성령의 불길이(왕상18장30절~40절)

 

목사 주태근

 

 

광야의 오아시스 : 이스라엘

한국에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있었다면 미국에서는 이보다 1년 앞서 아주사 대부흥이 있었습니다. 1906년 아주사 거리 312 번지의 한 허름한 창고 안에서 오순절 신앙회복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신앙의 핍박을 피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4월9일 무명의 흑인 노예 가문 출신인 목사 윌리엄 시무어 (William Joseph Seymour)가 예배를 인도하고, 10명도 채 안 되는 성도들이 국가와 인종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기도하던 이 집회에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아주사 거리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기도하며 찬양하던 이들은 은사를 체험하며 심령이 변화됐고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주님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 용서, 성화, 성령세례, 그리고 신유를 갈구하는 구도자들을 위해 강단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단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선포되었고 성령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여 사람들이 고꾸라졌습니다. 집회장에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전 도시가 요동쳤습니다. 이것이 아주사 부흥의 한 모습입니다. 아주사 거리에서 흘러나온 성령의 불길은 곧 수천명이 부흥회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3년 동안 매일 부흥회가 일어났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던 작은 사람들이 부흥의 불씨가 되어, 20세기 초의 그 유명한 아주사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아주사 부흥은 근대 오순절 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순절 운동은 오늘날처럼 수많은 나라로 확산되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 신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지는 100년 전 아주사 거리 교회에서 불붙었던 ‘성령 운동’을 이같이 회고 했습니다“1906년 미국 캘리포니아 지진이 일어났던 것처럼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기독교계를 바꿔 놓은 다른 종류의 지진이 일어났다.” 아주사 부흥은 체험적 신앙,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영적으로 굶주린 수많은 영혼들에게 대단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 부흥은 노르웨이 감리교 목사 바렛을 통해 노르웨이로 성령의 불길이 옮겨져 유럽에도 오순절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아주사 부흥은 전광석화처럼 주변으로, 다시 미전역으로, 그리고 미국을 넘어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로 확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 불은 거룩한 불입니다. 죄악과 정욕의 불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불입니다. 그 불이 붙어야 죄악을 이깁니다. 그 불이 붙어야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됩니다. 그 불이 붙어야 축복의 인생이 됩니다. 그 불이 붙어야 부흥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불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여 사람의 심령을 타게 했을 때 120문도의 적은 숫자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교회를 확산하는 생명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들이 들어가는 지역 마을마다 복음을 전파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든든하게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불길이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세계로 확산 되었습니다.

 

조선 땅에도 1885년 개신교가 들어온 이래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역사의 어두움의 시대에 하나님은 1907년 평양에 불을 던져 주셨습니다. 1907년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의 회개로 시작된 말씀 집회는 통회와 자복, 합심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한 달 뒤인 1907년 2월 10일 남산현교회에 모인 감리교의 부흥회에 2,000명이 모여 회개하며 자복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각각 간증을 하였습니다. 한 주간 더 연장된 이 부흥의 역사로 학교는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시장의 상인들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불이 심령에 떨어지고, 교회에 떨어지고, 평양에 떨어졌을 때 이 불은 전국으로 옮겨 붙었고, 1919년 민족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저력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불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역시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부흥의 불을 다시 한 번 더 내리시도록 갈망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죄악의 시대입니다. 어두운 영들이 판을 치고 생명을 팔아버리는 시대입니다. 학교 교육이 무너져서 가정의 공동체가 해체되므로 청소년들이 신음하고 컴퓨터 중독, 게임 중독, 술과 마약, 알코올 중독, 음란과 사치, 방탕이 판을 치는 패역의 시대입니다.

 

교회마저도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성직자, 교회 지도자들도 길을 잃어버리고, 다 같이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표류하는 시대, 겉만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만 기승을 부리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불이 더욱 임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이시기에, 우리에게 성령님의 불을 더욱 강하게 부어주실 것이다.

 

오늘 본문에 선지자 엘리야가 고군분투하는 갈멜산 위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드러내시려 태우는 불을 내려주시듯 믿음의 부흥, 신앙의 부흥을 위해 불을 주실 것입니다. Again 1907을 사모하는 우리는 “이 땅에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불로써 응답하시는 역사는 바로 열왕기상18:30의 말씀대로 단을 수축하므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과정입니다. 불은 바로 회복된 단 위에 임한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백성을 모아 놓고 단을 수축하는데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라 말하였습니다.

 

북왕국 출신인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남왕국 유다를 상징하는 유다와 베냐민의 돌도 취하였습니다. 분단의 벽, 정치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 화해와 일치, 연합의 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바로 벽이 없는 용서의 단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단은 화해가 있는 단입니다.

 

용서는 예배를 성공시키는 열쇠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입니다. 용서는 곧 부흥의 시작입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11:25 에“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예물을 드리려거든 먼저 사과해야합니다. 용서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본문 열왕기상18:32을 보면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여기가 예배의 단이라는 구별의 표시입니다. 예배의 단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보호하는 울타리 표시입니다.

 

열왕기상18:33을 보면 “또 나무는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제물과 제물을 사르는 장작, 그것은 예배의 중심입니다. 예배의 본질 중의 하나가 제단 위에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불로 임하는 단은 단을 수축하되 예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제물과 장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간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세이레특별새벽기도부흥회에 불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물과 장작을 준비하여 예배의 단을 쌓는 주인공이 됩시다. 구약시대의 제물과 장작은 신약시대의 회개의 믿음이요 헌신의 마음입니다.

 

회개의 믿음과 구별된 우리의 헌신이 불이 붙는 불쏘시개가 되어 구별된 단에 올려 질 때 회복과 부흥의 불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회개가 없고 헌신의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형식입니다.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불을 원하지만 회개와 헌신이 없으면 재물 없는 예배일뿐입니다.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게 하였습니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합니다. 모두 세 번을 명령하였으니 12통의 물을 부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 가운데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 구경꾼처럼 갈멜산에 있었지만 12통의 물을 붓는 일에 나선 무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3년 6개월간의 가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 그런데도 12통의 물을 제단 위에 붓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마치 내 혈관 속에 있는 피를 쏟아 붓는 것과도 같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물 붓기가 있으므로 단이 정결케 되었습니다.

 

송아지의 각을 뜨느라 더러워지고 어지럽혀진 단과 단 주변을 정리하는 방법은 물로 씻어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단은 질서가 잡히고 더러운 것은 씻겨 도랑에 채워졌습니다. 단은 깨끗해야 합니다. 순전함과 거룩함으로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비록 장작과 제물과 돌과 흙이 씻어 내리는 물로 젖었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도 남습니다. 젖은 장작, 젖은 돌도 태우므로 하나님은 더욱 큰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는 단 위에 물을 부어 정결하게 하듯 우리의 마음의 단이 눈물로, 보혈로 정돈되어 깨끗하고 청결하고 순전하게 정화되도록 준비합시다. 거기에 불이 임합니다.

 

본문 열왕기상18:36에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하였고, 열왕기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단이 수축되자. 그 제단에 나아간 엘리야는 기도의 단, 부르짖는 단을 쌓았습니다.

 

그 기도 내용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내 가족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불로 응답 받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 자신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으로 족한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이런 기도가 있을 때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본래 기도는 성령의 불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누가복음11:13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으니, 성령님은 기도로 받고, 기도는 성령님의 약속으로 인해 더욱 간절하게 됩니다.

 

매일 매일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라는 분은 20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단을 쌓을 때 인디언들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불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숲에서 기도의 단을 쌓은 그는 육체의 질병을 돌아보지 않고 뜨겁게 사역하였습니다.

 

29세의 나이에 절명한 그의 기도 일기는 훗날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이것을 읽은 사람들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붙였습니다. 기도의 사람의 글만 읽어도 뜨거운 불이 임하였으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의 단을 쌓으면 누구나 불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불이 내려와야 합니다.

 

불이 오면 부흥이 시작되고 그 부흥은 원수 마귀 대적자를 물리치는 승리의 삶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 부흥은 축복의 비를 내리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뜨겁게 기도합시다. 20세기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가 말하길 “부흥의 열쇠는 세 가지입니다. 그 첫째와 둘째는 기도요, 그리고 마지막 셋째도 기도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절대적입니다.

 

1907년의 부흥은 기도의 단을 쌓으므로 불이 점화되었습니다. 금번 Again 1907을 갈망하는 “부흥이여, 다시 오라!”의 새벽부흥집회는 기도의 함성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합시다.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서대문구 연희동의 부흥으로, 연희동의 부흥이 이 나라의 제주 한라를 넘어 갈멜산까지, 열방 족속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도록 불을 구합시다.

 

위로부터 불이 내리는 응답,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기 위해 모입시다. 제단 중심으로 달려 나오고, 어린이로부터 중학생, 청년과 장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 나옵시다. 모두 다 기대감을 가지고 무너진 제단을 쌓아 올리므로 마음에 불이 붙는 축복을 받길 축원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부흥에 대한 목마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부흥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향해, 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향해 우리 하나님께서 부흥을 기대하고 있음인 줄로 확신합니다. 부흥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김재홍씨 라는 분의 고백입니다. 이 분은 1982년에 감기약 부작용의 약화 사고로 실명을 해서 20년 동안을 실명상태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도 인공각막 이식 수술로 시력이 0.3까지 회복되어 드디어 20년 만에 세상을 보게 되었답니다. 이분이 눈을 뜨고 나서 처음 한 말이 이렇습니다.

 

“20년 만에 본 아내가 얼마나 예쁘던지... ” “아내의 흰 머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빛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난 뒤에 이 분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너무 감격스럽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받았다는 것은 새롭게 영적인 눈을 뜬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열린 심령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할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믿어지지가 않았었지만 이제는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나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인생 자체가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 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니라”(욜2:12-13) 아멘

 

 

 

 

부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