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을 위하여(히11:13~16) : 목사 주태근
귀향을 위하여(히11:13~16)
목사 주태근
《영국의 한 부호가 카나리아를 한 마리 사서 금반지도 끼워 주고 꽃 관도 씌워주면서 18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화재가 일어나 새장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만 카나리아는 자유를 얻어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부호는 매우 슬퍼하며 카나리아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카나리아를 아프리카 키네아 지방에서 발견하여 다시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에 대하여 생각을 해봅니다. 카나리아는 영국에서 아프리카까지 장장 4천 8백km를 날아갔던 것입니다.
그 카나리아는 무려 18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아프리카 고향을 찾아갔을까? 부호는 카나리아의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인해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카나리아를 다시 고향으로 보내 완전히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북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는데, 그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고향에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노인은 캐나다 국적을 가진 한국 교포였습니다.
고향에는 네 형제 자식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주일 후 평양에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때에 목사님은 공교롭게도 같은 비행기 안에서 그 노인을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목사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고향에 갔었습니까?’ ‘갔었습니다.’ ‘자녀들은 만났습니까?’ ‘다 만났습니다.’ ‘모두 평안하셨겠지요?’ ‘그저 그렇게 있습디다.’ 그리고는 잠시 그 노인은 아무 말이 없다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으렵니다.’ ‘왜요?’ ‘산천은 같으나 사람들이 다 변했습니다. 인심이 변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고향 가고 싶은 고향 그러나 고향이 변해 실망스러운 여행이 되어 잊혀지는 고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귀향이란 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겐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고향, 그러면 우리는 으레 내가 태어난 곳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오늘 성경에는 한 곳을 더 말해줍니다. 하나는 ‘나온바 본향’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향입니다. 다른 하나는 ‘더 나은 본향’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본문 16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예비한 성(城)이라고 했습니다.
즉 천국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 야곱 등 여러 족장들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표현해 주는 단어가 바로 본향입니다.
그들은 나온바 본향이 아닌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방랑 아닌 방랑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VIP초청전도운동을 통해서 이미 믿는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 즉 천국을 더 사모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의 VIP들에게는 이 본향을 회복시켜 주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신학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궁극적 관심’입니다. 그는 이 궁극적 관심을 종교라고 했고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지금 현재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궁극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긍극적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본향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영화화되어 미국 ABC TV에 48%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리에 방송되기도 했었습니다. 주인공인 ‘모리’라는 분은 루게릭병에 걸리기까지 브랜다이스대학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루게릭병은 근육이 점점 굳어지다가 나중에는 심장이 멎게 되는데 아직은 특효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퍽 유쾌하게 살아온 ‘모리교수’는 병중에 있으면서도 참으로 밝게 살아가는 강하고 고운 영혼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의 소식을 들은 ‘미치’라고 하는 옛 제자가 문병을 왔고 그 후 화요일마다 그를 찾아와 대화를 나눕니다. 이 책은 모리가 숨질 때까지 화요일마다 그 두 사람이 만나 인생을 주제로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한 사람은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있고 한 사람은 아직 패기만만한 젊은이입니다. 그때 모리가 한 얘기의 대부분은 인생의 궁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동의를 합니다. 대화내용을 보면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게 됩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선전하는 무의미한 것들에 매여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는 것과 나이 들어가는 것, 죽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배우게 됩니다.
그 책 마지막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내 인생을 마무리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왔으나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은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인생은 누구 할 것 없이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귀향을 준비하는 기간인 셈입니다.
황성주 생식으로 유명한 황성주박사가 의대교수로 재직할 때 경험했던 일입니다. 골육통을 앓고 있는 18세 소년 ‘순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순태’의 부모님들은 집사님들이었는데 아들의 이런 상황을 앞에 놓고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황박사는 한 달 동안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다녀와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젊은이를 다시 볼 수 없을 겻 같아서 병실을 찾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구원의 확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느냐?’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데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순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천국 갑니다’라고 또렷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악수를 하고 병실을 나왔는데 그것이 ‘순태’와의 마지막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순태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선생님 순태가 천국 갔어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라고 되물었더니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임종을 지켜보는데 죽은 줄로 알았던 그 아이가 밝은 얼굴로 깨어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엄마아빠 천국이 너무 너무 좋아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요. 이렇게 좋은 곳에 먼저 가니 두 분 신앙생활 잘하고 오세요’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일일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천국을 증언하고 본향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부모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죽을 때 가장 정직한 법입니다. 순태는 사실을 말하고 간 것입니다.
천국을 보았기에 실제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기에 사실을 사실대로 증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곳을 예비하셨습니다. 천국은 우리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바울은 빌1:21-2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처럼 바울에게도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그 마음을 욕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최고의 축복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훗날 그곳에 가보면 왜 그토록 세상에 연연하며 살았는지 미련한 자신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천국에 가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죽은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를 판별할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 어디에 있던 주님이 생각나고 하늘의 일이 내 마음에 그려지고 보여 지고 생각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기록된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본향, 천국을 늘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환상보다 우리 모두가 봐야 할 환상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의 환상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눈만 감으면 천국의 환상이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이 천국을 사모하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동경과 확신을 가지고 매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천국 갈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시시하게 살지 않습니다. 마구잡이로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 부끄럼 없도록 삶을 잘 정돈하며 살아갑니다. 방황할 시간이 없습니다. 슬럼프에 빠질 여유가 없습니다. 남을 의식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내게 주실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순교의 삶, 선교의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천국 가는 것이 유익하지만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은 사명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귀향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람이며 소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십자가를 지게 하시므로 십자가를 우리의 귀향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들은 귀향이 작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귀향할지는 우리의 남은 과제라 하겠습니다. 금의환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귀향을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 너무너무 좋고 아름다운 그곳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미국의 어떤 농부가 교통사고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으니 많이 좋아 졌습니다. 조금만 더 치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부터 점점 더 아프기 시작하더니만,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데 이상하게 사람이 점점 시들시들 해가더니 급기야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그의 침대에서 그가 남긴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는 나의 집은 고된 일과 고독과 외로움뿐, 차라리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 갈 곳이 없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되고 고된 일 뿐이라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지만,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영혼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며,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해와 같은 세상에 살지만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이웃 중에 천국본향으로 갈 준비가 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스스로 그들에게 천국을 얘기해주고 복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들 중에 천국이 있음을 알고 그곳이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귀향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가짜이거나 아니면 그들을 진정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향해 주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VIP의 귀향을 도우라” 귀향을 귀양으로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러나 귀향하지 않으면 영원히 귀양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VIP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온바 본향을 사모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고향으로 삼지 않고, 오직 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최후의 목표인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엇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후4:2, 딤전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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