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살아있는 교회(눅7:11-17)
청년이 살아있는 교회(눅7:11-17)
글-주태근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한 청년이 더위에 지쳐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눈앞에 커다란 냉동실이 나타났습니다. '냉동실은 얼마나 시원할까 !' 청년은 그런 호기심을 물리치지 못하고 냉동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컥하고 냉동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만 밖에서 문이 잠겨 버리고 만 것입니다. 냉동실 안에서는 결코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청년은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소리를 쳐 보았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냉동실에 갇힌 청년은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서를 썼습니다.
“이젠 완전한 절망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죄어온다. 내 몸은 점점 얼음으로 변하고 있다. 조금 후면 꽁꽁 얼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틀 후 냉동실에서 숨진 청년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냉동실은 놀랍게도 작동이 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내온도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섭씨 15도였으며,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싸늘히 식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절망이라는 이름의 독약입니다. 절망과 공포는 썩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두려움에 대한 공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도산 안창호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도 죽는다.”
어떤 청년이 어머니의 무덤에 가서 하루 종일 엎드려 울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갑자기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년은 깜짝 놀라 '내가 언제 노인이 되었나? 내가 젊었을 때는 무엇을 했나? 일생동안 무엇을 했지?'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청년은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깬 청년은 급히 자기 얼굴을 거울에 대고 살펴보았습니다. 아직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그는 그 후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꾼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하고 전심전력하여 어려움을 이겨내 사업을 일으켜 인생을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올만이라는 사람은 청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과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깊은 샘물에서 나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위를 뿌리치는 모험을 뜻한다.”
그렇습니다. 스무 살 청년보다 일흔 살 노인이 더 청춘일 때가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젊은 청년이 꿈도 비전도, 열정도 없이 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늙어 버린 것입니다. 청년은 청년다워야 청년입니다.
더그라스 맥아더 장군은 "청년이란 단순히 젊은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얼굴과 입술이 붉다고 청년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력, 건강한 감정, 생명력에 달린 것이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함을 이기는 자이고 청년이란 모험심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에 공헌한 사람들은 대개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에 인생의 방향을 바르게 정하고 나아갈 길을 따라 정진한 사람들입니다. 계절의 여왕이 오월이라면 인생의 오월과 같은 때는 바로 청년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젊고 신체가 튼튼하다고 하여 무조건 청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청년과 같은 패기와 정열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공을 거둔 인물 400명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중에 66%의 사람들이 나이 육십 대가 되어서 인생 최고의 성공기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나이는 젊은데도 패배감과 절망감, 열등의식에 빠져서 세월을 허송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는 ‘한 청년의 죽음 행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손에 들려 운구 되는 관의 무게보다 행렬의 비통함이 말씀 속에서 보여 집니다. 이 죽은 청년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번쯤 천하를 얻어 보고 싶은 기개도 있었을 것입니다. 청년의 팔과 다리는 세상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강인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절친한 친구의 애타는 심정도 뒤로하고 이 청년의 생명은 아주 간단하게 쓰러져 갔습니다. 그 누구도 생명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죽은 자를 장사지낼 뿐, 그 누구도 이 청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행렬의 슬픔과 절망과 비통함은 온 길가를 뒤덮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외로운 여인의 통곡이 산을 울리고 쏟아지는 눈물이 길을 적셨습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행렬을 멈춰 세우는 또 다른 한 무리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 그 반대편에서, 어쩌면 죽은 청년과 동년배일지도 모르는 30대의 한 청년을 앞세우고 또 다른 한 무리가 오고 있었습니다. 절망을 부수고 힘차게 솟구치는 기쁨과 희망과 환희의 소리가 죽음이 있는 거리 저편, 반대편으로부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슬픔의 곡소리와 기쁨의 찬양소리가 마주친 것입니다. 탄식의 도가니가 소망과 환희의 물결을 만난 것입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절망과 비극의 무리였습니다. 또 한 무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있어서 생명과 부활에 참예한 무리입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너무나 다른 극단의 무리가 나인성 밖 한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때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플러스 전극과 마이너스 전극이 만나면 전기가 통하고 불꽃이 튀듯이 이 첨예한 대립의 길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케 하는 역사가 그 자리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이치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죽음과 육적으로 죽은 죽음입니다. 비록 육신은 죽었으나 영적으로 산 사람, 육신은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산자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새생명이 역사하는 인생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해골 골짜기에 대한 이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스겔이 보니 큰 골짜기에 해골이 가득히 차 있었습니다. 뼈들이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핏기는 그만두고 물기 하나 없었습니다. 살아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누구를 가리켰습니까?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켰습니까? 바벨론 사람들을 가리켰습니까? 애굽 사람들을 가리켰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범죄한 ‘이스라엘 온 족속’을 가리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온 족속을 마른 뼈들과 해골로 보셨습니다. 주경학자 박윤선 목사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모든 인간들’을 가리킨다고 지적했습니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생하지 못한 형식적인 신자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지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온 족속’을 바라보시면서 마른 뼈들과 해골로 보셨고, ‘허물과 죄로 죽은 모든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마른 뼈들과 해골로 보셨고,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중생하지 못한 형식적인 신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마른 뼈들과 해골로 보셨습니다. 아니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는 놀라운 진리는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과 해골을 바라보시면서 그것들을 살리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3). 마른 뼈들을 살리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를 원하는 소원과 질문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소원과 질문을 에스겔은 품지도 못했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과 해골이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죽었던 몸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물론이고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기대도 할 수도 없었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요사이도 죽어가던 영혼들이 새로 살아나서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907년의 부흥이 다시 오기를 희망하면서 명성교회, 사랑의 교회, 온누리교회 등등 대교회 새벽기도회에 적게는 1만명에서 5만명까지 매일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작은교회라고 할지라도 새벽에 모여서 회개하며 기도하는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흥은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흥은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살리라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37:6).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또한 사람들을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성도들과 깊이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겔37:7).
성경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고 성도들과 사랑으로 교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죽은 자들이 살아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사람들을 깊이 만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부흥은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고 죽어가는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를 두 가지 방편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교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시지는 않습니다. 의학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학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시지도 않습니다. 정치, 사회 개혁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영을 통해서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분부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겔37:7).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서 생기를 향하여 대언했습니다.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마른 뼈들과 해골들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가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마른 뼈들과 해골들이 살아났습니다. 큰 군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성령님을 모신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 개인의 소원과 기다림에 그치지 않고 한국 교회 전체의 소원과 기다림으로 이어집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제 3의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모습이 마른 뼈들의 모습과 비슷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죽은 자의 모습이거나 죽어가는 자의 모습과 비슷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지금 새로운 부흥이 필요합니다. 새로 살아나는 일이 필요합니다. 기도가 살아나야 하고, 회개가 살아나야 하고, 눈물이 살아나야 하고, 용서가 살아나야 하고, 사랑이 살아나야 하고, 온유와 겸손이 살아나야 하고, 검소한 삶이 살아나야 하고, 거룩한 삶이 살아나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1814년 덴마크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한 때는 덴마크의 국왕이 노르웨이 스웨덴을 지배할 정도로 강대하였지만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나라의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국고는 바닥이 났고, 국민은 패전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도무지 미래의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문자 그대로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룬트비’란 목사가 일어나 대각성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덴마크의 청년들이여 일어나라! 덴마크의 국민들이여 깨어나라!”라고 목이 터지라고 외쳤습니다. 새생명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룬트비 목사가 일어나라! 깨어나라! 고 외친 것은 벤치에서 일어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잠자리에서 깨어나란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룬트비 목사의 각성운동의 전제가 이러합니다. 밖에서 잃은 땅을 안에서 찾자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 이웃을 사랑하자. 셋째, 땅을 사랑하자는 소위 “삼애(三愛)운동”을 전제로 한 도덕적 각성운동이요, 영적인 각성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자는 영적각성이었습니다. 이런 각성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은 덴마크 국민은 마침내 새 민족, 새 나라로 변모되었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정직하고 잘 사는 나라, 사회복지제도가 잘 된 나라 중 하나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새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복된 삶에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죽어 관속에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해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청년의 심장에는 피가 끓고, 청년의 가슴에는 활화산 같이 폭발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또한 청년에게는 드높은 이상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눈빛은 살아있고, 심장이 약동하며,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는 패기가 있습니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세계와 민족들이 삽니다. 죽음의 행렬를 멈추고 생명의 행렬인 주님께로 눈길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 임을 모르는 불상한 이웃들에게 생명의 행렬로 방향을 전환하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