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요6:35~40)
우리는 교회력으로 대림절 기간을 맞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이며 성탄절 전 4주간을 말하며,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절기상의 기간은 4주간이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을 자기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들이 선지자 이사야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본다면 그 7백여 년을 기다린 셈이 됩니다.
아브라함부터 그 기점을 잡으면 무려 2천 년이나 됩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바벨론 포로기와 연이은 식민기의 불운의 시기를 거치며 더 강렬해졌습니다. 지금도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기록을 보면 아직도 감람산 쪽에 수많은 무덤과 묘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태인들은 죽으면 이곳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곳은 성전의 동쪽으로 메시아가 이 동쪽 문을 통하여 오시기 때문에 가장 먼저 부활하기 위해서 그곳에 무덤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이 성전 동쪽 문은 금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 문은 두꺼운 돌로 막혀 있습니다. 중세에 이슬람교도들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와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았다고 합니다.
저들은 이렇게 어리석은 싸움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성탄절에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음을 믿고, 그를 영접하고 구원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또한 여전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영광중에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예배의 마지막 기원은 “마라나타” 곧 “주여 오시옵소서!”였습니다.
이렇게 대림절은 2천 년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앞으로 언젠가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이 대림절 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듯이 여러분 역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에게 메시아가 찾아 오셨듯이,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반드시 찾아와 주셔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절 절기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고 싶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과는 전혀 다른 양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땅의 양식은 썩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일용할 음식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자꾸 먹어도 다시 배가 고프고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양식이 있습니다. 요6장27절입니다. 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 가지 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매일 먹는 ‘썩는 양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매일 먹어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것을 ‘썩는 양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매일 먹는 양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양식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일차적인 관심은 먹이입니다. 종족 번식과 생존을 위한 먹이 사냥이 전부입니다.
둘째,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음식이 많아도 먹은 것 외에는 소화를 시키지 못합니다.
셋째,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창3:17~19절에서 말합니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러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우리는 땀을 흘리며 수고한 만큼 먹을 양식을 얻을 수 있으며 거저 얻는 먹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먹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결국 전쟁은 ‘먹이 쟁탈’입니다. 사람들이 식탁을 꽃으로 장식하고 멋진 대화를 나누며 고상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지만 결국 관심은 먹는 것에 있습니다. 주린 창자를 만족시키려는 게 ‘먹이’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양식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한 끼라도 양식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양식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충고하십니다. 우리가 ‘먹이’를 위해 산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또 다른 양식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어본 적이 없지만 구약에 ‘만나’라는 양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만나는 아주 독특하고 놀라운 음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 여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서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보냅니다.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으며 잠잘 데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화려한 문명 아래 있지만 역시 광야 생활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독특한 기적의 양식 ‘만나’로 이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만나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일하고 노력해 얻은 결과이지만 만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음식입니다.
둘, 매일 만나를 주셨습니다. 귀찮아도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만나’도 매일 주셨습니다.
셋, 우리가 일용하는 양식과 성격이 똑같습니다. 만나를 먹는다고 영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그것을 먹어도 사람들은 영생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만나는 영원한 생명의 떡을 예표 하는 양식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주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썩는 양식과 만나에 이어 세 번째 양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33, 34절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떡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식은 만나와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떡을 달라고 주님께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도 주사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하고 간청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의 말과 똑같습니다. 군중들도 “그런 떡을 항상 주십시오”하고 요청합니다. 35절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이나 만나도 아닌 진짜 영생하게 하는 양식이 바로 나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생명"을 표현할 때에 두 가지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비오스>와 <조에>라는 단어입니다. <비오스>라는 단어는 육체적 생명을 뜻합니다. 심장의 맥박이 뛰는 동안 유지되는 우리의 목숨, 즉 육체적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간혹 성도들에게서 육체적 생명에 대해서 경시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육체적 생명도 소중합니다. 이 생명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체적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 육적 생명을 통하여 이 땅에서 주의 뜻을 이루며 살게 됩니다.
반면 <조에>는 영적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만 36번 이상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적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육체적 생명, 영적 생명이라고 말 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육체의 생명이 따로 있고 영혼의 생명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조에>는 어떤 의미입니까? 영적생명으로서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태를 <조에>라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비오스>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조에>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생명, 이것보다 귀한 것은 천하에 없습니다.
온 천하를 다 소유하고, 이 땅에서 100년을 산다고 해도 그의 생명이 조에가 없는 비오스 뿐의 삶이라면 그 삶은 불쌍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이 영적 생명을 알지 못하기에 심장이 뛰고 있고, 육체적 목숨이 유지되는 것만으로 전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본문35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이 생명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요한복음 6장은 이 문제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35절의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의 의미가 54절에 가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믿음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나, 입으로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대단히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떻게 먹는 것입니까? 떡을 먹으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대속의 주님으로 영접하라 입니다. 왜! 예수님은 믿음을 자기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이유는 예수님께서 얼마 후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고 피를 흘려야 할 운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은 우리들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앞두고 계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그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대속의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과 교제의 삶을 살라 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사용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앞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 떡은 주식입니다. 나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주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과의 중단 없는 교제를 말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 중단 없는 교제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한 지식적 동의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깊은 사귐이 믿음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를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선행도, 그 어떤 고상한 인격의 삶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 얻는 자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난 날 가톨릭의 어느 추기경과 도올 김용옥씨가 기독교와 유교의 인간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추기경께서 아주 부드럽게 프로그램의 주도권을 쥐고 유교적 인간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해서 잘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강의 후반에 그만 아주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추기경이 말하기를 “불교인이거나 유교인이거나 어떤 종교,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의 삶을 살면, 즉 사람들을 사랑하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 얻는 삶을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용옥씨는 추기경의 말씀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선언이라고 격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추기경을 지낸 분이, 아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분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사상입니다. 모든 종교는 모두 선하니 어느 종교든 믿으면 구원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길만 다를 뿐 종착역은 다 같다는 종교철학적사고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단 사설과 감언이설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를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선행도, 그 어떤 고상한 인격의 삶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엡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 얻는 자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종교로 선행으로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복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구원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로도 안 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생명의 떡이요, 우리위해 살과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심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러한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영생의 길이 없습니다.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죄를 용서 받을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독선입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원래 진리는 타협이 없습니다.
아니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타협의 여지가 있다면 더 이상의 절대 진리일 수 없습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지키며 주장하고 믿는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절 절기에 다른 곳에서 구원의 진리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이미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떡을 먹어야 영생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고 다시 기억하며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심을 재삼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대림절 절기에 메시아로 오신 주님과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이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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