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구약의 말씀 - 요엘 2:28-30, 서신서 - 에베소서 5:16-18, 복음서 - 사도행전 2장 42절 - 47절
주제 : 칭송 받는 초대교회 제목 : 성령 충만한 공동체
설교 : 주 바나바(분석설교 실례)
▶ 설교의 목적(10줄 정도)
선포적 설교 :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생애와 교훈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선포하는 설교 교훈적 설교 : 성경의 진리와 교리, 신학을 담아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둔 설교 치유적 설교 : 상처받은 영혼과 삶의 아픔을 싸매 주는 목양을 목적으로 하 는 설교 예언적 설교 :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곁길로 가는 사회와 개인을 바 르게 인도하기 위한 설교 |
현대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바로 감당치 못하기에 세상으로부터 평판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교회다운 교회는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이다.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했던 초대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송 받는 교회가 되었다. 현대교회가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었다.
병든 교회가 치료되는 길은 초대교회처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제시하는 길은 오늘의 설교자들의 의무이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하여 칭송 받는 공동체가 되는 성경적인 교회모습을 되찾는 길을 찾아 간다.
▶ 명제적 진술(10줄 이내)
현대교회는 외적인 모습은 화려할지 몰라도 내적인 교회모습은 병든 교회가 아닐 수 없다. 겉과 속이 다른 교회 모습이다.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교회가 한국교회이다. 성경공부, 세미나, 부흥회, 수련회, 기도회, 구역활동, 심방 등 한 주간의 목회단위 속에 거의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교회다운 교회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는 소수에 볼과하다. 비성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국교회에 성경적각성을 촉구하면서 초대교회의 성령 받은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다. 또한 외모와 수적인 성장에만 집착하는 한국교회에 내적인 변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촉구함으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참교회는 오직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로 이루어짐을 발견한다.
서 론〈① 본문의 context 접근 ② 인간적인 경험 ③ 문제의 제기 ④ 뉴스의 활용 ⑤ 인용구의 사용 ⑥ 읽은 책의 활용 ⑦ 계절의 언급 ⑧ 유머의 사용〉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다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교회도 때로는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인가 ? 교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 어떤 교회가 올바른 교회인가 ?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들이 흩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혼란이 생깁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 곳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입니다. 그곳에 가서 그 교회를 보고, 그 교회를 통하여 오늘 우리의 교회 현실을 진단해 보아야 교회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그 무엇이 초대교회를 칭송 받는 교회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 그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하나같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는 기독교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본문 접근〈중심단어의 해석, 당시대의 정황, 저자와 수신자, 표현의 장르, 자신과 회중의 언어로 재번역〉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들려주신 귀한 말씀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공동 사회, 운명과 생활을 같이하는 몸이라고 풀이를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것이 하나가 되고 생명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 같이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때부터 공동체로 지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전체가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로 구성된 주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나와 한 몸을 이루는 사람, 나와 함께 영원한 사귐을 나누는 사람, 하나님 나라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 되라" 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자들은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의 사건을 체험한 후에 비로소 그들은 진짜 주님과 한 몸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세상의 원리가 아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의 원리, 영적인 원리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초대교회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칭송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알기 쉽게 우리의 말로 다시 한번 옮겨서 경청하십시다.
본문의 재경청(설교자와 회중의 현대 언어로 사역함)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친교하며 떡을 나누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자신의 재산과 재물을 정리하여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 성도의 집마다 서로 빵을 나누며, 음식을 먹으면서 기뻐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어, 날마다 초대교회는 성도들로 가득히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주제의 부상(해당 주제를 5회 이상 언급)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주님의 뜻인 동시에 기독자 모두의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은 곧 주님의 뜻입니다.
주제에 대한 정의(What)
(3회 정도의 부정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사전적인 정의, 문학, 신학, 철학 등에서의 정의를 2개정도 소개한 후 마지막에 성경적인 정의 제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경험했다는 표현으로 예배 후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어떤 순간적 감동을 통하여 느껴지는 일시적 체험의 세계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감정과 흥분의 상태가 극도로 어떤 황홀경 상태에 이르는 엑시타시의 경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남이 모르는 언어로 ‘다다다…’ 말하는 그러한 상태 역시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합니다.
국어 사전에서 충만 이란, 어떤 한정된 곳에 가득하게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충만 이란 용어의 헬라어 "플레로오마"는 "채우다", "성취하다" 또는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를 만물에 충만하신 자라고 표현 했습니다. 여기서 충만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충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충만 입니다.
주제의 필요성(Why)(부정적인 사례를 통해 절박한 동기를 유발시켜 질문을 유도)
나이아가라 폭포는 1분에 약 50만 톤의 물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1948년 3월 29일에 이 폭포가 갑자기 멈춘 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모두가 지구의 종말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멈추었느냐 하면 강추위가 오대호의 하나인 어리호의 주변을 빙판으로 만든데다 또 큰 얼음 덩어리가 물을 타고 내려오다 나이아가라 강줄기의 입구를 30시간동안 막아버린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차가운 무관심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줄기를 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냉랭한 사람, 그런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에는 성령 충만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제의 실천방안(How)(본문에서 주안점을 가져옴 ① 선포 ② 해석 ③ 적용 ④ 예화)
그러면 어떠한 모습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세상으로부터 칭송 받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교회다운 공동체의 참된 모습을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안점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공동체가 성령받은 공동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포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 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해석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교회로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저희가 …… 서로 교제하며 ……전혀 힘 쓰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공동생활 즉 ‘코이노니아’를 말해 줍니다. ‘코이노니아’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함께 나누어 받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적극적 체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동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1서 1장 3절에 기록한 것과 같이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간의 영적 교통이 분명해지므로 영적 만족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함께 나누어주는 것 즉 우리가 받는 것 뿐 아니라,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교제는 함께 나눔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함으로 함께 나누어주는 사랑의 교제를 하였습니다.
적용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자들과 더불어 함께 나누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여러 교우들의 사정을 살펴서 자기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눔으로서 성도의 사랑을 깊게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니 바로 이런 사랑을 가능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경제 형태가 소유공동체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도, 형제를 위해 기꺼이 소유를 내놓는 자발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움켜지기 위해 살아가는 경쟁사회입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사회입니다. 이런 습관과 자세가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들은 나의 존재와 이웃의 존재를 바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나눔을 통하여 함께 사랑하는 삶이 가능해 집니다.
예화
오래 전 예루살렘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함께 모여 사는 유대교의 분파인 ‘쿰란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들 공동체 일원들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그 공동체의 내규인 ‘다메섹 규칙’에 따르면 모든 언약 회원들은 어디에 살고 있든지 ‘가난한자와 궁핍한자와 이방인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수도원 공동체에 입문하는 자들은 훨씬 더 엄격한 규율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의 규칙을 보면, ‘그의 재산과 소득은 회중의 회계원에게 양도해야 한다. ……그의 재산은 합병될 것이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예루살렘의 원시교회가 채택했던 관습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라고 성경학자들은 교훈합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재물을 나누면서 형제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면서 살았습니다.
주안점
둘째로,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생명력이 있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선포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 45-47)”
해석
본문 42절에 “저희가 ……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했습니다. 즉 그들의 교제는 서로를 돌보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표현되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성만찬 예식이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의 기도는 의식으로서 예배의 한 행위임을 봅니다. 초대교회 예배에는 균형이 잡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가 균형이 있었음은,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이 둘 다 공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을 것이며,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좀더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모임들을 가짐으로서 성전의 예배를 보충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교회에 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을 다하여 찬양하며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넘치면서도 경건했습니다.
적용
공적 예배가 엄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과 활기가 없는 예배는 예배의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라면 예배를 기쁘게 드려야 합니다. 또한 본문 43절에 “사람마다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경건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기쁘게 경외하는 축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란 과연 무엇입니까 ? 예배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모든 예배자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발생된 사건입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신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응답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온 회중이 주를 예배할 때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배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생명력 있는 예배는 응답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적극적으로 예배합니다.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참회하고, 봉헌하며, 간구하며, 온 몸으로,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예배는 생명이요 그 생명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숨결이 약동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를 모일 때마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할 때에 이러한 예배가 가능해 집니다.
예화
아직도 우리 머리에서 기억이 생생한 끔찍한 사건이 있습니다. 지존파라는 무자비한 살인자들의 사건입니다. 너무 끔찍한 사건이기에 기억조차 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놀라운 복음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광대 무변한 사랑이 그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한 성도의 간절한 권고와 전도로 그들 모두가 죽기 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준 그분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주안에서 믿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 동안 나는 세상이 너무 악하고 추해서 살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했고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살다보니 이렇게 무서운 살인마가 되어서 내일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아쉽고 후회스럽습니다.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아쉽고 후회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바로 우리 집 근처였는데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단 하루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하루종일 교회 가서 예배하며 봉사하며 보내다가 죽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습니다. 그게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다시는 나와 같이 후회하는 사람 없도록 이 말 꼭 좀 전해 주십시오."하는 간곡한 사연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에 가서 예배드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예배생활이 생명처럼 소중함을 우리에게 고백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의 참된 의미와 가치, 보람과 행복이 참된 예배생활에 있음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성령이 충만하면 예배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안점
셋째로, 사도적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임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포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해석
초대교회는 함께 나누고, 예배하는 일에 전념한 나머지 결코 증거 하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선교하는 교회를 만들어 내시는 선교하는 영이시기에 반드시 사역하는 교회로 만들어 가십니다. 본문 47절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기독교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잘 감당했기에 맺혀진 열매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에 집중한 목회형태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교회의 성장이 현 수준에서 멈추고 정체 현상을 보이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제자화 훈련에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평가합니다. 제자훈련은 듣고 말하는 훈련으로 문자 그대로 제자를 만드는 훈련입니다. 이러한 제자훈련의 결과 한국교회 성도들은 듣기를 매우 좋아하고 말도 잘하는 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배우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성도들이 많아 졌습니다. 이재 한국교회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배우는 제자’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인 사도가 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적용
성경이 말하는 제자는 문자 그대로 ‘배우는 자’입니다. 반면에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헬라 세계에서는 ‘전권대사’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을 택해서 가르치셨고 그 가운데 열 둘을 따로 택하여 보내셨습니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제외한 제자들은 배우기만 하는 자였고 보냄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3년이나 가르쳤어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지만, 성령강림 후에 그들은 굉장히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 사역은 바로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 사도들의 몫 이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훈련을 받은 제자에서 능력 있는 사도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많아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속히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열심히 배울 뿐만 아니라, 교회 밖으로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도적 교회가 되었기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주께서 ……… 더하게 하시니라.”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의 사도적 삶을 기반으로 교회부흥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날마다 사람들을 더하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일시적 흥분 상태의 사역이 아닌 날마다의 사역 감당입니다. 그들의 복음 전파의 열정과 헌신은 간헐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예화
미얀마에서 선교사로 눈부신 활약을 한 저드슨 선교사는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어느 큰 교회의 부목사로 초빙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부러움과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해외 선교에 비전이 있었던 그는 그 초빙을 거절하고, 불교의 나라인 미얀마에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그의 결정을 만류하고 걱정스런 조언을 했지만, 저드슨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선교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명의 세례 교인을 얻는데 걸린 시간은 6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 불교의 나라 버마에는 6만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으며, 전세계 선교사의 마음속에 비전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인 세계선교의 비전을 이루는 열정으로 사도적 삶을 살아갑니다. 복음전파와 세계선교는 성도들이 감당해야할 사명이요 본분입니다.
주제의 실천결과(What then)
(주제대로 행했을 때 생겨지는 긍정적인 결과 사례제시)
유명한 설교가 D. L.무디 선생은 한 집회에서 물 잔을 청중들에게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 잔에서 어떻게 공기를 없앨 수 있겠읍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펌프로 공기를 빨아들이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에 무디선생은 "그렇다면 그건 진공을 이루어야 하고 잔을 부수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많은 틀린 의견들이 제시되어진 후에 무디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물주전자를 집어 들고 그 잔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자, 이제는 공기가 모두 제거 되었읍니다."하고 증명했습니다.
물 잔에서 공기를 억지로 빼려고 하면 잔은 깨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에서 죄를 강제로 추방시키고자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억지로 깨끗하게 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있게 됩니다. 즉 구원의 기쁨보다는 죄의식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혹은 마음속에서 죄를 없이 하려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우리를 채워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들 속에 충만하게 될 때 우리들 속에 있던 더러운 내용물과 침전물들은 자연히 쫓겨나게 됩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외면보다 내면의 모습이 더욱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교회를 교회 되게, 성도를 성도 되게 합니다.
결 론(설교 요점의 반복, 경이적이고 충격적인 표현, 격려의 형식, 시의 내용, 축복의 형태, 명령적이고 교훈적인 형식, 본문을 비롯한 성구의 낭독)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참된 교회상을 갖게 됩니다. 참된 교회상을 회복하는 길이 성도의 올바른 영적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초대교회처럼 변화되길 원하십니까? 성령 충만한 은혜를 사모합시다. 우리 모두 다 성령 충만할 때에 세상으로부터 칭송 받는 교회가 될 뿐 아니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되는 약속의 말씀을 허락하십니다.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도 내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당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28-32)”.
'설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소교회 영상예배와 설교의 장애요인 (0) | 2019.10.15 |
---|---|
분석설교란 무엇인가? (0) | 2019.10.09 |
강해설교란 무엇인가? (0) | 2019.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