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록(7) : 교수 - 주태근
Ⅲ. 설교자와 설교사역
“그대는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그 일을 계속하며 끝까지 참고 … ”(딤후 4:2)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대명령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누가 무엇이라 말하건 제일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입으로 말하는 방법이다.
분명히 설교자의 첫 번째 사명은 입으로 말하는 데 있다. 그러나 입만 있으면 그 사명을 다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말하는 사람의 신앙과 지식과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설교의 좋고 나쁨은 근본에서는 텍스트의 여하, 방법의 여하가 아니고 설교자 자신의 문제다. 성공의 비결은 그 인격의 문제다. 그리고 신앙의 문제다. 설교자 자신의 내적인 경험 없이 그리스도는 설명되지 않는다. 구원의 경험 없이는 구원은 전해지지 않는다.
1. 설교자로서 자격
목사의 첫째 사명과 역할은 설교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는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서 전하여지기 때문에 설교와 설교자는 따로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다. 목사의 기능이 설교인 한에 있어서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한평생 설교자의 삶이란 의미이다. 물론 목사의 역할 중에는 교육과 상담, 심방도 있으나 그것도 엄밀히 따져본다면 설교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1) 누가 설교자가 되는 가?
설교는 누가 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답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설교는 말씀을 잘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설교는 반드시 장립(목사 안수) 받은 목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설교가 평신도의 사역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 이유는 설교의 일차적인 작업은 신학적 작업이요, 해석학적 작업이어서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몇 가지 체험담 정도로 이해하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을 읽고 간증을 하는 것은 설교와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교육과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아서 복음의 열정과 성경해석학의 본질을 아는 전문가, 교회가 인정하는 노회에서 정상적으로 장립을 받은 목사여야 한다. 물론 노회에서 장립을 받는 것이 영적 지도자가 되는 조건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러한 절차가 있는 것은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선택된 사람에 의한 선포이다. 설교자 자신은 메시지의 근원은 아니다. 메시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설교자는 메시지의 통로이다. 메시지는 인격체를 통하여 움직인다. 따라서 설교자는 전달자일뿐이다. 설교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여지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좋은 통로가 되어야 한다. 만약 설교자가 좋은 그릇이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도리어 메시지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쉽다.
2) 설교자의 자격 요건
설교자의 자격은 무엇이냐? 그 사람이 학력 있는 사람이든지, 혹은 무식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건강한 자든, 병든 자든 또는 불구자이거나 혹은 말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적극적인 성격이든지 혹은 소극적이고 조용한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소명은 그런 일에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어떤 것은 플러스되고 어떤 것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나, 어느 것이나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소명감 즉 소명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첫 번째로 물어봐야 할 것은 소명(Calling)의 문제이다. 물론 소명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그 소명은 반드시 목사에게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목사 또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는 불타는 소명이 요구된다. 소명감이 없는 사람은 목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설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람이 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1:1)고 고백하였다. 소명은 내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그리고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총의 사역이다. 그것은 출신성분의 높고 낮음이나 학문의 유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라는 바울의 메시지는 설교자는 곧 소명자여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복음운동은 바로 생명운동이며 진리운동이기 때문에 소명을 첫 번째로 문제 삼게 된다. 설교자의 생명은 소명의식에서 출발한다.
둘째로, 살아있는 기독교체험이 있어야한다. 목사가 되는 요건으로써 신학공부를 마치고 교회가 요구하는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목사안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직업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적인 절차만을 통해서 설교자가 된다면 복음운동은 생명 없는 화석이 될 수밖에 없다. 설교자는 우선 자신이 구원의 확신과 뜨거움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체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영적 체험이 없이 설교자가 되는 것은 그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그 이유는 생명운동은 살아있는 체험을 가진 그릇인 설교자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용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기차가 가려면 레일도 필요하겠지만 불도 있어야하는 이치와 같다. 동력이 없는 객차는 수백대가 있어도 갈 수 없다. 기관차가 있을 때 기차는 움직인다.
셋째는 신학의 수립과 끊임없는 연구 활동이다. 설교는 첫걸음부터 신학적 작업, 성경해석학적 작업이 기초가 되어야하느니 만큼, 신학의 수립이 안 된 사람은 설교자로서 위험하다. 설교자는 우선 자신이 성경해석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설교자가 아무리 자기는 신학과 무관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설교에는 반드시 설교자의 신학이 나타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신학수업을 확실히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바른 진리 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설교자는 신학 연구를,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자기를 개방하고 연구ㆍ개발하는 연장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넷째는 천부적 재능의 개발이다. 효과적인 설교자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개발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또 각자는 나름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부적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천부적 재능의 개발은 모방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장점을 발견해서 육성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설교자는 언제라도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병약한 사람을 통해서도 그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일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대부부의 경우 건강한 사람이어야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육체적 균형은 정신적 정확성과 생동에 유익을 준다. 좋은 건강은 좋은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낙관적인 인생관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열정과 신학적 지식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로 설교자는 성령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성령의 도움 없이 목회하는 것은 목사에게 욕이 된다. 설교자에게 필수적인 것은 성령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이다. 성령은 설교자의 삶 전체를 도우고 인도하신다. 성령은 성경연구를 인도하고 본문과 자료의 선택 및 준비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설교에 능력을 주시고 영적인 승리를 주신다. 설교는 설교학이나 설교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설교자의 역동적인 힘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3) 설교는 곧 인격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을 매개로 하여 선포되어진다. 설교는 마치 음악연주에 비교할 수도 있다. 연주에는 적어도 악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악기가 있어야 하고 연주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연주는 악보대로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한편 연주자에게는 연주자로서의 해석이 있고 끊임없는 자기훈련이 있어야 하듯이 설교자도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평소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즉 설교는 설교자의 삶 전체가 준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토요일 몇 시간을 성경과 주석과 펜과 노트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작품이 결코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 전체가 투영되는 작업이다. 설교는 그 설교자의 신앙과 인격과 생활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설교원고를 주고 설교하라고 해도 설교자마다 모두 다른 감화력을 주는 것은 설교는 말이나 글이 아니고 설교자의 인격과 신앙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귀하다는 또 다른 이유는 설교자는 말씀을 맡은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 진리를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가 설교자의 신앙과 인격의 표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설교자 자신의 사상이나 체험 또는 타고난 인품의 표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설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의 말이 성경의 말씀을 정리하여 이뤄지고, 성경의 말씀이 설교자의 말을 통해서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설교란 설교자의 인격에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한 몸이 된다. 즉 하나님은 설교자의 신앙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설교자의 삶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설교자의 인격은 그의 평소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물은 그 자체의 수원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설교도 결국 평소에 그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그 자체이다. 날마다 저급하고 유치한 오락과 세상 연락을 즐기다가 갑자기 설교자로서의 위치에 돌아온다는 것은 이상한일이 아닐 수 없다. 설교자는 주일 하루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일주일 전부 그리고 삶의 전부(Totality of life)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일주일에 하루만 거룩성을 유지하고 나머지 6일은 세속적인 삶과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삶이란 이원론적(Dualistic) 삶이 될 것이다. 설교자의 이런 삶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은연중에 이원론적 인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방치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나무는 열매로서 알듯이 설교자의 메시지는 그 생활로서 알 수가 있다.
5) 설교자의 기질(TEMPERAMENT)
기질에 대하여 제일 먼저 연구를 한 사람은 의학계 시조로 불리는 희랍 사람인 히포크라테스(BC. 460-370)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기질을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 등의 네 가지로 구분을 했다. 이러한 기질이 나타나는 원인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네 가지 체액 성분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네 가지 체액 성분이란 혈액, 흑담즙, 황담즙, 점액을 말한다. 이것은 알기 쉽게 호르몬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팀 라헤이(Tim LaHaye) 도 기질을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로, 다혈질은 인생을 즐길 줄 알며 낙천적이고 사람들을 좋아해서 붙임성이 있고 부드러우며 동정심이 많아서 주위에 기쁨을 준다. 비현실적이고 어수선한 편이며 의지가 약해서 새로운 일을 잘 벌이지만 마무리가 잘 안되고 결심이나 의무를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자기중심적이다. 성서의 인물중에는 구약에서는 야곱, 신약에서는 베드로일 것이다. 다혈질 설교자는 감정에 흐르지 않고 스스로를 냉정히 지닐 주의를 해야 한다. 자기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 종종 탈선할 때가 있다. 항상 문장을 다듬고 말을 정리하는 습관을 기를 필요가 있다.
둘째로,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한 가지에 몰두하여 성공을 이루며 실제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는다. 리더십성향이 강해서 책임자격 인물이 많으며 자신감에 의해 낙천적이다. 성미가 급하여 쉽게 격분하며 목표를 위해 잔인할 수 있다. 즉흥적이고 자부심이 강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성서의 인물 중에서 담즙질은 구약에서는 모세, 사울을 들 수 있고,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다. 담즙질의 설교자는 항상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온유,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다.
셋째로, 우울질은 재능과 감수성이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다. 소수의 친구와 충실하게 지내며, 희생적이어 막후에서 맡은 일을 완수한다. 지나치게 자기진단에 빠져 병이 올 수 있고 쉽사리 마음이 상하거나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비관적이며 우유부단하거나 비판적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성을 내거나 앙심이 깊다. 성서의 인물 중에는 구약에서는 예레미야, 신약에서는 요한과 유다를 들 수 있다. 우울질의 설교자는 성서의 치우치지 않는 해석과 교의의 공평한 연구이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교의까지도 겸손히 배워야 한다. 책을 많이 일고 여러 사람과 교제하고 그리고 겸손하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나 경험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설교에도 날카로움과 함께 따뜻하고 명랑한 내용을 담는 것이 좋다.
넷째로, 점액질은 재치가 있고 믿음직한 사람이며 사려 깊은 충고를 잘하고 실제적이고 효율적이다. 늘 깔끔하며 정돈된 상태를 좋아한다. 느리고 게을러 일을 적게 하고 약을 잘 올리며 이기적이고 완고하다. 은근한 반항자로 인색하며 우유부단하다. 점액질의 성서적 인물은 구약에서는 이삭이고, 신약에서는 안드레나 마태로 볼 수 있다. 점액질 설교자는 조용히 경건하게 말씀을 전하는 일로, 훌륭하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다만 경계할 것은 평범함에 흐르고 매너리즘(mannerism)에 떨어지기 쉽다. 힘써 말씀에 침잠하여 강력한 메시지를 가짐과 동시에 적극적인 기풍을 길러 용기를 가지고 활발한 말과 행동을 하도록 정신을 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개척자는 아니지만 조력자로서 후계자로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설교자는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 그 때 그 사람이 가진 기질, 성격이 직접 많은 사람에게 감화와 영향을 주게 된다. 또 그것이 실제로 설교에도 반영되는 것을 생각하면, 설교자로서 스스로 돌아보고 힘써 그것으로 알맞고 그르침이 없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말씀이 뒤에 가리워지고, 기질, 성격이 전면에 나오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은 결코 말씀의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설교에 개성이 있는 것은 필요하다. 개성이 없는 설교는 주워 온 설교다. 그러나 인간의 기질이 노출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자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이 성격과 기질도 모두 다르지만 그래도 설교자는 그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아서 장점은 개발하고 약점을 수정 보완하는 끊임없는 자기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다혈질인 사람, 어떤 사람은 우울질적인 사람, 어떤 사람은 담즙질적인 사람, 어떤 사람은 점액질적인 사람 등 그 기질이 다양하다. 하지만 자기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약한 부분이 있는 줄 알았기에 강하다는 것을 말했다. 설교자는 ‘나는 나다’고 하는 불순한 정신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최후까지 겸허한 수도자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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