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록

설교의 암흑기-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7. 25. 20:52

설교학 강의록(5) : 교수 - 주태근

 

5. 설교의 암흑기

 

315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자 지금까지 이름 없는 카타콤의 그늘 밑에 있던 설교는 지상에서 마음껏 외쳐지면서 설교의 부흥과 확산은 제 5세기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 대에 역사적 설교가들로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리겐, 클레멘트, 크리소스톰, 그레고리, 바질이 등장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아브로시우스, 어거스틴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430년 어거스틴의 죽음과 함께 설교의 세계는 어두워갔고 무질서와 퇴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을 상실해 버리고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의식이나 마리아와 같은 성인 숭배에 도취되어 버렸다.

2) 미사의 집전 언어가 라틴어로 공통되어 있었기에 제한된 지역을 제외하고 미사는 자연히 하나의 구경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그들의 맹목적인 헌신과 신비의 강조는 예배자들을 지극히 피동적으로 방관자적 존재들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성직자들의 도덕적 탈선을 위시하여 그 자신들에게 맡겨진 말씀의 사명을 망각해 버렸고, 수도원이나 금욕생활에서 있었던 신비한 체험이나 기사, 이적을 설교로 대신하면서 회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무리로 전락하였다.

4)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할 생각이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당시의 교회의 스승으로 인정받는 인물들의 설교를 미사에서 낭독하는 관습이 있었다.

 

맥스웰은 설교의 암흑기를 미사는 순수지 못한 미신적 경배 속에 행해졌다. 미사는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청취를 불능케 했고,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했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가톨릭 왕조의 문예부흥기(The carolingian Renaissance)에는 국법으로 성직자의 의무를 주일과 성일에 설교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였고, 797년 오르레앙의 데오돌프(Theodulf of Orleans) 감독은 성경을 아는 사람은 성경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과 제도에 의한 강조는 설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나 성직자들의 독창성이 보이지 않았고, 몇 편의 설교집을 편집하여 미사에서 텍스트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