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회개치 아니하면(눅 13:1-5)-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 11:37

회개치 아니하면(눅 13:1-5)

 

 

목사 : 주태근

 

한 집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하였습니다. 응치 뼈가 부러져 약 두 달을 입원해 있었는데, 이 집사님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 여러 사람들이 병문안을 와서는 참으로 많은 말들을 남겨 두고 돌아갔습니다.

 

어떤 분은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말을 해주고, 또 어떤 분은 사고 처리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상담을 해주기도 했고, 또 어떤 분은 사고 당한 것을 가지고 집사님을 정죄하면서 회개하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니, 네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해라는 권고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많은 권고 가운데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 자신을 정죄하는 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지 못한 화를 당하고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묻고 있는데, 주변에서 와서 너무도 분명하게 자신을 정죄하는데,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경우가 아마도 한 두 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나 아닌 이웃들이 그러한 일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형태의 반응을 나타내 보인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당한 일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어떻게 그 사람을 위로할까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집니다. 너무 안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아픔을 자기와 더불어 나누어 감당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무조건 화를 당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말하기를, “그 일은 분명히 당한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거나, “그 사람 평시에 지은 죄가 커 그렇다고 하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말했는지 모른다고,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그 일을 통해 무엇인가 의미를 생각하고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태도입니다.

 

유대인들은 현세의 행운을 의롭게 산 결과며, 현세의 불행의 원인을 죄의 결과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불행을 당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불행을 당한 사람들 보다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에 도취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장 전반부의 말씀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첫 단계는 [회개] 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울부짖는 벌거벗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저 불타는 진노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우둔한 인생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자세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나는 온전히 회개하였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회개를 요구하시면서 그 생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시작점은 바로 회심의 순간입니다. 이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 중생에 이르게 하는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시작점이며 그 회심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회개의 순간을 가장 중요한 기독교 입문의 절차로 보는 것이고, 이 회개의 시간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삶을 이해하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심과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기독교 입문의 시작임과 동시에 또 그 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는 생명력 자체인 것입니다. 즉 계속되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갖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최근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신 때가 언제입니까? 그 시간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그만큼 신앙의 건강에 있어서 적신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할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늘 회개는 그 특성상 항상 심판과 연결되기 때문에 표현이 아주 긴박하고 또 잔인하리. 만치 원색적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회개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몹시 긴박한 생명과 연관 있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3:10의 말씀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했습니다.

 

마태복음7:19-20 의 말씀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세계적인 미항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몇 키로 떨어진 곳에 폼페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인근에 있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날아와 하루아침에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입니다.

 

폼페이가 발굴이 되면서 그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폼페이는 고대도시였지만 당시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비록 구리관이지만 각 가정마다 수돗물을 먹고 살았으며 심지어 요즘에 유행하는 사우나 시설까지 있었던 도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환락과 쾌락을 즐겼던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도시가 화산폭발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폼페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죄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희생제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건을 밝히려는 뜻이 명백합니다.

 

빌라도와 동시대 사람 중에 주후 37(A.D. 37)에 태어나 100년경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월절 절기 도중에 유대인이 3천명 혹은 2천명이 빌라도의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라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하고 되물었습니다.

 

예수님께 갈릴리 사건을 보고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사건을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하였고, 그때 죽은 사람들이 '벌을 받아 죽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옛날 갈릴리 사람들보다, 먼저 너희들의 현재의 죄가 더 크다는 사실을 볼 있도록 되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사건 하나를 소개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 때 기혼 샘에서 솟는 샘을 지하 수로를 만들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끌어 들여 저장했던 연못으로, 그 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웠던 망대가 어느 날 무너져 사람이 죽은 사건을 말합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은 실로암 수로공사와 관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 근처는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물이 흔하지 않은 지역입니다.

 

물이 있는 연못을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실로암 연못가에 망대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망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18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망대에 치어 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13:4)하고 되묻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들이 불의한 사고를 당하거나, 어떤 사건에 휘말려 피해를 보거나, 일하다 실패하고, 불행을 겪게 되고, 아프게 되면 "죄가 얼마나 크면 그런 벌을 받았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일지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할지라도, 빌라도와 같은 흉악한 정치인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고, 무너진 실로암 망대 사건에서 죽은 18명과 같은 불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유별난 죽음을 특별한 죄의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가 알듯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을 때도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묻고 계십니다.

 

유명한 신학자 프란시스 쉐이프는 [거기 계시며 침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셔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은 그 언제도 침묵하지 아니하십니다. 항상 거기 계시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역사와 현실 그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바로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 봅시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 가운데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을 죄와 관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이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우연이 아닌 죄와 관련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셨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보응이 뒤따르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죽은 사람이 너희들보다 죄가 커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경고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범한 죄를 그냥 흘러 보내는 일이 없도록 지은 죄에 대한 참회를 하는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여기의 경고는 깊이 생각하면 죄와 심판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들도 당연히 망해야겠지만, 아니 너희들이 더 망해야 될 사람들이지만, 이것이 경고니 깨닫고 바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 가운데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중합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치 아니하면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사도요한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