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새생명의 은혜(눅15:11-32)-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5. 20:38

 

 

새생명의 은혜(15:11-32)

 

 

목사 주태근

 

어느 헬리콥터에 과학자 목사 학자 학생 등 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학자는 늘 교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생 옆에는 배낭이 놓여 있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 여행 중입니다. 한창 비행 중에 갑자기 엔진에 고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낙하산은 3개밖에 없었습니다.

 

1명은 죽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과학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할 존재다. 그러므로 나는 죽을 수 없다이렇게 말하면서 낙하산 1개를 잽싸게 집어 들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거만한 학자도 나도 이 나라에 독보적인 존재다. 나도 살아야 한다말하면서 낙하산을 안고 휙 뛰어내렸습니다.

 

이제 낙하산은 1개밖에 안 남았고 헬리콥터 안에 사람은 2명만 남았습니다.물끄러미 낙하산을 바라보고 있던 목사님이 학생에게 말합니다. “학생! 이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게! 나는 늙었어.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네. 나는 당장 죽어도 하나님께 돌아 갈 자신이 있네하고 말했더니 이때 학생이 말합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살았습니다. 지금 뛰어내린 학자가 급한 나머지 낙하산인줄 알고 제 배낭을 메고 뛰어 내렸습니다

 

일전에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지난 천년의 서양 역사를 '나 밀레니엄'(the Me Millennium) 이라고 규정했다고 합니다. 요컨대 신적 존재나 이 세상 제도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함을 발견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각자 이해하기에 달려있겠지만,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역사가 만들어 낸 삶의 위기는 신의 존재를 무시한 나, 즉 하나님 떠난 이기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존재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있다면 은혜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늘 은혜를 구하고 은혜 받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합니다. 은혜는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됩니다. 은혜는 자기가 자격이 있어서 어떤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베풀어진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헬라어로 카리스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즐거움, 기쁨, 매력, 상냥함, 사랑스러움을 가져다주는 것, 호의, 친절, 자비, 하인에 대한 주인의 친절함 등의 뜻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는데 하루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강청합니다.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되었으니 내 재산을 미리 주면 내 맘대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부족함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의 요구를 그냥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기의 재산을 챙겨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돈은 다 떨어져, 친구도, 먹을 것도, 편안히 잠잘 기댈 곳 역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막노동이라도 하여 살아보겠다고 품꾼이 되어 일을 해보지만 그 나라에 가뭄이 들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향집 아버지 집에 품꾼들도 먹을 것이 많은데 여기서 죽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서러운지 모릅니다. 궁핍한 자리에서 자기 집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탕자는 집으로 돌아 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하면서 집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나간 자식이 오늘이나 내일이나 돌아오지 않는 가 문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반가워하십니다. 그 때 탕자가 아버지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탕자에게 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얻은 기쁨에서 큰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오늘의 말씀은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을 말하면 아버지의 용서와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통하여 죄인인 인간들에게 주시는 복음의 진리 즉 새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한 어머니가 어느 날 아침 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전날 어느 부대에서 큰 사고가 났었는데 그 사고의 사망자 이름 가운데 아들의 이름이 있는 신문 기사를 보고 잘 아는 친구가 아침 일찍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충격과 놀람 속에서 그 어머니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 그 슬픈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곧 바로 군 당국에 문의하여 이 사건을 자세히 알아본 결과 그 죽은 아들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러한 사실을 그의 어머니에게 즉시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살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순식간에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넘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나를 대신하여 다른 누군가가 죄 값을 다 지불하였으며, 그러므로 나는 다시 살게 되었다면 그 다시 살아난 기쁨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탕자의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 사랑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그대로 보여 주신 모습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내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에서 구원 받아 다시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새 생명의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소설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책입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중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점점 사나운 죄수가 되어 갑니다. 주먹 싸움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그의 의지를 단번에 꺾어 놓을 사람 역시 없었습니다.

 

드디어 출소의 날이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죄수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어느 여관 주인도 이 위험한 전과자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 간 시골길을 헤매던 그에게 마침내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

 

그 날 밤 장발장은 너무 편안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신부와 그 누이가 잠자리에 들자 침대에서 일어나 찬장을 뒤져 가족들의 은잔을 훔쳐 어둠 속으로 슬며시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아침 경찰 세 명이 장발장을 잡아서 끌고 와 신부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훔친 은잔을 들고 달아나던 범인을 붙잡은 것입니다. 경찰들은 이 장발장을 평생 사슬에 묶어 놓을 태세였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특히 장발장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걸 잊어버리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나요?” 장발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눈빛에 담아 노신부를 쳐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신부는 경찰에게 말하기를 장발장은 도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은잔은 제가 선물로 준 겁니다.” 신부의 말을 들은 경찰들은 장발장을 즉시 풀어 주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때 신부는 아예 할 말을 잃은 채 떨고 있는 장발장에게 촛대를 주며 말합니다.

 

그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쓰시기를 저와 약속하신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의 삶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재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새사람으로 거듭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재 우리가 해야 할일은 무엇입니까?

 

옛날에 어떤 마을에 그 유명한 그 유명한 탕자가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에서 자기 몫을 떼 내어 방탕하게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왔던 철없던 탕자 말입니다. 지금은 아버지께 용서를 받고 아주 착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탕자가 다시 떠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떠나는 이유가 전혀 다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좋은 선물을 사드리기 위해, 돈을 벌러 떠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오래지 않아 다시 떠난다니 왠지 섭섭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는 아들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또한 스스로 노력하여 큰 선물을 산다는 마음에 즐겁게 일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탕자는 돈을 많이 모았고 선물을 한 아름 사서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날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탕자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도착하기 몇 일전 세상을 그만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탕자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리고 탕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아버지의 유서입니다. “탕자야, 아버지는 네가 사오는 선물보다 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원했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늘 주님과의 함께하는 삶입니다.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 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1 ,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들이 엄청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이라고 말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깝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위해 우리들의 생명 역시 아깝지 않은 삶을 살수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술에 만취하여 밤거리에 쓰러져 죽을 뻔 했던 주인을 살려낸 개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쓰러진 사람과 개를 발견한 것은 새벽 6시쯤이었습니다. 그 개는 길바닥에 누워있는 주인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고 문지르며 따뜻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아마 밤새도록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주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내밀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리고 이 충견은 주인이 구조대원들에 의해 구급차에 태워진 뒤에도 잘 보살펴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소방차에 올라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위에 모여 있던 30여명의 구경꾼들은 "개가 사람보다 낫다"며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개가 어떻게 사람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인의 은혜를 알고 감사함으로 그것에 보답하는 그 마음이 사람보다 낫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말 속에는 은혜를 입고서도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거나 배반을 일삼는 사람들의 세태를 서글퍼하는 마음이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태도야말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