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선교강의록

아라비아반도 복음주의 기독교선교-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14. 10:52

아랍선교강의록(9) : 교수 주태근

 

아라비아반도 복음주의 기독교선교

 

13세기에 도미니코와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건립은 이슬람교와 기독교 상호 관계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해주었다. 네스토리안 이후 처음으로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무력의 도구를 포기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선교회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갖게 된다.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5차 십자군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집트의 술탄을 실제로 방문함으로써 주도적인 모범을 보여 주었다. 물론 그의 방문은 열매가 없었으나 최소한 그는 중요한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같은 해에 그가 새롭게 조직한 수도승들이 모로코에 갔고, 최소한 5명이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유형의 선교단이 튀니지에 나아가려고 했으나 복음 전파가 자신들의 사업에 장애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기독교 상인의 반대에 의해서 불가능하게 되었다.

1225년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수도승들이 모로코에 입국했으나 주로 기독교 노예에게 사역했다. 이러한 복음 증거의 노력이 성공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러한 노력으로 이슬람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고 꾸란이 그 당시에 클루니(Cluny)의 대수도원장인 베드로(Peter the Venerable)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초까지는 이슬람교인에게 전도하려고 했던 유일한 단체는 이집트로 간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인도로 간 예수회 선교사들뿐이었다. 1734년 꾸란이 번역되었다. 이 번역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선교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슬람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더불어서 이 시대는 이슬람교에 대한 새로운 선교방법을 낳게 했다. 지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기독교의 이슬람 선교 역사에 현격한 공헌을 했던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1867-1957)와 템플 게어드너(Temple Gairdner, 1873-1928)이다. 19세기 말부터 전세계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교육받은 젊은 학생 자원자들은 그들의 분명한 특징이었던 열렬함으로 기독교에 격렬히 저항하던 이슬람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중대한 기독교선교는 13세기 레이몬드 롤(Raymund Lull, 1235-1315)이 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무슬림들과 싸우기보다 그들을 복음화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스티븐 닐에 따르면, 그 다음 몇 세기 동안 무슬림 국가들은 기독교 선교에서, 생산적인 선교지에 비해 소홀히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상황이 바뀌었다.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무함마드의 믿음 사이에 진정한 조우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1860년에 영국 국교도들이 그 지역으로 들어갔으며, 다른 교단들도 머뭇거리며 뒤를 따랐다. 하지만 무슬림 선교 활동을 조정하고, 무슬림 및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에 세계의 주의를 집중시킨 사람은 사무엘 즈웨머(Samuel M. Zwemer)였다.

1906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사무엘 즈웨머(1882-1912)가 주도하여 최초로 무슬림선교대회가 29개 선교단체에서 임명된 62명의 대표자들과 60명의 공식방문자들이 참석한가운데 카이로에서 열렸다. 이는 학생자원운동(SVM)에 영감을 받아 헌신한 사람들 중 그 당시 세계 복음화가 가장 안 되고, 가장 어려운 지역인 이슬람권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열정으로 카이로에서 열리게 되었다. 4년 뒤 1910년에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에서도 단 하나의 유일한 질문은 기독교와 이슬람 중 어떤 종교가 압도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이슬람 선교의 필요성과 도전을 절감하게 되었다. 결국 같은 해 1910년에 The Muslim World 잡지가 만들어 지고, 즈웨머가 편집장으로 36년간 수고하면서 무슬림 세계가 복음화 되는 일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일생을 바쳤다.

현대 이슬람 선교를 열어 준 선교사가 사무엘 즈웨머임을 부인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모펫과 함께 1886년에 시작하여 1920년에 절정을 이룬 학생 자원운동 (SVM)을 주도한 지도자였다. 이 운동으로 약 20,000여명의 미주 젊은 남녀 학생들이 세계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사무엘 즈웨머의 이슬람 사역에서 아래 두 가지 이슈를 보게 된다. 첫째, 그의 미국적 승리주의에 입각한 일방적 이슬람 선교를 보게 된다. 그의 위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샘 쉴로르프는 무슬림 선교의 6가지 상황화 모델을 설명하는 중 그의 사역을 19세기 제국주의 모델로 간주했다. 그의 주된 저널이었던 The Muslim World에 수록된 논문들이나,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그의 글들을 볼 때, ‘이슬람의 옛 건물을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옛터 위에서 새로운 기독교 사상 체계를 세우는 선교 목적으로 이슬람을 열등하고 죽어가는 종교로 간주하여 접근하였다. 이 모델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유일성을 유지하는데 장점이 있으나, 이슬람과 기독교간에 단절을 가져오고, 무슬림 개종자들은 거부 구조’ (개종자들이 핍박을 받으며 신앙을 바꾸거나 도주하는 구조)를 채택하므로 말미암아 북아프리카에서는 안정적이지 못한 교회들이 되거나 아예 전혀 아무 교회도 남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다원화되었던 이슬람의 변화에 적절하게 상황화하는 일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는 점차적으로 그 당시 팽배했던 서구적 기독교 왕국 확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성경, 찬송가, 고백서들, 주석들에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외에 상황화는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이 이슬람에 접근한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사실, 사무엘 즈웨머는 40년간 사역 후 12명 정도의 개종자를 얻었던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척박한 현실과 그가 직면한 도전을 절감하게 된다. 1920년 이후 미국에서는 그토록 강력했던 선교 열정이 갑자기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선교 쇠퇴로 인해 이슬람 선교도 함께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즈웨머(Samuel Zwemer, 1867-1952)는 미국으로 이민 온 네덜란드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앙심이 투철한 복음주의자였고,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3번 식사시간에 반드시 기도하는 것과 같은 철저한 신앙훈련을 가정에서부터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즈웨머는 미시건 주에 있는 호프대학교(Hope College)에 입학하여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돈독하게 하였고 졸업반 때는 학생자원운동(SVM)에 가입하였다. 졸업 후에 즈웨머는 뉴브런스윅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랍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에 베이루트로 들어간 이후 그는 1929년에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직을 수락할 때까지 무려 40년 가까이 이슬람의 심장부에서 선교하였다. 즈웨머는 그 기간 동안 8일 간격으로 두 딸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포함하여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선교를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을 남겼다. 즈웨머는 이슬람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문헌연구와 선교대회에 참여함으로 습득한 이론을 접목시켜 균형잡힌 선교이론을 제시하였다. 19세기후반 학생자원운동(SVM)의 승리주의와 낙관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하였던 즈웨머는 사역초기에 이슬람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 예로 그는 무함마드의 신 개념이 부적절하고 불완전하며 빈약하고, 심지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러한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에 한참 미치지 못하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계속 이슬람현장에서 무슬림들을 만나고 사역하면서 점차 그의 시각은 변하였다. 오만과 바레인에서 10년간 선교하였던 미국개혁교회(RCA) 목회자 후버스(John Hubers)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1916년부터 즈웨머의 이러한 변화된 관점이 저술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즈웨머는 무슬림을 형제 혹은 친구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해서 비기독교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도 거론하였다. 그는 기독교가 우리의 무슬림 친구들에게 심각한 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여행자나 정치인 혹은 선교사들이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기독교의 일을 할 때, 혹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비기독교적인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된 즈웨머의 시각이 이슬람을 인정하거나 무함마드를 참된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후기 저술에서도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토양에서 생성되었고 무함마드는 두 종교들로부터 많은 부분을 차용해왔다고 주장하였다. 즈웨머가 보여준 이러한 관점의 변화에 대해서 세심한 연구가 필요한데 왜냐하면 오늘날 이슬람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세계(Christendom)의 전통 가운데서 성장하고 교육받아 이슬람에 비판적이었던 한 명의 목회자이자 선교사가 이슬람현장에서 40년간 사역을 하면서 그의 무슬림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를 갖게 된 것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먼저 즈웨머는 그가 가진 관점의 변화로 인해 배교자로 불리지 않았고, 오히려 저명한 신학교의 교수로서 이슬람을 가르쳤고 이슬람 학문과 선교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무슬림을 향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열정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베어프(Lyle Vander Werff)는 즈웨머가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문화인류학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슬람에 접근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즈웨머의 삶과 이론은 오늘날 이슬람선교에서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와 종교다원주의의 양극단의 관점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슬림을 포용하면서도 복음의 진정성을 잃지 않는 건설적인 선교방안을 찾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