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및 기념 예배 설교

내 눈을 뜨게 하소서(요 9:1-12)-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1. 13:32

내 눈을 뜨게 하소서(9:1-12)

 

 

목사 주태근(삼일절 기념예배)

AD 70년경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 예루살렘 성에 포위돼 있던 요나한 벤 자카이 라는 유대인 랍비가 사망을 가장해서 관에 실려 성밖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칼로 찌르려는 유대인 수비병과 로마군인들을 간신히 뚫고 마침내 로마군단의 티투스 장군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장군에게 로마황제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경의를 표합니다.” “감히 로마황제를 모독하는 말을 하다니...” “아닙니다. 장군은 반드시 로마황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 얘기는 그만 둡시다. 나를 찾아온 이유나 말해 보시요.”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방 한 칸짜리라도 좋으니 우리 민족을 위한 작은 학교를 하나 지어주시고 그것만은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티투스 장군은 유대인 랍비의 요청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티투스 장군은 아버지 베스파시안 황제의 후계자가 된 뒤에도 그 작은 유대인 학교만은 절대로 없애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대인 랍비 벤 자카이가 예견한 대로 예루살렘 성도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됐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대대적인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아 있는 학교를 통해 유대민족의 신앙, 전통, 정신, 지식이 계승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오늘날 유대인들은 각 분야에서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벤 자카이는 남다르게 눈이 뜨인 인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조국이 망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더 멀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후대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이 존속한다면 유대민족의 장래도 존속할 것이라는 안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눈이 밝으면 미래가 보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가나안 정탐꾼 열 명과는 정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눈은 하나님을 포착했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대장부로, 남에 대해서는 밥으로, 가나안 땅에 대해서는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찬 것으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삼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일으킨 한국교회는 뜨인 눈으로 미래를 보면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민족을 일깨우는 사명을 감당한 교회였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의식이 분명한 종교입니다.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 각성하여 정신이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역사의식 이란 역사적 발전에 대한 강한 자각과 더불어 역사 인식의 기초가 되는 사유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자 하는 심적 작용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소경이 예수를 만나 눈을 뜨고 새 삶의 은총을 체험하는 내용입니다.

 

갇힌 자의 삶을 살던 소경에게 예수님은 광명의 자유 한 삶의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눈이 밟아지고 미래를 직시하는 새 삶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소경은 눈을 뜨게 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일깨우는 대열에 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는 인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금년은 우리의 선열들이 일본의 억압에서 기미 독립만세를 부른지 8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일제 36년 동안 수많은 희생을 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일운동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소경처럼 교회가 조선인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점입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게 했습니다. 삼일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역사의식을 깨닫기 원합니다. 먼저, 삼일운동은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새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폭발한 한 민족의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지만, 그 준비과정이나 운동 진행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보더라도 기독교에서 16, 천도교에서 15, 불교에서 2명이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또한 비 서명자 48인 가운데도 24인의 기독교인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전체 인구 17백만 중 기독교의 수는 30만 명에 불과 한 2%에도 미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참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압제와 고통에서 한민족을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들어서 민족독립을 약속하신 운동이 곧 삼일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들어서 삼일운동을 일으키게 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삼일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 왔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민족과 조국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교회로서 사명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선교사 스피어(R.E.Speer)는 한국 선교에 대한 장로교 선교부 본부에 보고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교회만이 이 나라에 있어 유일한 희망이다…… 교회는 …… 대중을 회심시켜 교육시키는 일이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이다." 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한국백성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서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백성에게 새 언약인 해방과 자유와 같은 구원의 빛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삼일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삼일운동에 서명한 목사님들 중 신석구 목사님의 일화가 유명합니다. 목사님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고민하면서 선언서에 서명하는 문제를 놓고 새벽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27일 새벽에 독립선언문에 사명 할 것을 결정 했습니다.

 

"5천년 전에 내려오던 강토를 내 당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가 되는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라는 응답을 받고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길선주 목사님도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것을 결정한 동기가 역시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권고로 "고국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신앙적 동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삼일운동에는 한국교회의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철통같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굳건한 신앙으로 극복했습니다. 반드시 한국 민족이 독립할 것과 국권을 회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삼일운동을 통하여 나라를 사랑하며 조국에 소망을 주는 애국애족의 사명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호처럼 정치를 위한 애국이 아니라, 한국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신앙적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상동교회에 출석하셨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도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삼일독립운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취조를 당할 때였습니다. 일본 순사가 묻습니다.“당신에게 이러한 독립운동을 시킨 주동자는 누구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순사가 또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당신들의 운동본부는 어디에 있소?”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들의 운동본부는 바로 저 하늘에 있소!”이처럼 이상재 선생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원하고 계심을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평화운동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삼일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은 비폭력 무저항 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천도교 측에서는 필요시에는 무력행사도 불사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측은 완강히 이를 거부하면서 끝가지, 비폭력과 무저항 운동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한국교회의 심연에 깔려있었던 예수정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유대인들과 로마병사들이 그를 체포하려 했을 때,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차고 있던 검을 빼들고 대제사장 말고 귀를 쳤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52,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비폭력 평화정신은 기독교인들의 민족정신과 독립 정신을 더욱 확고하게 다듬어갔습니다. 삼일운동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평화정신은 모든 한국 민족을 섬기며 심지어 원수인 일본까지 용서하려는 평화의 사도로서 화해자로 역사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끝으로 삼일운동은 한민족의 통일과 정체성을 나타내었습니다. 삼일운동 때 외쳤던 기미독립선언문은 자유의 선언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 첫 부분에 "吾等我 朝鮮獨立國임과 朝鮮人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이처럼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때만해도 우리 민족은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영남, 호남이 따로 없었습니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이라는 계층간의 갈등도 없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들은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을 위해서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도 너와 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삼일운동은 종교와 종파, 사회적 계급과 남녀노소의 장벽을 뚫고 온 교회와 민족이 하나로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습니다. 실제로 독립선언서가 228일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일본총독부는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수색했으나 31일에 거사가 있을 것을 전혀 탐지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인 밀정도 이 사실만은 일경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이 그렇게도 심하게 경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전국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삼일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통일을 선도해 갔습니다. 민족정신에 기독교정신과 복음을 접목하는 일이 앞장섰습니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설교의 메시지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민족화합을 위하여 찬송가 곡에 맞추어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애국자이자 감리교 교인인 남궁억 선생께서 1907년에 지은 "삼천리강산 금수강산"을 널리 불렀습니다. 교회마다 태극기와 십자가를 항상 함께 걸어 놓았습니다. 태극기와 십자가는 애국하는 한국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찬송의 연창과 십자가와 태극기는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한국교회의 노력이었습니다.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 우는 유관순은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교회 부인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 정신으로 성장한 인물입니다. 19193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헌병의 발포로 즉사하고 어머니역시 참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유관순은 체포되어 오빠 관옥과 함께 유치된 뒤에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그녀의 옥중 법정투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에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라는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제국신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는 재판관의 회유에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만세다."라며 한 걸음도 물러설 줄 몰랐습니다.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이란 말이냐."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장의 검사를 향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하였습니다. 날밤으로 계속된 고문은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던 것입니다. 그녀의 밥에다가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서 먹게 했습니다. 머리에는 콜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당기고, 가발처럼 머리 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습니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태워 버렸습니다. 코와 귀는 면도날로 잘리 우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01012일 그처럼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살아 숨쉬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이 민족으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탄생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서재필, 이상재, 이준, 조만식, 남궁억, 주기철 목사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일제의 폭압적이고 간교한 통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교회를 통해 역사의식을 바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눈을 뜨게 하는 종교입니다.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종교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어떤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역사의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결정되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바로 미래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 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