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15) : 성만찬의 종교개혁자들의 견해(글-주태근)
ⓑ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종교개혁의 초창기에 있어서 나타난 성만찬은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말씀과 성만찬의 불균형을 회복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들은 말씀이 신앙과 예배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과 형식주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결코 성만찬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자들에게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개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내용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개혁의 주역들은 성만찬론을 자신들의 특유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재조명하면서 최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있는 역사적 연접(historical link)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의 견해를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⑴ 루 터
루터(Martin Luther)는 말씀은 주님이 제정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방편이 되는 성례전을 절충해 주는 것이므로 말씀이 없는 성례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루터는 1530년에 저술한 그의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로마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적 과오를 지적하면서 로마교회가 범한 세 가지 잘못을 논박하였다. 첫째는 평신도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는 주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마술적인 화체설의 과오이며, 셋째는 성례전을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 가톨릭의 전통을 모두 개혁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다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성찬을 받기 전에 시행한 부분 중 불을 켜 놓는 것, 제복의 사용, 향을 피우는 것은 그대로 존속시켰으며 이에 반해 성찬 예배에서 성별의 기도는 변화시켰으며, 화체론을 수정하여 공재론을 수립하였다. 루터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고, 처음에는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라고 권했지만 매주일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 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 밑에, 함께 (in, under, along with)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임재를 믿었고, 공간 속에 연장된 몸 (body extended in apac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주님의 제정어에서 ...이다’를 윤리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과 화체 교리를 거절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번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1519년 성찬에 관한 교설 을 쓴 때이고, 둘째는 1520-1529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쓴 때(쯔빙글리와 말부룩 회담을 하기까지)이고, 셋째는 말부룩 회담 이후이다.
첫째, 성찬에 관한 교설 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 아래 두고, 성물인 떡과 포도주는 도장(siggel)으로 그 아래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성례는 본체의 표징이라고 했다.
둘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찬의 결정적 요소는 신앙이라고 했다. 성찬은 약속이며, 성찬의 은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라고 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가 우리의 신앙이며, 셋째가 사랑이라고 했다.
셋째, 말부룩 회담이후에 성찬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로 형성되었다.
또한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했는데, 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상한다는 것과 ② ‘이것은 내 몸이다’를 ‘이것은 내 영적 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박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를 제외시키는 행위는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⑵ 쯔빙글리
쯔빙글리(Zwingli)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성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단순한 기념을 위한 표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행동을 회상케 할 뿐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에라무스의 인문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신학적인 접근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특별히 쯔빙글리는 어떠한 교리도 이성에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루터는 신학에서 이성의 역할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특별히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역력히 나타났다. 쯔빙글리는 화란의 코넬리우스 호엔의 영향을 받아 1524년에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두 주장의 견해 차이는 사실상 교회 역사상 여러 번 대두되었던 실재론적 개념과 순리주의(Spiritualism)적 개념 사이의 대립을 재생시킨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시며 그의 몸과 피, 곧 그의 인성은 하늘 아버지 우편에 제한 되어 계시고 성만찬은 십자가상의 구속적 사역을 회고하는 감사의 기념 일 뿐이라고 하여 기념설(Memorialism)을 주장 하였는데, 이와 같은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성만찬의 물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곧 가시적인 육으로 화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는 승천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인성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차이점은 그들의 정신적 태도의 표현으로써,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는 예수의 말을 휴머니스트들은 ‘이것은 나의 몸을 의미한다’ 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로 빵 속에 현존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영은 신체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영에 의해서만이 만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쯔빙글리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 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껏 예배 가운데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가 언제나 공존했던 것을 분리시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는 성만찬을 연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⑶ 칼 빈
칼빈(J. Calivn)은 루터의 공재설이나 쯔빙글리의 단순 기념설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빵과 포도주와 성례전적 연합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성령과 말씀 안에서만이 성물은 그것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된다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적 견해를 취한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실지로 임재하신다고 믿었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감수성(receptivity)과 관련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이 요구되며 거기에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떡과 포도주는 말씀 안에서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요, 영상이요, 상징이며, 이와 같은 징표와 영상과 상징의 약속이 받는 자의 신앙에 의하여 경험되어 진다는 주장이다.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지만 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어남으로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라고 한 주장은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다른 것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외형적인 표시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입증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성물(the elements)의 신비성과 거기에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사건을 단순히 집례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여기서 성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시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므로 그 약속을 선포하고 , 해석하고, 적용시켜 주는 말씀의 증거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때 이 성물과 거기에 대한 말씀을 경청한 무리들이 성령의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동시적으로 이룩하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례전을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 이란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아들여 세례나 성찬이 성령으로 우리의 사죄와 은총의 수락을 입증하는 표징이요 인장이라고 했다. 그는 성령을 성례전의 지배인이라고 했다. 성례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오직 성례전을 통하여, 성례전과 함께 은혜가 온다고 했다. 그것은 성령이 성례전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며, 성령이 같이하지 않는 한 성례전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 아니므로, 성령은 성례전 안에 있는 교사라고 했다. 또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제네바교회 신앙 문답서에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는 바,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징표로서 우리에게 영적인 모든 일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부적인 증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약속을 우리 마음에 한층 더 강하게 각인하여 우리가 그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빵과 포도주라는 성물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세우신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당연성을 표하고, 둘째로 우리는 육체로 덥혀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이고 천상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상징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 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된 언약에 대한 선 이해가 요구된다고 했다. 이러한 선 이해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을 재확인 시키는 것이며 거기에 말씀의 수용이 가능하게 되고 성령의 역사 속에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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