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

예배학 강의록(17) : 예배와 세례식(글-주태근)

주 바나바 2024. 1. 18. 10:09

예배학 강의록(17) : 예배와 세례식(글-주태근)

 

. 예배와 세례식

 

이스라엘 요단강 세례터

 

. 세례의 정의

 

기독교 초기부터 세례는 그리스도 교회에의 입회의 의식이 되어 왔었다. 오순절에 3천명의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았고(2:38-41), 이디오피아의 환관(8:36-38)과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10:47-48), 빌립보의 간수와 그 가족들이 세례를 받았다(16:33). 그러므로 세례는 중생, 곧 새로남의 성례로서, 교회와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여정의 끝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세례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많은 신학자들이 성만찬 신학에 비해서 거의 동일한 입장을 취해왔다. 칼빈은 세례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이라고 말한다.(기독교 강요, 4, 15, 1) 그리고 이런 견해에 대하여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큰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Paul Tillich세례란 영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한 인간의 결단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인간을 가리켜 새로운 존재”(New Being)이라고 부른다. 장로교 예배학자인 Donald Macleod는 세례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취하신 절대 주권의 표시이며, 인치심(seal)이라는 신 주도적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고 한다.

 

 

. 기독교 세례의 기원

 

오늘날 기독교에서 행하고 있는 세례 성례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무렵에 제자들에게 직접 위임하신 것으로서 그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그 이후로 세례를 하나의 성례로서 교회에서 시행하여 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레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 이러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오늘날 세례성례전이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충분히 대답해 주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세례 성례전은 틀림없이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례의 기원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사역과 명령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세례 성례전이 다른 종교나 그 이전 시대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예전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용과 형식면에서 기독교의 세례성례전과 유사한 많은 의식들이 예수 이전시대부터 혹은 일반 타종교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생겨난 생각으로 세상에 전혀 없던 새로운 의식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 분은 제자들이 흔히 알고 있던 사실과 형식을 사용하셔서 그것을 재해석하시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하셨다. 이러한 면에 동의를 한다면, 세례의 기원은 예수를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몇 가지 세례의식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세례를 이해하는데 중요할 것이다.

 

 

1. 유대교의 정결의식

 

구약성서 70인역에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세례의 용어는 bapto라는 말인데, 이는 약 17번 나타난다. bapto는 히브리어 tabal의 번역으로 출 12:22 등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 또한 열왕기하 514절에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요단강에 몸을 담근 것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 baptizo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이 단어 역시 히브리어의 tabal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인 tabal이 세례라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히브리어 tabal잠근다”(dip), 또는 “...적신다”(moist with)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J. Murray[Christian Baptism]에서 Tabal잠그다를 뜻하고, 그것의 헬라어 역인 bapto도 또한 그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여기서잠그다”(dipping)라는 것은, “침몰”(immersion)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단어와 관련하여, 구약에는 물을 사용하여 정결케 하는 의식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즉 구약에는 흐르는 물에 온 몸을 담그는 의식이 종종 나타나며, 그 의식은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버리는 수단 중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나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을 가졌다. 불결함을 깨끗이 정화시키기 위한 씻음은 흐르는 물(15:13), 샘물, 강물(왕하 5:10-13), 집뜰의 연못(삼하 11:2-4) 등에서 행해졌고, 많은 경우에 몸 전체를 깨끗이 씻도록 요구되어졌다. 제사장들은 매일 희생을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갈 때에 손과 발을 씻어야만 했다(30:17-21). 그 외에도 속죄의 날에 대제사장은 거룩 곳에서 자기의 몸을 씻어야 했고(16:23), 문둥병으로 부정하거나 죽은 시체를 만졌을 경우에도 씻고 뿌리는 의식이 바로 그 당사자에게 행하여졌다(14:19).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결예식의 거의 대부분이 제사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데(15:13-32, 17:15-16, 29:1 이하, 30:17-21 ), 이곳에는 정결예식을 위하여 물을 사용하라는 명령이 있고, 이 물은 씻거나(washing), 그 안에 잠그거나(immersion), 또는 뿌리거나(sprinkling)해서 사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구약의 정결예식은 예수의 성례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기독교 세례와 정확하게 연결시킬 수는 없으나, 세례의 한 모형으로서 구약의 정결예식은 기독교 세례의 기원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Beasley Murray는 이러한 유대적 결례를 가리켜서 새로운 시대에 이어질 세례의 모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쿰란 공동체의 세례 의식

 

쿰란공동체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에세네파에 속한 종교적 그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쿰란 공동체는 경건한 유대인 집단으로써, 사해의 서북쪽에 위치한 와디쿰란(Wadi Qumran)과 그 인접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사본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사해 사본은 쿰란 공동체에 대한 엄청난 증거를 제공하여 준다. 이들은 주전 2세기경에 사해의 서북쪽에 위치한 쿨람이란 곳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진실된 제사장 직분과 부패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본문을 회복하려고 하는 철저한 신앙공동체로서 성경읽기와 노동, 예배, 기도 공동 식사 등을 통해 이상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이 쿰란 공동체는 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을 중요시 여겼다. 특별히 이들이 갖는 특성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속 내려왔던 정결을 위한 물의 사용이라는 차원을 넘어 그 공동체의 가입을 위해 세례를 정식으로 의식속에서 거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레위기 율법서에서 제사장들을 위해 규정하고 있는 이 특별한 결례식이 쿰란에서 공동체의 모든 회원들에게 규정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공동체의 규칙서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이 정결예식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는데, 그것은 몸과 영혼의 정결을 위한 부단한 노력과 동시에 일어나게 되었다.

 

비슬레이(Beasley)는 요한의 세례가 쿰란의 결례와 공통점이 있고,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쿰란의 세례는 매일 3회씩 행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세례와 대조를 이루지만, 초신자의 공식적인 입회의 성격을 띤 최초의 결례는 요한의 세례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쿰란으로부터 세례요한까지 하나의 다리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들의 목표는 밀접하여 철저한 도덕적인 준비를 요구함에 있다고 보았다. 다만 요한의 경우는 그의 가르침에 있어 더 급진적이고 진실로 더 예언적이었다고 말한다. 즉 이들의 세례는 곧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며 베풀었던 세례의 줄기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례의 분명한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3. 개종자들의 세례

 

고대 유대교에서는 남자 개종자에게 세 가지의 필수적인 의무를 부과하였다. 할례(circumcision), 희생제사(sacrifice), 그리고 세례(baptism) 등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개종자가 유대교 신앙으로 들어올 때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예식과 함께 세례식을 통해 허락하는 관습이 있었음에 동의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이외의 모든 사람은 부정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정에서 정결케 함을 뜻하는 할례와 세례 없이는 이스라엘의 계약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예식은 모세에게 속하게 하는 세례"라고 일컬어 졌다.

 

이 개종자의 세례는 Talmud에서 보는 대로 세례 받는 자의 전신을 물속에 잠그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는 세 사람의 증인 앞에서 혼자 물에 들어간다. 증인들은 개종자의 요청에 의해서 참여하며, 그 예식을 행하는 동안 수세자를 물속에 혼자 세워두고 그가 세례를 받는 모든 과정과 의미를 충분히 알도록 해주고, 또 율법이 요구하는 어떤 중요한 부분과 지엽적인 부분을 그에게 암송케 했다. 이러한 개종자들의 세례의 특징은 물로 깨끗게 하는 정결의식(an act of purification)에서 끝나지 않고, 수세자 자신의 영과 육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는 성례전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개종자들에게 주었던 세례가 주후 1세기 전반까지 유대교 내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생각 속에 유대교적 개종자의 세례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는 말씀과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의 명령 속에 우리는 이미 개종자의 세례 개념에서 출발한 기독교적인 세례의 재해석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머레이가 주장하는 바 기독교의 세례의 신학과 형태는 유대교의 개종자 세례의 형태와 신학에 기인한다는 말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4. 세례 요한의 세례

 

성경 속에 묘사된 세례요한은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회개와 세례를 외치는 특수한 선지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세례는 그의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형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방인 입교자들의 세례와 쿰란 공동체와 같은 유대종파들의 결례들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례요한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세례요한의 세례는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요한의 세례는 심판과 회개와 관계 되어 있다. 이는 메시아가 악한 자를 심판하고 의인을 구하기 위하여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나타날 때, 메시야 왕국을 소유하는 희망과 함께 계약의 백성의 일환으로 적합한 것은 회개였다. 요한의 세례는 메시야적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개식적인 예식이었다. 요한은 이 세례를 베풀면서 전파하기를 비록 할례를 받아도 회개치 아니하면 독사의 자식과 같으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마음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로써 요한의 세례는 마음이 완악한 유대인에 대한 정죄요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세리와 창기라도 죄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1:32). 따라서 그의 세례를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용서 받은 확신을 심어주며,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생생한 경험으로서의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세례는 지금까지 있어온 유대교 세례의 형태를 도입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 예수님의 세례

 

기독교 세례 성례전의 직접적인 출발이며, 기초가 된 예수의 세례에 대한 인식과 가르침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먼저 예수님은 세례에 순종하셨다. 초대교회의 저술가들과 루터와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사건을 기독교 세례의 발단으로 보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즉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받으신 세례에 그 기원을 둔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왜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가?”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 요한에게 자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이 세례는 요한적인 세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예수는 죄인도 아니며, 죄를 용서받거나, 회개할 필요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요한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에 이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 3:15)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하신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쿨만(Cullmann)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자신에게 맡기는 고난의 종(42:1)으로서 이 일을 이행하도록 위임받은 것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의 용서를 이루는 이 책임을 위해 자신과 모든 백성의 의를 이룬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아담스는 의는 율법의 순종을 내포하는 것이므로(6:25), 예수께서 율법 아래 계셨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세례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예수께서 순종한 구약 율법이 민 8:6-7로서 이 세례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위임을 행하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 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메시아로서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었으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고, 또한 세례를 통하여 인간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예수는 세례를 해석했다. 예수께서는 그의 세례를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10:38)는 물음과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을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12:50)는 말씀을 통하여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그의 세례를 그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다.

 

요한복음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세례요한의 증언을 기록함으로써 예수의 세례가 그의 고난과 죽음에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으로부터 받은 과거적 사건보다 새롭게 전개될 자신의 미래적 사건을 가리키면서 세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그의 십자가 수난이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받으셔야 할 세례행위(baptismal action)임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오스카 쿨만이 말한대로 예수는 여기서 메시아 수난의 종으로서 그 자신이 행동적으로 받을 세례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3) 예수는 세례를 승인했다. 공관복음서에는 주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실제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나타난다.(3:22-26, 4:1-2).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가서 세례를 주라”(28:19-20)고 하신 그 사역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그가 실제로 세례를 베푸셨는가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들은 그대로 있지만, 이 의식을 주님이 직접 승인하신 것은 매우 분명하다.

 

(4) 예수는 세례를 명령했다. 마태 28:19에서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부활의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함께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명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세례는 결코 인간적인 의식이 아니라,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최고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세례 성례전은 주님의 명령에 의한 예전이며, 위탁받은 무리들의 최우선적인 사명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세례

 

예수의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 의미의 중점을 어디에 두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의 활동기록은 사도행전이 가장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도행전의 기사 중 세례에 관한 최초의 내용을 대할 수 있는 곳은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현장이다.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는 베드로의 응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베드로의 지시적 명령은 3천명이 넘는 무리들에게 즉시 이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살펴 볼 때, 오순절 이후에 비로소 기독교의 세례가 실시되고, 그 고유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오순절 이후의 세례는 단순한 회개를 넘어서 성령의 은사를 동반한 세례, 그리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빛 아래서 재해석된 세례로 나타난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바울의 세례에 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10:38)과 교회의 관습(6:33)을 바탕으로 세례의 의미를 더 심화하고 발전시켰다. 6:3이하에서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백성의 죽음 및 부활과 연결시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죽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죄로부터의 자유가 그 죽음에 의해 확보되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자가 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도들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백성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활동에 힘입어 구원된 사실이,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벧전 3장에서도 볼 수 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이라”(벧전 3:20).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 그리고 구원의 은총이 방주를 중심으로 한 물로 표현되고 있으며,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한다. 이러한 세례이해는 그리스도인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예배와 사명에 결부시키면서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오순절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활동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는 세례에 대한 설명은 율법적인 정결의식으로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뢰하게 되는 신앙양심에 의하여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적 구원론의 진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히브리서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여기서 육체의 씻음은 영적인 씻음을 반영한다.

 

세례의 형식도 사도시대에 이르러 발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에 사람들은 사도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세례를 받았다(2:38). 또한 사마리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일이 없고,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처음부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8:16). 그러나 후에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씀으로써 마태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삼위일체 신조에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장복은 사도들의 계속된 세례의 사역에 대해 첫째로, 사도들은 예수가 정해준 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세례를 주었으며, 둘째로, 사도들의 세례는 수세자의 세례와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용서의 선언이 함께 있었고(22:16), 셋째로, 이 때의 세례는 새로운 기쁨을 소유하고 삶의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자격을 부여해 주었으며, 넷째로 사도들을 통하여 받은 세례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의미가 있었다고 그 특징을 정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도들과 수세자들이 가졌던 세례의 의미는 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으로 확립되었으며, 이 의미를 새롭게 다짐하는 세례의 성례전이 베풀어지는 곳마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발길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