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2) : 교수 - 주태근
Ⅱ. 선교에 대한 이해
선교의 고전적 어의는 타문화권 전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란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포괄적이며 애매한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선교는 '선교'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선교에 관한 문제가 실제의 선교사역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선교인가 하는 선교의 개념 정립에 논쟁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말이다. 선교란 무엇이가에 대한 분명하고 단순한 해답이 가능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 같다. 오늘날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교개념을 가지고 선교를 말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옛날의 정의를 고수하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의 포괄적인 선교 개념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다. 선교의 고전적 개념은 너무 좁기때문에 우리가 처한 삶의 정황에서 선교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넓어진 선교 개념으로는 우리를 추수꾼으로 부르신 주님에게 불순종하게 될 위험성이 따르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를 듣는다.
엇갈린 선교관, 즉 혼란된 선교 개념 때문에 선교에 대한 교회의 실제적인 노력은 더욱 더 모호한 것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선교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야기된 갈등과 혼란은 위험한 수위에 까지 이른 감이 든다. 타문화권 전도만을 선교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을 선교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같이 혼란된 선교 개념을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성경적인 선교관을 제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선교론들이 다 성경에 근거를 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선교에 대한 댜양한 관점들을 외면하고서는 선교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욱 활기차게 선교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1. 선교의 용어
‘선교’라는 용어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 용어이다. 그러나 선교의 개념은 성서 전체를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교란 라틴어 mitto(‘보내다’의 의미)에서 유래하고, 신약의 헬라어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 135회)와 “펨포”(πέμπω, 80여회)가 선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선교(Mission)란 말은 라틴어(missio/mitto-동사형)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 말의 뜻은 파견(sendung), 사명(aufgabe), 혹은 위임(auftrag)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정부가 외교관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어 보낼 때에나, 정치적인 임무 수행을 위하여 특수한 임무를 사람에게 부여 할 때 사용한다. 선교학적으로 Mission이란 원어는 “사명과 위임을 주어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George W. Peter에 의하면 Mission은 Missions와 구별하여 사용하는데, 이는 “예수그리스도 교회의 총체적인 성경적 과업(Mission refers to the total biblical assignment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을 의미하는 말이며, 교회의 안팎의 사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It is comprehensive term including the upward, inward and outward ministries of the church).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에 보내진 자(The Church as Sent), 즉 ‘순례자’ (Pilgrim)요, ‘나그네’(Stranger)요, ‘증인’(Witness)이요, ‘선지자’(Prophet)요, ‘종’(Servant)이요, ‘소금’(Salt)이요, ‘빛’(Light)이다. "Missions" 는 특별한 어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음의 빈곤 지역에 전하기 위해서, 타신앙자 또는 무신앙자들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그리고 속한 공통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를 맺는 기능적이고 번식하는 지역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신약교회의 직접적인 복음 영향권과 그의 변경 너머로 공인된 사람들을 보내는 것(파송)을 의미한다.
복음화 (Evangelization)는 기독교 선교 사역에 있어서 기초 사역으로서, 회심자를 만들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적합하고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권위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결단을 유도할 뿐 아니라 요구하는 복음의 제시요, 관통이요, 침투요, 대결이다. 그것은 하나의 결단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자 혹은 무신자의 회심을 위한, 또한 그들을 예수 믿는 신자를 만들기 위한 효과적인 복음의 제시이다.
기독교화 (Christianization)는 유기적으로 복음화와 관련이 되어 있고, 논리적으로는 복음화 후에 따라 오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와 복음안에서 믿는 자들을 교화하고 문화화 하는 것을 기독교화라 한다. 그것은 믿는 자들을 예수의 제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고, 그리스도의 유용한 종이요 효과적인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전 생애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원리(principles)들이 꽉 들어 차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주권을 받아 드리고 그들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주님의 지각있고 헌신된 추종자가 되는 것이다. 전체적인 의식에서 볼 때, 이러한 것들은 전생애를 통해서 일어나는 과정인 것이다.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말은 성경적인 어휘는 아니지만 하나의 성경적인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화라는 것은 신자 개인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에 더 치중하는 반면에, 사회화는 개인 신자로 하여금 교회나 크리스천 기관 같은 신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인지된 그리스도인의 이상, 모범, 제도와 삶의 방식에 부합되도록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성 과정이며, 이상적으로는 개종후 일어나는 과정인 것이다.
문명화(Civilization)라는 말은 문화 발전의 수준을 의미하는 세속적인 어휘이나, 오늘날은 크리스천 사역과 관련하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 어휘가 쓰이는 한에서는 이 어휘는 실제적으로 서방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동일시하는 알브레트 리츌의 사상의 잔존물로 여겨진다.
2. 선교의 개념
신학자들이 선교의 정의를 소개한다.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는 다음과 같이 선교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둘째, 선교는 영원한 구속을 주는 것이다. 셋째, 선교는 악한 마귀를 내쫒는 것이다. 넷째,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올란도 코스타스(Orland E. Costas)는 그의 저서 “The Integrity of Mission"에서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선포(proclamation)로서의 선교이다. 둘째, 제자 양성으로서의 선교이다. 셋째, 활성화로서의 선교이다. 넷째, 통합적 성장으로서의 선교이다. 다섯째, 해방으로서의 선교이다.
구스타프 바네크(Gustav Warneck)는 선교는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도모하는 전체적인 일이다.” 바네크는 복음선포를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에 연관시켰다. 만약 하나님의 대사로서 부름을 받은 선교사가 오직 말 뿐인 복음만 전한다면 그것은 부족하다. 그리고 세워진 교회가 단순히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데에만 그친다면 그것도 부족하다. 그런 고로 선교사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그 복음으로 인해 많은 청자의 심령들이 깨어지고 양심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연합할 때 교회가 되며, 비로소 거기에 은혜와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월터 프레이탁(Walter Freytag)은 선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관철하려는 그 분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두 가지 운동이 뚜렷하다. 1) 하나님의 행동이다. 즉 하나님 아들을 보냄 가운데 나타난 그의 계획과 말세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됨 사이에 전개되는 그의 행동이다. 2) 공동체의 모임이다. 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었고, 주 되심의 충분한 계시를 고대한다. 그것은 올 나라에 대한 사역과 이미 온 나라를 증거한다.
해롤드 쿡(Harold R. Cook)은 선교란 “선교사라고 부르는 선택된 일군들의 그룹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인도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이다”라고 하였다.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선교의 기원은 교회도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어떤 특정 그룹도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께 기원을 둔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시기 위해 변방(장애)을 가로질러 오신 선교사이다(성육신). 순수하게 영이신 분이 물질세계를 말씀과 영으로 만드신 사건도 선교로 볼 수 있다. 아들이 성육신하심도 선교이고 오순절에 성령의 오심도 선교이다. 그렇게 볼 때 선교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선교를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는 것보다 교회의 일로 보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바네크(Warneck)는 그의 “복음적 선교학”(Evangelishe Missionslehre)에서 선교가 삼위 하나님에 근거됨을 언급하였다. Karl Hartenstein은 1933년에 이 사상을 더 충분히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 결과는 빌링겐 선교대회에 반영되었다. 1952년 빌링겐에서 있었던 그 선교 대회를 선교적 대 전환점으로 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회를 선교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한다. 종래의 선교 개념은 교회 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선교를 인간의 일로 여기는 듯한 경향이 있었다. 선교사를 ‘우리 선교사’라는 말은 그러한 사상을 반영한 좋은 예이다. 빌링겐 회의의 보고서에서는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 보고서의 글귀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선교 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근거를 가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교의 체계적 정립은 그 대회 이후 George Vicedom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책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 책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은 선교에 있어서 ‘행동하는 주체’(Acting Subject)라는 것이다. Vicedom은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란, 우선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이시고 위임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소유자이시고,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는 선교의 주역(das handelnde Subject)이시다” 그는 선교신학을 하나님, 즉 삼위일체 주님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한다. 그는 선교가 하나님의 내적 근본 질서에 근거된 것으로 말한다. 신의 내적 근본 질서가 파송의 과정으로서 선교의 근거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그 목적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간들에게 그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은사들을 전해줌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교의 목표인데 그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이유 인즉, 그 나라는 현세적인 형태일 수 없고, 실현될 것을 바라는 희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견지 할 것을 강조한다. 미래는 구속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단순히 미래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과거에 이룩한 구속 사업을 중시하는 가운데 미래를 바라야 할 것을 말한다. 그것에 대해 비세돔(Vicedom)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곳에 있고 이 완료 시제에 근거하여 미래에 도래할 것이다”라는 말로서 불신자에게 선포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찬란한 과거를 현재에 재현시키고 이상적인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려는 비세돔의 사상을 본다. 즉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 포개어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이다. 그것은 말세만을 대망함으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사상을 배격하고, 현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끔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already)라는 근거 위에 ‘아직 아니’(not yet)로 나아가야 할 것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선교를 관찰할 때 종래의 선교 이해와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사상이 말하는 선교 철학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 다른 점을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것은 종래의 선교 목표인 ‘교회 세우는 일’(implantioecclesiae)의 약화를 뜻한다. 종래의 선교관은 교회가 없는 지역에 가견적인 제도적 교회를 많이 심는 일, 즉 교회 확장이 선교의 목표였다. 그로써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타자를 위한 존재’(Church for others)로 봄으로 교회의 중요성은 교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함에 있다고 본다. 그 이론적 근거는 삼위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그 바깥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나 바뀌어졌다. 즉, 종래의 ‘하나님---> 교회---> 세계’라는 구원 사역의 차서는 ‘하나님---> 세계---> 교회’라는 차서로 바뀌었다. 교회는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의 역사하시는 징표에 민감하여 그의 일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둔다. John Tayor와 Johannes Aagaard에 의하여 발전된 하나님의 선교 사상은 하나님의 선교를 삼위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의 선교(missions)이어야 함을 말하였다. 즉, 도시, 농촌, 학생, 특수 그룹 등, 인간의 일에 관심과 참여를 강조한다. 나병, 말라리아, 무지와 약함, 그리고 가난을 위한 치병과 도우는 일은 모두 선교이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선교사들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God acts in history)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세속 역사의 일치 병행은 불가하다. 즉, 전자는 후자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 방해 요소는 사단의 세력 등이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은 심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로서, 그리고 해방자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가톨릭의 해방 신학자 Gustav Gutirrez는 ‘행동 신학’(Doing Theology)을 가지고 상황에서의 정의 실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출애굽은 해방의 원형이고 선지자나 예수님은 정의 실현자로 규정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하여 모든 내용을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 메시아의 행동,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행동만 강조한 나머지 선교적인 선포가 약화 될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서의 구원 행위는 사회적 일로만 하려 들면 불가능하다. 역사상 참 구원의 역사는 무엇이든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된다. 포도나무이신 그와 연결되지 않는 구원의 추수는 불가능하다. 만약 예수없이 행하는 복지 사업, 해방 운동, 공의 운동 등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참 포도나무되신 주의 성령의 인도 없이 행하는 것은 참 구원의 사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 구원의 사업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계획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하여 새 하늘을 창조함이 그의 목적인 것이다(계 21:1). 주님은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셨다. 그런 고로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희망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화해의 사역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세계적인 평화와 공의는 그 실현이 요원하다. 그것의 최종 목표는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그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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