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6) : 교수 - 주태근
8. 전도 명령과 문화명령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재능이나 의지, 이성 등이 범죄 이후의 타락한 인간에게 완전히 거두어진 것이 아니고 무지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제 제도들과 인간의 예술, 과학능력은 성령의 일반 역사로서 하나님의 보통은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보통은총을 인간에게 허락한 것은 그들이 죄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하거나 금수 같은 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보통은총 안에 있는 인간의 재능, 예술, 과학 등은 결국 죄의 영향력 하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채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특별은총으로서의 성령의 구속적 사역이 필요하며, 이러한 성령의 특별한 역사 속에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결국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구속적 사역을 요청하게 되고, 그것은 논리적으로 전도 명령에 기반을 둔 문화적 명령의 수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칼빈의 『시민정부에 관한 소고』(A Treatise on Civil Government)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영역에서의 정권의 합법성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순종이라는 자발적인 믿음의 행위 속에서 시민의 권리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발전되었는데, 카이퍼는 인간 삶의 총체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영역 주권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카이퍼에게 있어서 영역 주권의 원리는 복음선포를 무의미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죄와 사탄의 역사가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를 ‘반정립’(Anti-Thesis)이라 불렀으며, 성령의 구속적 사역, 즉 복음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영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영역 주권은 이루어지지 않음을 철저히 인식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 즉 복음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우선하는 전도명령의 문화명령에 대한 우위는 벌카우워나 헤르만 도이에베르트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벌카우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이신득의의 의미는 성화에 대한 은총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서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벌카우워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헛것이라는 믿음과 행함의 상호 연관성(Co-relationship)의 그의 유명한 이론을 주장한다. 벌카우워는 이러한 상호 연관성의 이론을 성경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시키는데 삶에 실천이 없는 말씀은 그의 이론에 의하면 더 이상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도명령과 문화명령을 함께 결속되어 있는 유기체적인 것으로 보는 총제적인 선교 개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도이에베르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가 그의 우주법에 의해 통치되는데 15개의 영역으로 되어 있으며, 각 영역은 상호 결속되었고 그러면서 각자의 고유 영역 주권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는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그리고 신앙의 영역을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보면서 신앙의 영역이 모든 영역의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도이에베르트는 통합된 신앙이 중심된 세계관을 논하는데, 이것은 너무 거시적이고 포괄적이기에 일원론적인 구조를 나타내며 유기체적 특징을 가지게 된다. 그의 영역 주권의 이론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유사하나 차이점은 일원적인 통합된 체계를 강조하느라고 카이퍼가 지적한 반정립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또한 지나치게 각 영역의 기능과 역할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체적인 선교관에 부합되는 이론인 것이다. 여기서 칼빈과 카이퍼의 입장이 성경적인 견해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복음전도가 선행되지 않는 문화적인 명령수행은 아무리 복음전도를 인정하고 두 차원을 동시에 취급한다고 하여도 문화영역이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을 먼저 요구하고 있기에 비성경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20-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기서 ‘굴복하는’과 ‘굴복케 하시는’은 원어로 보면 ‘uπετaνη’와 ‘uποτaζαντα’인데 이것은 원동사가 되는 ‘uποτaσσω’의 수동태와 능동태로서 모두가 과거형이다. 이 말은 이미 어쩔 수 없이 죄와 사탄의 영향력 아래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그래서 그의 구속을 바랄 수밖에 없는 피조 세계의 상태를 의미한다. ‘굴복하는’ 상태에서 피조물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해방되는 역사가 있을 것임을 말씀한다. 여기서 ‘해방되어’의 원어로 쓰여진 시제는 원동사인 ‘ελευθερoω’의 미래형으로서 ‘ελευθερωθnσεται’이다. 이것은 이미 굴복된 피조세계가 원어의 의미 그대로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에 의해서 계속해서 해방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온전히 해방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렇듯이 성령의 구속적 사역으로서의 전도명령이 문화명령보다 우선권이 있지만 문화명령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로잔 언약문은 문화명령을 선교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보았고 말씀과 행위의 관계로 보았다. 전도명령 수행은 교회공동체를 통한 말씀의 선포로 나타날 것인데, 이것은 교회 안과 밖에서 공히 나타나야 하며 입술의 증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 삶의 제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재권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만일 말씀을 증거한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말씀 선포가 아니요, 인간 삶의 제 영역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는 영역으로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설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의 중요성이 있으며, 이것은 총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주 되신 삼위 하나님의 주재권을 확립하고 증거하며, 삼위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그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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