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8) : 교수 - 주태근
Ⅳ. 신약성경과 선교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보편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만민의 구원을 궁극의 목표로 가지셨다. 그 일을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택하여 그들로 이방의 빛을 삼으시고 만민이 그 빛을 보고 찾아오게 하셨다. 사람들을 끌만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어 흩으심으로 시작된다. 복음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시작되어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 일은 지금도 계속 수행되고 있다. 구약의 선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그 주제였다면, 신약에서 선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다. 구약이 하나님의 주권성은 언약관계의 형성과 이사라엘공동체에 주어진 의무수행, 곧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과 이웃에 대한 선행을 요구하였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주권성은 그리스도의 ‘주와 구주’(Lord and Savior)되심에로 이어지고, 새로운 신앙공동체는 그의 명령에 따라 선교의 사명을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웠다.”과 하신 선포는 교회의 선교, 곧 ‘복음의 선포’와 연관되어지는 것이다.
a. 예수님의 선교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를 가르쳤다. 이것은 비단 공생애 초기, 즉 그가 처음 제자들을 불러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하셨던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분부하셨던 그의 지상 공생애 사역의 바로 마지막 기간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의 생애와 사역의 모든 전행로(全行路)가 ‘선교’였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사, 즉 ‘보내심을 받은 자’의 생애였다. 그 분은 목적과 함께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목적이란 오늘날 주님의 선교사들의 생애와 같은 목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들, 즉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은”(엡 2:1)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사도’라고 불렀으며 “그를 부르신 자에게 충성했다”(히 3:1~2)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도는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권위와 책임을 위임받은 자다. 이 특수한 임무는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적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사 61:1, 눅 4:18~21). 예수님의 생애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대표했으며 하나님이 보내어 행하라 하신 일에 자기를 제한하면서 그 일에 충실한 생애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애의 성격은 바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선교 활동이었다.
b. 사도행전의 선교
신약성경은 성령을 기독교 팽창에 있어서 ‘선도자(Initiator)’와 ‘지배적 요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해외선교 활동에 대한 예표들 중에도 성령의 역할은 두드러진다. 초대교회 선교의 선교 명령(행 1:8)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지리적 개념 위에 서 있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라는 순서를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모든 지역이 전부 선교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다 같이 선교의 동등한 대상으로 관계지어진다. ‘땅끝’(ends of the earth)을 ‘전세계’(the whole world)와 ‘모든 나라들’(all nations)의 동의어로 본다. ‘모든 나라들’이란 전체 비(非)이스라엘의 세계를 의미하며 지리적 포괄성을 포함하고 있다. 세계 가장 구석구석에 이르는 전세계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처음에 전세계가 그 선교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교회는 차츰차츰 그 전세계적 선교 사역에 참여케되었고, 성령의 주도적 역할로 ① 제1단계-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행 10장) ② 제2단계-이방의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 11:19~26) ③ 제3단계-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행 13:1~5) ④ 제4단계-예루살렘 공회(행15장) ⑤ 제5단계-유럽 이외의 지역, 이와 같은 다섯 단계가 지난 후에야 기독교가 실제로 전세계적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c. 사도바울의 선교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논할 때 사도 바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유일의 인물도, 첫사람도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의 박해가 시작되자 믿는 자들이 각처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바울 이전에 그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회지도자들이 있었으며, 그가 로마에 가기 전에 이미 거기에는 믿는 이들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선교를 도외시하고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기독교 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울을 선교와 분리시켜 보는 것은 그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학자이기보다는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은 선교적 노력과 관심의 결과이며, 그의 서신서 13권은 각기 그런 선교적인 노력과 관련되어 있다. 바울의 대표적인 교리서신으로 간주되는 로마서조차도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선교적 관심의 결과로 나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선교신학은 그의 선교에의 사명감과 직결된다.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롬 1:14) 모두 빚진 자로 자처하며,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고전 9:16)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외치던 예레미야를 연상케 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로서의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d. 바울서신의 선교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였다. 그는 맨 처음에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고 가장 중요한 로마서를 쓴 다음 제일 나중에 디모데후서를 썼다. 그는 그의 사도직은 주님이 친히 주신 것임을 변호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바울은 복음에 관하여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3-8). 바울이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으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전한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딤후 2:8-9). 이 복음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비밀, 즉 계시일 뿐만 아니라 능력이었으며, 이 능력이 그로 하여금 사도로서 교차문화적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였다(롬 1:16; 고전 1:17-25). 바울 당시에나 지금이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기독교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요 능력이다. 바울서신들 중에 나타난 선교학적 주제들 가운데 더욱 현저한 것은, 그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으며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그의 죽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차별 없이 우주보편적이라고 진술하였다(롬 3:21-24; 갈 3:26-29). 그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갈 2:21; 엡 2:8). 페르디난트 한에 의하면, 바울은 회심할 때부터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갈 1:15-17). 따라서 그는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목적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산 제물이 되고(롬 12:1), 배설물이 되고(빌 3:8), 부음이 되고(딤후 4:6), 죄수가 되었다(빌 1;13-14; 행 28:16-31). 라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방인을 배려하셨으며, “땅 끝”까지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마침내는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그토록 핍박했던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9:19-23).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며,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 되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릴 것이라고 보았다(롬 15:9-12).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이 어떤 종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랐을까? 첫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바랐다(롬 12:1-2; 살전3:3; 갈5:22-23; 빌4:8). 둘째,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가 하나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롬15:5-6; 롬12:3-21; 고전3;3-9). 셋째, 바울은 교회가 봉사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15;25-26; 고전7:2-5; 롬15:27).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이 거룩하고, 하나 되고, 섬길 것을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성장을 경험하였다. 사도 바울은 신학자요 교차문화적 선교사였다. 그래서 스코트 해프만은 “바울은 신학적으로 특징지어지는 선교사요 선교학적으로 특징지어지는 신학자였다”고 주장하였다.
e. 일반서신과 선교
일반서신이라 함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 2, 3서, 그리고 유다서를 포함하는 서신을 말한다. 선교의 도구로서 초대교회는 많은 어젠더와 이슈들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일반서신의 저자들은 전도자로서 교회를 섬겼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그의 부활에 기초한 메시지를 계속하여 선포하였으며,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였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선교위임령을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죄 용서와 새 사람 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세례를 베풀었다. 초대교회는 사도적인 교회로서 계속하여 새 창조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는 당시 사도들, 오늘날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다. 교회의 선포와 증거와 양육은 고난과 역경을 동반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환난과 핍박이 올 때 오래 참고 인내할 것을 가르쳤다 (히 12:1-13).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 가운데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승리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며(벧전 1:3-7), 요한 1서 기자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것을 권면하고 있다(요일 5:4-5). 야고보도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고 인내하여 승리하라고 권면한다(약 1:12).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의 배경이 증거하고 있듯이, 그리고 오늘날 이슬람권과 공산권이 증거하고 있듯이,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선교를 통하여 성장하였다.
일반서신들이 쓰여질 당시 초대교회는 다른 교훈과 거짓 가르침 때문에 혼란과 분열이 있었다. 퀘스텐버거와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일반서신들은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지상위임령과 파송의 의미를 담은 직접적 선교에 관한 권면과 호소라기보다는 이단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지키는 것과 신자들로 하여금 고난과 핍박을 잘 견디도록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하는가? 찰스 벤 엔겐은 “(교회가) 성령과 거짓 영들 (범신론, 정령론, 뉴에이지, 혹은 물질주의)을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진행되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찰스 크래프트가 지적한 것처럼, 성경은 기독교 선교가 신학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폴 히버트는 비판적 상황화를 통하여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나 이중종교체계(dual religious systems)와 같은 위험성과 부작용을 막으려고 하였다. 비판적 상황화는 무비판적으로 선교지의 문화를 수용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도록 제어하는 장치이며, 동시에 복음을 선교지의 문화적 형태들 속에서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선교지의 주민들이 복음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f. 요한계시록과 선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뿐만 아니라 계시록에서도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이방인 선교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세계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고, 승천하셨고, 재림하시며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특히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1:5; 5:6-7, 12, cf. 요 1:29). 계시록 7장 4절에 등장하는 144,000은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계시록 7장 9-13졸에 등장하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는 각 나라와 모든 족속과 모든 백성과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보혈이었다. 그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그 어린 양은 세계의 모든 성도를 위로하시고, 그들의 믿음과 행함에 상급을 주시며, 아울러 사악한 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 예언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3:20; 21:1-8). 라르킨과 윌리엄스에 의하면, 우상숭배자들, 불신자들, 혐오스러운 자들, 살인자들, 성적으로 비도덕적인 자들, 마술사들,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들은 두 번째 죽음에 해당되는 불 못에 들어갈 것이다(21:8).
사탄은 거짓말의 괴수요,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세상을 희롱하거나 위협하여 영적이든지 경제적이든지 무론하고 신의 형태를 통하여 그를 숭배하게 만드는 것이다(12:9; 13:17-18).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이러한 사탄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러한 사악한 존재와 세력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 천사의 선교,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필요하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이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때까지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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