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10) : 교수 주태근
Ⅴ. 선교와 역사
1. 로마제국의 기독교; A.D. 30-500
그리스, 로마, 히브리의 3대 문명은 기독교 역사의 처음 3세기에 형성된 기독교의 틀을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스 문명은 알렉산더의 정복활동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초대교회의 중심지인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도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헬라어는 서방세계와 동방세계를 아우르는 세계 공통어였기 때문에 이 언어로 번역된 70인역은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전파에 큰 동력이 되었다.
알렉산더 사후 제국이 네 개로 나뉘어지고 그리스 문명도 쇠퇴하게 되자 로마 문명이 등장하게 되었다. 로마는 스페인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북해로부터 사하라 사막까지를 통치하는 대제국이었고 인구는 1억에 달하는 대제국이었다. 로마의 정복활동은 훗날 기독교 전도활동이 용이하도록 준비해주었다. 또한 로마는 해상에서 해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도로를 잘 정비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복음 전도자들이 안정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로마는 기독교 박해가 있기 전까지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한 동안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일파로 여겨져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히브리 문명은 기독교와 가장 밀접한 문명이었다. 유대인들의 산재는 구세주 출현과 복음 증거를 위해 세상을 준비하도록 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배의식, 메시아 기대,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갔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을 위해 로마 제국을 여행할 때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1) 지리적 확장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세계적 종교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미약하였다. 그러나 주후 30년에 유대교의 한 종파로 시작한 종교가 주후 60년에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였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할 무렵에만 해도 유대교적 잔재가 짙게 남아 있어서 지역적인 면, 구성원의 면면,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대단히 편협하였다. 그러나 주후 70년에 로마가 멸망함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사라지게 되자 교회는 비로소 지역성을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독교의 지리적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 스데반의 순교와 그 이후 계속된 핍박은 초기 교회에 큰 타격이었으나 후에 복음전파를 확대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다소 출신 사울의 회심과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경험도 기독교의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의 확장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교회로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꼽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거점으로 선교를 진행하였다. 근 15년에 걸쳐 계속된 바울의 세 차례의 선교여행은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등 인구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바울이 그 당시의 유일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수많은 평신도들이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다. 이러한 선교의 열정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3세기의 기독교 교회의 성장에 관한 정보는 빈약하다.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에뎃사 등의 크고 강력한 교회들이 언제, 누구에게서 세워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도 시대 이집트의 복음전파에 대해서도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판테누스와 클레멘드, 오리겐은 이집트 기독교를 기독교사의 주류로 올려놓는 역할을 잘 수행하기도 하였다.
2세기 말엽에는 터툴리안이 로마 총독에게 기독교인 핍박을 멈추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용감하게 협박할 정도로 기독교 사회가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터툴리안의 열정적인 격려와 시프리안의 유능한 지도력, 락탄티우스의 달변 등으로 기독교 사회는 꾸준히 발견해 갔다. 그 결과 당시 복음은 미약하나마 스페인 남부, 갈리아, 영국까지도 전파된 것으로 사료된다.
3세기경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경 너머로까지 전파되었다. 때가 되자 기독교는 파르티아, 이디오피아, 아일랜드,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안디옥으로부터 주요 상업도로를 경유하여 두로-유로포스(Duro-Europos)를 거쳐 티그리스 강 유역의 자매도시인 테시폰(Ctesiphon)과 셀루시아(Seleucia)까지 전파되었다.
주후 225년에 이르면 카스피해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도 교회들이 있었다. 아마도 최초의 기독교도들은 성령강림절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메소포타미아 거주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에뎃사는 강력한 기독교와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시리아어로 신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2세기 말엽에 기독교가 국가종교가 되었다.
3세기 말경 갑바도기아를 통해 기독교는 아르메니아로도 전해졌다. 위대한 선교사 그레고리 주도 하에 일어난 부흥운동과 티리다테스 대왕의 회심의 영향으로 아르메니아는 마침내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410년에 신약성경은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수많은 역경을 뚫고 지나와서 오늘날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들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도 바돌로매는 아라비아에 복음을 전했다. 또한 그레데인들과 아라비아인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4세기 말엽에 히라 지방에 기독교가 정착되었고 525년경에는 이곳에 기독교가 확고히 정착했다.
인도에도 기독교가 들어갔는데 1세기에 사도 도마가 복음을 처음으로 전했다. 판텐누스는 인도 선교를 위해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를 떠났다. 그래서 인도에는 3세기 이후에는 기독교가 존재해왔고 마토마 교회(Mar Thoma Church)는 키베르 패스(Khyber Pass) 동부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이다. 인도에 있는 기타 시리아 교회들도 오랜 전통이 있다.
이디오피아 선교에 관해서는 빌립에 의해 세례를 받은 이디오피아 내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와 관련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프루멘티우스를 주교로 임명하여 이디오피아로 파견한 사건을 유념해야 한다. 프루멘티우스는 홍해에서 파선을 당한 두 기독교인 젊은이 중 하나로서 왕궁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던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고트족은 다뉴브 강 북쪽에 사는 튜튼족 중에 최초로 기독교를 대다수 받아들인 민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에 로마 제국에 쳐들어온 기독교인 전쟁포로들로부터 복음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울필라스의 선교활동으로 고트족의 선교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5세기 말엽 프랑크족의 회심은 북서유럽의 비로마인들 선교상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 프랑크족은 오랫동안 로마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도 있었는데 496년 크리스마스에 클로비스 왕이 3천 명의 군인들과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건에 이르러 돌파구를 찾았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데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치열한 전투 중에 만약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에게 전쟁에 승리하도록 해주면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고 한 맹세를 지키려는데 있었다. 그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가 한 맹세를 존중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그의 신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기간에 가장 늦게 복음화된 지역은 아일랜드였다. 아일랜드 선교사는 패트릭이었다. 389년경 로마령이었던 브리튼에서 기독교인 부모하에 태어난 그는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당대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12살 때 그는 아일랜드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는데 거기서 그는 양치는 일을 하였다. 유배 중 그의 전생애를 변화시킨 영적 체험을 하였는데 그 이후 어린 시절의 형식적인 믿음이 진정한 믿음으로 변하였다. 6년간의 노예생활 후에 프랑스로 탈출해서 수도사 생활을 하다가 결국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아일랜드에 대한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탈출했던 아일랜드로 다시 들어가 35년간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수천 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성직자로 임명하였다. 패트릭의 영향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었고 고국 이외의 많은 나라에까지 미쳤다. 켈트족 기독교의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되었던 수도원은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선교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도원들은 다가올 미래에 있어서 북유럽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5세기 말엽에 이르러 기독교는 많은 성공을 거두면서 로마제국 전 지역을 넘어 남으로 사하라 사막에서 북으로 하드리안 성, 그리고 동으로 인도에서 서쪽으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에 전파되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 중앙 아시아, 중국까지 전파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주후 431년 열린 에베소 공의회 때 이단으로 정죄되어 로마제국 국경 너머로 추방된 이후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주후 635년 중국문화의 최절정에 달했던 당나라 초기에 중앙아시아를 경유해서 중국에 전파되었다. 선교사 알로펜이 635년에 중국에 도착했을 때 대정 황제는 그를 환영하여 그 자신이 기독교를 배우고 인정하면서 전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로펜과 동료 수도사들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100개의 도시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200년 간 수도원 중심의 기독교를 유지했다. 이후 그들은 주후 845년 열렬한 도교신자였던 우정 황제가 모든 수도원을 헐었을 때 대단한 타격을 받은 적도 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고 13세기 몽고의 지배하에서도 3만 명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는 프란시스코 수도사 등 다른 교파에 대하여 철저히 배타적이었으므로 황제를 포함한 백성 전체를 회심하게 할 수도 있었을 선교적 대의를 이루지 못했다.
2) 수적 증가
예수님은 숫자에 관심있으신 분은 아니셨지만 숫자를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은 질과 더불어 양도 성공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예수님 부활 후 500명의 형제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증언(고전15:6)에 의하면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기독교 선교 초기에는 하루에 3천 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으며(행2:41) 이후 세례자는 5천 명으로 증가하였다(행4:4).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왕성해지고 더 많은 회심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터툴리안은 “우리는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벌써 세상을 뒤덮고 있다.”고 자랑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하르낙의 의견을 빌리면 냉철하게 바라볼 때 2세기 중엽 이후까지 기독교인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로마제국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3세기 초에 기독교는 이미 브리기아 지방에서 주된 종교로 자리를 잡았으며 소아시아 지방 전지역에 기독교는 인구 중 가장 비중이 큰 소수집단으로 성장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회심자들이 대중운동을 할 정도로 많은 숫자에 달하였다.
260~300년 사이 40년 간의 평화기간 중 교회는 핍박 때문에 오는 불편과 어려움 없이 대단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디오클레티누스 황제의 집권 직전이었던 40년 동안은 기독교 역사상 전례 없는 성장시기였다. 수천 명에 달하는 회심자들이 교회로 들어왔으며 교회는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단체로 성장하였다. 3세기 말엽 수적으로 가장 큰 기독교의 중심지는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두 곳이었다. 에뎃사는 기독교가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은 첫 지방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회심 이후 기독교는 성장기를 맞이했다. 황제의 보호와 국가재정의 지원하에 기독교는 4세기에 이르러 급속히 성장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인의 숫자는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 다음 세기에만 적어도 네 배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교회는 12,000명의 남자와 그와 비례할 만한 숫자의 여자와 어린이들이 한 해 동안에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가 불법종교였을 때는 망설이던 이방인들이 너도나도 다투어 정복자들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원주민들이 기독교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북아프리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이집트 도시들에는 성직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테아이스(Theais) 사막에는 수도사들이 들끓었다. 4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에뎃사 주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더욱이 기독교 지원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로마 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토착 종교들을 핍박하기까지 했다. 기독교를 배교하는 자들은 교회의 특권뿐만 아니라 국가의 권리도 박탈당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4세기에 기독교인 수가 4배로 증가했음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어느 곳에서도 저항세력이 존재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대인들이 기독교 복음에 가장 적대적이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틈은 더욱 벌어져 1세기 이후 유대인들 중에 회심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미워하다가 나중에는 핍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핍박으로 인해 기독교는 유대인들이나 셈족에게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독교는 카르타고 주변의 라틴어족 사이에서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카르타고인들 사이에서는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특히 베르베르족에게는 거의 전도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로아스터교와 경쟁을 해야 했던 페르시아에서는 기독교의 진전이 별로 없었다. 이집트에서도 기독교는 오랫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만 융성할 뿐이었다. 이방종교는 아직도 여러 곳에서 기성을 부리고 있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층계급 출신들이 많았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기독교는 반드시 상층계급보다는 오히려 하층계급의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어찌하든지 개종자를 많이 얻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회의 재산이 늘어나면서 상층계급들이 교회에 많이 몰려들었다. 후에 기독교가 국교화되었을 때는 엄청난 숫자의 상층계급의 사람들이 교회로 밀어닥쳤다. 이 기간 동안에는 조직적인 선교활동은 없었고 평신도들이 복음을 전파했다. 평신도들은 자신이 노예든지, 상인이든지, 군인이든지 상관없이 세속적 직업을 복음을 확장하는데 사용하였다. 심지어 유배자가 되었을 때도 그들은 신앙을 산간벽지에까지 전하였다.
3) 문화적 침투
예수님은 사회의 개혁보다는 개인의 구원에 더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후자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그가 사회적 필요에 대해 개의치 않거나 무관심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온 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인간의 의무가 총괄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복음은 우선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사회적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삶을 영위하였고 자식을 길렀으며 이웃에 사는 비그리스도인들과 병행하여 교역을 했다. 200년 경에 기독교의 영향이 엄청나게 퍼져 있었기에 터툴리안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우리는 벌써 새로운 집단이나 제국의 모든 영역의 삶에 속속히 스며들어 있다. 도시, 섬, 마을, 촌, 시장, 막사, 부족들 사이, 왕궁, 원로원, 법정 등 신전 외에 당신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들은 고립된 지역에 살지도 않았다. 터툴리안은 계속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격리되어 숲속에 사는 브라만들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세상에 살면서 법정, 공중목욕탕, 작업장, 주말시장, 기타 모든 상업지역을 공용하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항해하고 밭을 경작하고 거래를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이요 순례자들”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무국적자들-천국의 식민지에 속한-이었으며 하루빨리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의로운 통치를 시작하시기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매우 독특했기 때문에 ‘제3의 종족’이라고 불리웠다. -로마인이 제1, 유대인은 제2였다.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를 철저한 우상숭배라고 공공연히 간주하였고 죽음을 무릅쓰고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이 반역죄로 몰릴 때 그들은 자기들이 황제의 안녕과 제국의 평화로운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왔음을 주장하면서 결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초기 2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공공기관이든 군대이든 어떤 형태로든 정부를 위한 봉직은 거절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정부의 고용인이었던 사람들은 예외로 하였다. 3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들이 법정 공무원, 군대 등 모든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구원의 도리로 여기고 철학의 한 분파로 보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복음전하는 데 만족하였다. 2세기에 이르러서야 철학자들을 포함한 유식한 자들이 나타나 헬라사상을 연구하고 답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순교자 저스틴은 철학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경건과 함께 중요시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철학이 헬라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경건에 도움이 되고,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선생이라고 대담하게 선포하였다.
이러한 시도에는 위험성도 있었고 비난도 받았다. 타티안과 터툴리안은 좋든 나쁘든 모든 철학을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타티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 말하였고 끔찍한 부정(不正)의 죄를 범했다. 터툴리안은 복음은 믿음을 강조하도록 해야지 이성으로 따지도록 해서는 안되며 기독교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 교부들은 기독교 자체를 철학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교리가 참진리이며 따라서 진정한 철학이라고 믿었다. 진실로 그것은 철학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지혜-최고 수준의 철학이었다.
가장 영향력있는 변증가는 뛰어난 능력의 오리겐(Origen)이었는데 그는 클레멘트를 뒤이어 엘렉산드리아에 있던 교리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저명한 기독교 변증인 『셀수스에 반대하여』(Contra Celsum)는 248년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의 어느 변증가도 해내지 못할 정도로 이방철학자들을 감동시켰다. 그와 함께 기독교는 단순한 인위종교의 수준을 넘어 성경을 근거로 하면서 이성을 당당하게 이용하는 성숙한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방철학과의 근본 분쟁은 논증문제가 아니라 세력다툼이었다. 이방철학자들은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들의 시간을 다 바쳤다. 그러나 기독교 교부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조용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초대교회의 특징
초대교회의 두 가지 뛰어난 미덕은 사랑과 순결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당시 이방인들의 삶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플라톤은 가난한 자들을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키케로는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사랑을 베풀라고 충고하였다. 로마사회는 고아들을 전혀 돌보지 안니하고 매춘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도록 방치하였다. 노예들은 재산으로 간주되어 사고 팔렸다. 기독교적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계층과 모든 조건의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바쳐졌다. 막시미우스 대자(Maximius Daza)의 집권기간 중에 발생한 재난을 언급하면서 유세비우스(Eusebius)는 보고한다. “그때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아주 밝은 빛을 비춰주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지독한 질병 중에 그들의 형제애와 인정을 행동으로 보여준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어떤 이들은 시체들을 돌보고 매장해 주었고 어떤 이들은 그 도시에 사는 굶주리는 이들을 한곳에 모아 빵을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환경 속에 존재하였다. 우상숭배와 부도덕이 대표적인 두 가지 큰 죄로 특징된다. 우상제조업은 불법 직업으로 간주되었고 비록 생계를 꾸려나갈 다른 방도가 없더라도 이 직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우상숭배보다 더욱 교묘하고 위험한 것은 황제숭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역죄의 낙인을 찍어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죽은 이들을 존중하여 기념하였지만 황제를 예배하는 것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3세기 초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여 260~300년 사이 40년 간의 평화시기에는 엄청나게 부패의 박차를 가했다. “데시우스(Decian)와 디오클레티누스(Diocletian)때의 박해기간 사이에 교회가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집단이 되자 부에 대한 공격을 점차 누그러뜨리게 되었다. 시프리안은 그의 교구인들이 돈에 미쳐있고, 기독교인 여인들이 얼굴에 화장을 하고, 주교들은 돈을 많이 받는 국가의 공직에 앉아 떼돈을 벌어 엄청난 이자를 받고 고리대금업을 하며, 사소한 손해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배반한다고 비판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성직자들이 성직임명을 경쟁하여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개탄하였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동안 세상은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5) 교회의 박해
예수는 “너희를 죽이는 자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셨다. 초대교회 역사가 이 말씀들을 증명하고 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 야고보는 목이 잘렸다. 베드로의 생명이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나기도 하였다.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 고백하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핍박의 세대는 로마 원로원이 아니라 유대인으로부터 왔다. 로마인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원인과 성격 그리고 범위를 확실히 밝히기는 쉽지 않다. 평가하기 어려운 진실이 비난과 역공격들 때문이 그 실상이 흐려졌고, 역사적 자료들이 부족하여 역사적 사실들조차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로마시대의 첫 번째 박해는 A.D.64년 로마가 네로에 의해 불탄 후 닥쳐왔다. 두 번째 박해의 기간은 도미티안 황제 때였는데 이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으로 귀양 갔다. 몇 해 후에 안디옥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와 서머나의 주교였던 폴리갑이 순교당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도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이 덮어씌워졌다. 코두모스 황제 치하에서 상황은 호전되었으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말기에 다시 악화되었다.
초기의 2세기 동안 박해는 지역적이고 간헐적이었다. 사람들의 기질과 지방행정관의 처분권, 황제들의 의도 등에 따라 박해의 기간과 심도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랐다. 3세기 전반부에는 세베루스, 막시미니우스, 데시우스 등에 의한 간헐적인 박해가 있었다. 그 후 갈리에누스가 최초로 관용을 허용한 칙령을 반포한 261년 이후 40년에 걸친 전례에 없었던 평화시기가 있었다. 이 평화는 디오클레티누스 황제가 303년에 반포한 박해칙령에 의해 갑자기 깨어지고 말았다. 전제국에 대한 일반법으로 제정된 이 칙령은 니코메디아에 있던 성당을 불사름으로부터 시작되어 10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1500명의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재산을 잃었다. 로마의 주교를 비롯한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변절하였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난 10년 간 몰수했던 교회재산을 돌려주는 등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시킨 결과를 낳았다. 온갖 고문이 자행되었지만 헛수고였다. 죽음을 피하려고 하기는 커녕 때로는 죽음을 달게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순교자 저스틴은 로마에서 맹수들에게 먹히도록 친구들과 원수들에게 말리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이 사형선고를 받을 때면 오히려 감사를 드렸다고 전한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한 사람이 순교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방신을 버리고 기독교로 귀의하였다.
6)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디오클레티누스 황제 때의 엄청난 박해가 끝나자 전례 없던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이 획기적인 사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이었다. 왕권을 놓고 막센티우스와 혈전을 벌이기로 작정한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늘에 불타는 십자가와 “이 증거를 가지고 정복하라!”는 글이 씌어있는 것을 보았다고 유세비우스가 기록하였다. 313년 초에 콘스탄티누스는 저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고 제국 내 모든 종교 위에 완전한 자유를 보장했고 디오클레티누스 황제 때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반납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재임시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교회 역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325년에 황제 자신이 소집한 니케아 종교회의였고, 또 하나는 같은 해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의 완성이었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 성직자였던 유세비우스는 초대교회로부터 니케아 종교회의까지의 기독교 발전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교회사를 남겼다.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종교회의에는 318명의 주교들과 많은 성직자들이 참석하였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간의 논쟁이 가장 치열하였고, 전자가 승리를 거두며 예수 그리스도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에 뒤이어 기독교는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깃발 아래로 몰려들었다. 교화와 국가의 동맹 덕택에 엄청난 발전과 특권을 가져왔으나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분위기나 도덕성을 고양시키지는 못하였다. 콘스탄티누스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 중 서방세계의 기독교회는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때를 따라 또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국가와 제휴해 왔고 지원을 받아왔다. 성직자의 세력은 영적 세력을 해치도록 정치세력과 야합해 갔다.
콘스탄티누스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실상 인구의 10%를 넘지 못했으며, 기독교와 이교들 모두를 용납하였다. 나중에 세력을 장악한 후에 그는 좀 더 확고한 기독교 신앙입장을 취하였다. 동전에서 이방종교의 상을 제해버렸고, 주교들에게 교권과 사법권도 주었다. 교회재산은 세금을 면제해 주고, 일요일은 예배를 위한 주일로 만들었다. 교회 건물 건축과 구제를 위해 거금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세례 받는 것은 임종시까지 미루었다.
두란트는 그를 가리켜 “노련한 장군이요, 뛰어난 행정관이며, 최고의 정치가이다”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사치스러웠고 변덕쟁이였으며 잔인무도하였다. 그는 야심만만하였고 아첨에 약한 자였다. 절대군주로서 그는 무력사용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조카를 무력으로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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