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

구약성경과 선교-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7. 31. 11:47

선교학 강의록(7) : 교수 - 주태근

 

. 구약성경과 선교

 

 

기독교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출발점으로 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구약성경를 떠나서 이해될 수 없다. 구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선교의 주역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화란의 선교학자 요하네스 블라우(Johannes Blauw), 독일의 신학자 겐지헨(H. W. Gensihen)과 한(F. Hahn)은 구약에서 선교 활동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요하네스 블라우(Johannes Blauw)는 구약의 선교사상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거나 간과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반면 바빙크(J. H. Bavink)는 이와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명히 구약에서도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심적 선교를 찾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파송의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차원에서는 구약에는 선교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의도적으로 선발된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한 선교활동은 없었으나 구약은 처음 선교 사상을 내포한다. 구원사적 관점(Heilsgehichte)에서 구약 연구는 구약에서 선교를 부각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선교신학자이며 19세기말 현대 개신교 선교 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구스타프 바르넥(Warneck)은 구약을 선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중심사상을 보편주의로 설명하였다. 보편주의는 하나님의 지배와 능력이 세계에 미치며 그분의 사랑과 자기계시가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편성은 선교의 동기로 작용한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민족적 종교가 아니라 보편성이 있고 세계적 종교임이 구약에서 나타난다. 이 문제에 대해 바르넥(Warneck)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무엇보다도 족장 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는 배타적 국가 종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이방 나라의 신으로 말하였고, 이방 나라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여호와는 처음부터 천지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의 축복은 처음부터 열방을 위한 것이다.”

 

화란의 선교학자 블라우(Blauw)도 이 점에는 동의하면서 구원사 관점에서는 구약은 보편적이요 동시에 선교적이라고 하였다.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보편주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은 모든 족속을 위한 것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구원과 봉사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에게 한정되는 이러한 선택 사상은 특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이러한 특수주의(particularism)도 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이해된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만의 구원은 믿고 선민으로써의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사명을 인식하지를 못했고 그러한 생각을 갖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고 신성을 증거하는 중보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다.

 

구약선교를 이방인 앞에서 이스라엘의 현존으로서의 선교, 구심적인 것으로 구분한 순드클러(Sundkler)는 다음과 같은 개념을 피력한다. “구심적 선교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장소 안으로 이끌리는, 자력적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심적 선교란 구원사역과 관련하여 안으로 모아들이는 움직임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구약에서 이방 나라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만 하는 선교적 책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선교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기술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선교하기 위해 이방 나라들에게 가기보다는 미전도 족속들이 믿음을 갖기 위해 솔선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만 한다.

 

순드클러(Sundkler)구심적 선교자석이 가진 자력과 같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에 서 있는 사람에게로 이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원심적 선교란 구원사역과 관련하여 밖으로 나가는 움직임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구약 신자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기술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구약 신자들은 주변 국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아가 오신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정력적으로 전하였다.

 

순드클러(Sundkler)“‘원심적 선교(보편성)’는 메신저들이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소식을 먼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보쉬(Bosch)선교사는 떠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선교개념은 매우 강한 지리적 요소를 가진 것으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지상 위임령이 원심적 선교에 대한 분명한 지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보냄은 바로 원심적 선교의 본질적 요소이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 되었으니”(24:17)라고 말하였다. 이사야 5511절은 그 어떤 구절보다도 파송 의도를 잘 나타내 보여준다. 여호와는 그 입에서 나가는 말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 70인역은 이것의 강조점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내가 무엇을 의도하였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또한 어떤 것보다 자주 나타나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내심과 선지자직과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예가 모세이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모세는 여호와의 보내신 사람으로 제시되고 있다(3:10-15; 34:11; 삼상 12:8; 105:26). 여호와는 나단과 갓을 다윗에게 보내신다(삼하 12:1; 24:13). 그분은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까?” 물으시고,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한다(6:8). 하나님의 신(성령)이 이사야 위에 임하므로 그가 보냄을 받아 복음을 전하게 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게 하신다(6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들로써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선교라 말할 수 있다. 선교 사역은 하나님의 보편적 선교 원리에 의하여 모든 열방과 민족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선교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크나큰 도구로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 사명을 동일하게 수행해야 한다.

 

블라우(Blauw)는 구약의 선교 사상은 보편주의라고 말하면서 원심적 의미에서의 선교적 동기나 명령은 없다고 하여 구약의 구심적 선교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와는 아주 다른 견해를 가진 로울리(H. H. Rowley)는 구약에서도 보냄(sending)의 의미를 가진 원심적 선교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는 유대교 유대주의라는 특수주의를 벗어나 모든 민족과 지역을 포괄하는 범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해왔으며, 그것은 기독교 선교가 유대인만이 복음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과 민족을 그 대상에 포함시키는 보편성으로 나아갔다. 결국 기독교 선교는 원심적 선교구심적 선교가 상호간에 역동적 관계성을 맺어야 하며, 속에서 원심적 선교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서의 선교에 대한 연구는 파송하시는 분으로서 선교의 주체(missio Dei)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출발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단순히 보내는 것에 있지 않고 보내시는 그분이 창조주라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구약의 선교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서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1:26-28). 인간창조가 피조세계에 자신의 대리자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보내심의 사건이다. 하지만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 계획은 인간의 타락으로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된다. 그 후로 하나님은 시대마다 자신의 사람을 택하셔서 줄기차게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홍수 후에 택함을 받은 노아는 창조 때의 첫번째사람과 연결되며, 바벨탑 사건 이후 선택된 아브라함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한 사람이다.

 

구약성서 전체에 하나님의 선교 계획이 드러나 있다.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하나님이 자신을 섬기는 종의 백성이 필요하심을 보여준다. 이 백성은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모든 민족과 열방은 다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19:6; 47:9).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는 구속의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열방인 것이다(18:18). 이스라엘은 존재 자체가 선교를 지향한다. 이스라엘의 자기 정체성은 구약 선교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로 나타난다. 시내산 언약 사건은 이스라엘이 혈연이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연대성으로 묶여진 공동체가 아니라 야훼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출애굽 과정에는 야곱의 자손뿐만 아니라 수많은 잡족과 함께 하였으며(12:38) 그들 가운데는 섞여 사는 무리가 많았기 때문이다(11:4). 이들 모두가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신앙공동체가 된다. 이후 가나안 정복과정에서도 그 지역의 많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신앙으로 개종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약속의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왕국 성립 이후 그 통치권이 주변국가에까지 미치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영토의 확장을 통해 야훼 신앙의 확대를 가져오는 원심적 선교의 일면을 보여준다. 특별히 다윗-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영토는 남쪽으로 아카바만, 북쪽으로 유프라테스강,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트랜스 요르단 지역으로 확대된다(삼하 8:1-14; 대상 18:1-13). 다윗에게는 주로 그렛과 블렛 사람들로 구성된 용병부대가 있었다(삼하 8:18;15:18; 왕상 1:38). 솔로몬 시대의 인구조사에는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이주민(게르)153,600명에 이른 것으로 보도된다(대하 2:17-18, 대상 22:2 참조).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솔로몬의 성전봉헌 기도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노크리)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8:41-43; 대하 6:32-33). 또한 이주민이나 이방인에 대한 다양한 율법규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영토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입장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하는 이주민이나 이방인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선교적 차원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도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계획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구로 삼아 땅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기 위함이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 포로기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가 아닌 그들의 보내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에 전해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된다(예루살렘의 박해가 오히려 이방지역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듯이 행 8장 이하 참조). 이스라엘이 열방으로 보내진 역사적 상황은 이방을 향해 예언자들이 보내지는 기회가 되었고, 앗시리아를 배경으로 아모스 선지자의 열방을 향한 신탁(1:3-2:16)과 바벨론을 배경으로 에돔에 대한 오바댜의 심판(1:1-21)이 선포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보내심을 입었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도 대언할 수 있었다. 열방을 향한 이스라엘의 선교는 시편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 예배공동체는 그들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야훼 하나님의 신앙으로의 초청과 권유를 반복하여 표현하였다. 시편 117편은 시편집 가운데 가장 짧은 시편이지만 그러한 선교적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117:1-2).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선교신학은 이방인을 포함한 만인을 대상으로 한 초청(초대)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시편 67편에서도 열방을 향한 선교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시편 671-2절에서는 민수기 624-26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을 향한 아론의 축도가 열방을 위한 구원으로 확대 해석되고 있다. “하나님(엘로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여기에서 구약에서 보통 개인적인 언약의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신명 야훼가 창조세계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엘로힘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리고 민수기 축도의 수신자가 2인칭 단수인데 비해 시편 67편에서는 수신자가 우리’, ‘그리고 만방으로 확대된다. 이뿐 아니라 3절에서 7절까지 기술된 땅과 관련된 시문은 아브라함의 복과 평행을 이룬다(12:2-3).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열방의 모든 민족과의 언약으로 확장된 것을 찬양하고 있다(67:2).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찬양과 기도가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세계적이며 만인을 위한 선교의 기초 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오코예(J. C. Okoye)는 구약성서의 선교를 연구한 후 구약의 선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보편성의 국면이다. 이것은 구원의 보편성과 여호와 앞에서의 공의의 보편성으로 나타난다.

둘째로 선교 안에 있는 공동체의 측면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존재 자체가 열방 가운데 나타나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나 그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스라엘의 선택은 하나님의 영광에 공헌한다는 인식이다.

셋째로구심적 선교의 측면이다. 예컨대 이사야 22-5절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모든 열방이 시온으로 순례하기 위해 몰려들어 거기서 하나님의 토라와 그의 길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넷째로 원심적 선교의 측면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이방인들에게 나가서 회심을 통해 그들을 개종자로서 언약 안에 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사야 561-8절이 이러한 비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구약성서의 선교를 위해 열쇠가 되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와 세상에 대한 보편적 통치가 나타나는데, 전자는 후자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자손을 주시는 데에 작용한 궁극적 동기는 열방의 구원이었다.” 이것은 나이트(G. A. F. Knight)가 말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519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는 통찰이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