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강의록(11)-교수 주태근
3. 이슬람교와의 접촉: A.D. 600-1200
빌 두란트(Will Durant)라는 학자는 7세기의 이슬람 세력의 돌발적 출현을 두고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여 절반이나 개종시킨 아라비아 반도의 폭발적 활동은 중세 역사상 가장 특이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570년 무함마드 출생;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문맹자였는데, 40세에 자신이 알라신의 사자라고 하는 환상을 본 후 메카에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 모여드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성과 유일사상을 불어넣었다. 632년 이슬람 정복전쟁은 시작되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아랍을 통일하고 질풍노도와 같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715년에는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물론 다메섹, 안디옥, 예루살렘, 가이사랴, 알렉산드리아, 페르시아도 정복하게 됐다.
그 후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두 번째 정복활동을 펴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슬람과 기독교 일반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피정복민에게 꾸란과 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류시민으로 차별을 겪어야 했고 교회를 세우거나 전도를 하지 못했지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고 '책의 사람들'로 간주되어 행정과 교육 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으며 꽤 높은 신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이슬람의 정복에 있어서 기독교가 꽃 피웠던 북아프리카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버린 것은 의아해할 만하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터툴리안과 시프리안 그리고 어거스틴 등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고 당시 기독교 인구의 1/4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교회의 급속한 몰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진정한 이유는 먼저 북아프리카 교회는 진정으로 토착화되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모국어로 성경을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학 논쟁들은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켜 버렸다.
십자군 운동(12-13세기);
교회사 가운데 어두운 두 면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 박해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1095년과 1272년에 걸쳐 7차의 원정이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 비잔틴 제국을 지지함으로 터키 침공을 막고자 함이었고 셋째 동서방 교회의 통합이었다. 십자군의 가장 나쁜 결과는 모든 이슬람 세계의 격리였다. 침략 행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초기 교회의 실천 사항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잔악한 일을 저질렀다. 십자군 운동은 교회사의 어두운 페이지이다. 십자군 운동은 시작부터 참여자들의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개인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실패가 예견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동기가 컸다. 로마 교황청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비잔틴 제국을 도와 투르크족의 침입을 막으며 동, 서방 교회의 융합을 꾀했다. 그러나 탈환한 예루살렘은 150년 동안만 명맥을 유지했고,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이슬람교도들보다 더 큰 피해를 입혀 결국 동방 교회와의 골은 더 깊어졌다. 십자군 운동의 이득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회, 경제적인 것이었다. 예술, 과학 등의 분야에서 이슬람의 선진 문물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이 전해졌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육상, 해상 교통을 자극해 해상무역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에 끼친 십자군 운동의 영향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포학한 행위들을 자행하여 이슬람교인들의 가슴에 씻지 못할 흉터를 남겨주었다. 기독교 세계에서 십자군 운동은 거의 잊혀졌지만 그들의 더러운 행실에 대한 기억은 이슬람교도들의 가슴에 오늘날까지 깊이 박혀있다. 기독교도의 잔악성과 복수 행위에 대한 악명은 중동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오늘날까지 큰 어려움이 되고 있다.
4.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 A.D. 1300-1700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단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크고 영향력있는 조직체이다. 실제적으로 13억3천 정도의 신도들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발견된다. 기나긴 역사를 지나면서 발전과 쇠퇴의 과정을 점철해 왔다. 신성로마제국 치세하에 최전성기를 자랑하고 있을 당시 이 교회는 유럽의 정치, 문화, 경제, 종교생활 전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교회의 최대의 손실은 신교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대다수 지역을 잃었다. 그러나 유럽의 손실을 그 후 몇 세기 동안 선교활동을 통해 아시아, 아프리카, 신대륙 등지에서 세력을 확보하였다.
로마 가톨릭 선교활동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외정복 활동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 프란시스코 선교사들이 포르투갈 탐험대원들을 따라 마디라(1420), 아조레족(1431), 케이프 버드 제도(1450)까지 진출한다.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선교사들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와 함께 인도로 항해해 갔다. 프란시스코 선교사들은 1500년에 카브랄과 함게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1537년 교황 바울 3세는 신대륙의 인디언들을 “하나님 말씀을 설파하고 선한 삶의 본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라고 명령하였다.
1454년경 교황 니콜라스 5세는 포르투갈에게 아프리카와 동인도 제도에서 단독적으로 전도할 특권을 주었다. 스페인이 신대륙으로 진출함에 따라 포르투갈의 세계탐험 독점권은 박탈당하였다. 이후 1493년 분계 교서에 의해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동인도 제도에서의 선교권을 장악하였고,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 특권의 보답으로 이들은 해외점령지에서 이교도들에게 전도하여 개종시켜야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가톨릭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이교도 개종을 좀 더 긴밀하게 지도할 수 있도록 1622년 신앙전도를 위해 성스러운 집회를 창설하여 지도하였다. 이후 1628년 로마의 중심 신학교였던 선교대학이 설립되어 전세계의 선교지로부터 온 토착민 성직자들을 훈련시켰다.
선교에 헌신하는 많은 성직자들로 인하여 지원자를 따로 모집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4개의 교단이 선교사업의 책임과 영광을 나누어 가지도록 부름 받았다. 프란시스코 수도회(1182-1226), 도미니칸수도회(1170-1221), 어거스틴 수도회(1256), 예수회(1540)였다. 초기단계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배출되었고,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에서도 공급되었다.
1) 중국
중국선교는 1294년 프란시스코 수도사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잔존자들 로마가톨릭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초기선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교회를 세우고 150명의 중국인 신학생을 훈련시켰으며, 북경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가 죽을 때(1330) 10만명의 신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몽고족 왕들이 물러나고 한족이 왕위에 오르자 명나라 지배자들은 선교사를 몰아내었다.
200년 후에 예수회 소속 마테오리치(1552-1610)가 선교사로 들어오게 된다. 북경에 온 리치는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유학자로 행세하였다. 또한 서양 선물로 관리의 신임을 얻어 수도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동료와 함께 황제의 공식 시계조립자로 활동하며, 지식인들을 만나 개종시켰다. 중국 여러 지방에 여행 허가를 받아 1650년경 25만명 정도의 개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1724년과 1736년에 기독교회에 대한 박해령이 발표되었고 중국에서 큰 패배를 맛보았다.
2) 일본
로마가톨릭의 최고의 선교사로 간주하는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남부인도에서 선교활동 후 1549년 다른 두 명의 예수회원과 일본인 회심자 한명을 통역관으로 데리고 일본에 도착하였다. 2년간 일본에서 선교하였고 그 뒤 예수회 수도사들이 활동하였다. 당시 정치상황과 피폐한 신도(神道), 부패한 불교 등으로 1581년 일본에는 200개 교회와 15만 명의 신도들이 생겨났다. 특히 미가도의 대신이었던 노부나가는 새로운 종교의 정신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6세기 말엽에는 5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암살은 기독교선교활동의 침체를 가져왔고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가톨릭에 등을 돌리면서 선교에 어려움이 왔다. 1606년 1614년 반기독교 칙령 이후 모든 외국 선교사들은 축출되고 핍박받아 신앙을 부인하거나 순교를 강요당하였다. 1638년에는 3만 7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시마바라의 고성에서 저항하다 4개월 만에 굴복하고 무참하게 대학살 당하였고, 230년 동안 일본은 외부세계와 단절되었다.
3) 필리핀
필리핀 제도는 1521년 마젤란의 운명적인 세계일주 기간 중에 발견되었으며, 신부 레가스피와 어거스틴 수도사들에 의해 조직적인 선교활동이 1564년에 시작되었다. 그 뒤 프란시스 등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반야만적인 섬주민에게 기독교와 문명기술을 가르쳤다. 스페인의 필립2세는 식민정책을 기독교 전파에 두고, 가르치는 자, 설교자, 박사들을 대거 파견 섬나라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교회, 병원, 학교가 설립되었고, 1세기 안에 2백만 명 가량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토착민 출신 성직자들이 증가하고 1800년에는 필리핀 사람이 감독에 올랐다. 필리핀 가톨릭교회는 바다를 통해 인도네시아로부터 이슬람이 전해지는 것을 막았다.
필리핀 선교의 성공요인은 예수회가 여러 섬에 훌륭한 교육제도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여러 가지 종교적 신념과 관습들을 유지하도록 허용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토착민들과 결혼을 함으로써 인종 차별을 제거하였고 혼합문화를 창출하였다. 이와 더불어 스페인은 거의 4세기 동안이나 꾸준히 필리핀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이 기간 중 교회는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이 섬나라에 기독교를 보급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4) 인도차이나
동남아시아의 선구적 선교활동가는 프랑스 예수회 신부인 알렉산더 로데(1591-1660)였다. 그는 안남어를 완벽히 배워 지식층과 지배층에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초기 개종자중 200여 명의 불교승려들이 있었는데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외에 로데는 전도자들에게 병자들을 돌보는 방법을 가르쳐 가가호호 방문을 쉽게하여 선교하였고 짧은 기간 30만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베트남이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다음으로 기독교화가 잘된 나라이며 남부 베트남에는 400만명의 로마 가톨릭이 있다.
5) 인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발견하였다. 그를 수행하였던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이 가톨릭교회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슬람교도인 무굴 사람들도 이 시기에 들어왔는데 포르투갈은 무역에 관심이 있어 서해안 몇몇 작은 식민지에 만족하였으며, 무굴족은 정치적 정복에 관심을 기울여 대륙의 대부분을 침략하였다. 또한 포르투갈 상인들의 방탕한 생활방식은 기독교에 대한 나쁜 평판을 심겨주었고 힌두교의 엄격한 카스트제도는 극복하기 힘든 방해물이었다. 또한 포르투갈 이외의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하여 포르투갈이 제한을 두어 선교에 어려움이 있었다.
인도에서 예수회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란시스 사비에스는 1540년 3년간 인도에서 활동하였으며, 무굴 지배자였던 악바르 황제가 지적 호기심으로 1579년 선교사들을 초대하였다. 루돌프 아카비바 신부(1550-1583)가 종교적 토론을 하였으나 악바르는 신앙을 거부하였으며, 예수회는 고아 지방으로 철회되었다. 이후 아카비바 신부는 광신적 힌두교도에게 살해당하였다. 1590년 악바르 대제는 신하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법령을 발표하였으나 개종자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로버트 드 노빌리신부인데 이탈리아 귀족 출신 예수회 신부로 1605년에 고아에 도착했다. 남부 마두라에 거주하며 개종자를 별로 얻지 못하자 그는 로마 브라만으로 꾸며 음식과 의복을 포함한 인도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였으며, 힌두교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유럽인 성자라는 명성도 얻는다. 힌두교도들이 몰려와 42년 동안 상류층 전도를 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고, 그 사후 17세기 말경에 마두라에는 15만 명의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6) 신대륙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경제적, 정치적 동기와 더불어 종교적인 동기도 포함되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여왕 두 사람은 원주민의 기독교 전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콜롬부스가 두 번째 항해 때 그는 의사한 명과 외과의사 한명과 더불어 일단의 성직자들을 데리고 갔다.
신대륙 최초의 선교사들은 프란시스칸과 도미니크 수도사들이었다.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은 1500년 브라질로부터 1523년 멕시코에 도착하였다. 도미니칸 수도회원들은 1510년 아이티에서 1532년 페루에 까지 진출한다. 예수회는 1549년 브라질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1555년에 탐험가들과 정복자들의 뒤를 이어 가톨릭 선교사들이신대륙에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토착 황인종들을 잔인하게 다루자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이 완전히 사라져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다가 자리를 채웠다. 3세기 동안 브라질에만 600-800만 사이의 노예들이 투입되었다. 대량학살에 소리 높여 대항한 수도사는 도미니칸 선교사였던 바돌로뮤 드 라카사스(1474-1566)신부로 7차례나 스페인에가서 탄원하였다. 노예상선은 열악하였으며 반수는 배안에서 죽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들을 위해 사역하였으며, 성 피터 클레버(1581-1654)는 44년동안 30만 명의 흑인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 주었다.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활동은 3단계로 나뉘어진다. 1단계는 군목들은 군인들과 함께 원주민을 가혹하게 다루는 군인들을 조사하여 꾸짖었다. 2단계 또는 선구적 단계에서 수도승들은 리덕숀(reductions)이라고 알려진 선교기지를 설립하여 원주님 선교를 용이하게 하였다. 리덕숀에서 원주민들은 황제의 피보호자들로 간주되었다. 이곳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스페인 문화를 받아들였다. 3단계로 선구적 상황은 질서정연하고 문명화된 관청에서 맡아보게 되었다. 1세기 내에 스페인사람들이 교회, 학교, 도서관, 법원, 하수구, 도로 등의 모든 영역을 다 지배하게 되었다.
식민시기에 로마 가톨릭 선교지는 8개의 기본 지역구로 나뉘어졌다.
도미니크와 프란시크코 수도승들이 1514년에 동북부 베네수엘라의 쿠마나 선교지에 도착하였다. 1658년과 1758년 사이에 수백 개의 선교기지가 카푸친회에 의하여 광대한 베네수엘라 평원인 마라카스의 나노스에 세웠졌는데 이곳에는 오늘날 거대한 목축장이 있다. 1670년에 오리노코 강 유역에 예수회에 의해 선교지가 설립되었다. 카푸친회와 프란시스코회는 1734년에 오리노코 상류에서 예수회와 합류하여, 예수회가 약 30년 후에 축출될 때 전선교지를 관할하게 되었다. 기니아의 카프친회와 프란시스코회의 노력으로 선교회가 세워진 것은 1724년이었다. 100년 후 혁명자들의 공격을 받아 선교활동은 잠정적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에쿠아도르, 페루와 서부 브라질의 메이나스 선교의 선구자는 1560년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였다. 프란시스코 수도사들도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 결과 예수회만 50만명의 인디언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장 특출한 선교사는 예수회 신부 사무엘 프리츠(1654-1724)였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가 떠나가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날 볼리비아의 동부지방에 위치한 카코변방 선교지는 예수회와 프란시스코 수도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적대적 지방에서는 선교가 어려웠다. 카코 인디언들은 고집이 세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선교는 파라과이의 예수회가 담당한 리덕숀의 활동이었다. 실제로 이 구역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지역을 담당하였다. 종교는 이들 리덕숀들의 중심이 되었다. 기도로 시작되고 교회 잔치는 성대했다. 그러나 이방관습이 잔존해 있었다. 1767년 축출되기 이전에 예수회 수도사들이 세운 100개의 리덕숀에서 약 100만 명의 인디언들이 세례를 받았다.
남아메리카에서의 로마 가톨릭 선교활동은 두 차례의 큰 패배를 겪게 되었는데 한번은 18세기 중엽의 예수회 선교사의 축출과 19세기 후반의 독립전쟁 당시에 겪은 손실이었다.
3천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축출되었는데 1759년 브라질의 식민지였던 포르투갈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이 빈틈을 타 멤버들이 메울 수 없었고, 토착민 성직자들 또한 없었기에 예수회 수도사들이 60-70년 후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선진들이 남긴 업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늘날가지 훌륭하게 교육받은 토착민 출신 성직자들이 부족하다는 점이 이 지역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대의 약점이다. 문제는 인디언들을 위한 성직자가 되기 위한 적당한 교육적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참한 사건은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독립전쟁이었다. 이때까지 교회와 국가는 하나였다. 대부분의 정부와 교회 지배자들은 스페인 출신이었다. 브라질의 경우에는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이러한 제도하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엄청난 권위를 소유하였고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성나서 날뛸 때 그들은 식민지제도에 대한 적대감은 정부관리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교권에까지 도전하였다. 스페인 제국의 몰락으로 가톨릭 선교는 스페인 제국의 도덕적,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양떼들은 비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은 남아메리카에 제한되지 않았다. 수년 동안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 지역에서까지 광대한 선교활동이 행하여졌다. 프란시스코 선교사들이 1526년 플로리다에 입국했다. 1542년까지 그들은 뉴멕시코까지 진출하였다. 2년 후에 텍사스에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655년에 스페인선교사들, 도미니크,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이 플로리다와 조지아 지방에 35개 선교기지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704년에 영국인들에 의해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1632년 앤드류 화이트(1579-1656)신부와 두 명의 다른 예수회 수도사들이 볼티모어경과 함께 체사피크 만으로 항해하였다. 화이트 신부는 인디언들의 언어를 습득한 뒤 개종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교리문답서를 만들었다. 10년 후 백인 약탈자들에게 붙잡혀 영국으로 끌려갔다.
뉴프랑스(캐나다)에서는 인디언들의 개종이 초기 프랑스 탐험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퀘벡 시의 설립자인 사무엘 드 챔플레인은 “한 영혼의 구원이 한 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가치있다”고 선포하였다. 최초의 교구(퀘벡)는 1674년에 조직되었다. 캐나다의 선교사들은 프랑스인들이었는데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선교사들보다 훨씬 더 도량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의 선교사역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구분포와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씨, 이러케이족을 중심으로 한 인디언들의 전투적 성향 때문에 몹시 어려웠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은 캐나다에서의 로마 가톨릭 선교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다.
7) 아프리카
1454년에 교황 니콜라스에 의해 도입된 이 후원제도에 의하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복음화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1483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디오고 카오가 콩고에 도착하였다. 4년 후에 바르돌로뮤 디아즈가 희망봉을 발견하였다. 서부해안의 콩고와 앙골라, 동부해안의 모잠비크, 로데시아, 마다가스카르에 선교기지가 설립되었다.
콩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부여되었다. 최초의 기독교인은 디오고가 포르투갈에 끌고 간 포로들이었고 세례도 받았다. 1491년 왕과 그의 부인 아들 한 명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 개종은 표면적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선교사업을 지원하고, 교회를 건축하며, 더 많은 선교사들을 초청하였다.
콩고 왕자들이 리스본에 보내져서 성직자가 되는 훈련을 받았으며, 헨리 세자는 귀국 후 국가의 수도인 산살바도르의 최초의 주교로 서품 받았다.
최초의 예수회 분견대원 네 명이 1548년 도착하여 3개월 이내에 5천 명 이상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콩고 선교는 마탐바의 여왕 징가가 심각하게 타락한 이후, 1655년 진실하게 회심하고 나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선교활동을 지원한 이후에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콩고의 왕과 여왕의 태도에 따라 기독교가 강화되기도, 이교도 관습으로 되돌아가기도, 구종교를 선호하기도 하고 선교사와 개종자들을 핍박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콩고에서의 기독교는 성직자의 부족으로 인하여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앙골라는 1520년에 왕과 백성들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에 의해 무역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선교사는 콩고에서 온 한 자제였는데 왕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왕은 후에 이방종교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560년 콩고 선교가 쇠퇴한 후 네 명의 예수회 수도사들이 포루투갈 대사를 따라 앙골라에 들어가 국왕 담비를 개종시키려고 했으나 도리어 투옥되었다. 그 후 새로운 왕위에 오른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개종함으로써 상황은 역전되었다. 16세기 말엽 로안도와 마사간에는 2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기아나에는 일찍이 14세기에 베닌에 선교기지가 설립되었는데 쇠퇴해버렸다. 17세기 초 예수회 수도사들이 선교활동을 재개했을 때 여러 명의 왕들이 전도받기를 원하였다. 그들 중 몇 명은 그들의 신하들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후에 이 선교활동은 상류 기아나에 카르멜파 수도사들이, 하류 기아나에 카푸친회 수도사들이 도착하면서 증대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 선교활동은 잠비아와 시에라리온까지 확대되었다.
가톨릭 선교는 아프리카 동부해안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잠비크의 최초의 선교사들은 인도 고아 지방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이들은 인함반의 왕 감바와 그의 400여 명의 신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후 탐험대 대장 곤칼로 신부는 모노모타파 왕국에 황제와 그의 신하에게 세례를 주었고 동아프리카 지역에 기독교가 확고히 뿌리박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정치적 야망과 선교사를 결부시킨 한 이슬람교도의 음모로 인해 골칼로를 살해하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박해가 시작되었고 선교활동은 중단되었다. 포르투갈은 곤칼로 살해를 복수하기 위해 징벌 원정대를 파견했으나 도리어 동아프리카 왕들의 관심을 더욱 잃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1577년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모잠비크에 들어가 내륙을 횡단하며 가는 곳마다 이슬람 사원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전의 개종자들은 이방종교로 되돌아갔는데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1607년 예수회 수도사들은 모잠비크 오지에서 두 번째 시도를 하였다. 조금 성공적이었다. 1624년 이르러서는 24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는데 그들 중 12명은 모잠비크 대학에서 활동하였다. 이때에 귀중한 개종자 중의 한 사람이 국왕 유수프였는데 그는 선교지원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이슬람교로 다시 돌아가 결국 그 지역의 모든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1630년부터 잠베시 선교활동은 시들해지기 시작하였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가장 선교하기가 어려운 나라 중의 하나였다. 1648년에 최초로 빈센틴회 수도사들이 전도단에 의해 파견되었다. 세 번의 파견과 이들의 빠른 죽음으로 선교는 붕괴되고 말았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아프리카에서 로마 가톨릭 선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대규모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요인들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활동하기 어려운 기후와 근대적 의약품의 부족으로 인한 선교사들의 높은 사망률 그리고 모든 선교사들이 포르투갈 출신이었는데 당시 포르투갈인이 종사한 무자비한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나쁜 인상을 준 점, 교회교육과 토착교회를 위한 지도자 양성의 실패, 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아프리카 종족들간의 전쟁, 그들의 살해와 약탈습성 등, 그러나 위의 모든 것들보다 정확하고 유력한 원인은 선교사들의 피상적인 선교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조급한 ‘개종’을 시켜 대량 세례를 주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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