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미국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 A.D. 1750-1850
글-주태근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근대 선교의 아버지’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선교의 ‘위대한 세기’의 시작을 위해 공헌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로 유럽의 식민활동으로 대로가 건설되었으며, 증기기관의 발명은 바다여행을 좀 더 빠르고 안전하게 해주었다. 둘째로 종교적인 영향으로 독일에서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과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으로 영국 내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719년 아이작 왓츠는 ‘햇빛을 받는 곳마다’라는 선교 찬송가을 작시하였고, 이교도 선교를 위한 중보기도의 중요성의 발견과 20년 후 기도단체들이 전 영국에 세워졌다. 이 기도회는 1746년 미국에 영향을 끼쳤고 1783년 영국 교회 모든 침례교회와 교역자들이 이방선교를 위해 연합 중보기도회를 매월 첫 월요일에 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윌리암 케리(1761~1834)가 무대에 등장했다. 14세 때 그는 하클레턴에서 구두장이의 도제2) 노릇을 하였다. 18세 회심한 후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떠나 ‘비국교도의 모임’에 몸담고 즉각 근처의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침례교에 가담하도록 설득 당하였다. 26세 때 그는 존수트클리프, 존 라일랜드, 앤드류 풀러로부터 공식적인 안수를 받았다. 이 기간 중에도 구두를 고치고, 주중에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주일에는 설교하였다. 여가 시간에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를 읽고 윌리암이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외부세계를 다룬 책이라면 구스리의 『지리입문』을 포함한 모든 책을 섭렵하였다. 또한 그는 요나단 에드워드와 덴마크 할레 선교회와 뉴잉글랜드의 존 엘리오트, 모라비안 선교사들에 대해 정통하고 있었다.
1792년 케리는 『이방인 구원을 위해 사용할 방법을 탐구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케리는 의자에 앉아 탁상공론하는 정략가는 아니었다. 그의 즉각적인 목표는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견할 선교회를 결성하는 일이였다. 이 일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침례교인들에게 쉽지 않았다. 그는 비전을 이해하는 몇 명의 친구들인 존 수트클리프, 앤드류 풀러, 사무엘 피어스 등 조차도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라 신중할 것을 권면하였다.
1792년 5월 30일 노팅햄 침례교 교역자 회의에서 이사야 54:2~3을 요지로 획기적인 설교를 한다. 이 설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는 2행연구(Couplet)를 만들어 전하였으며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즉각적 실행을 독려하며 ‘이방인 복음전도를 위한 침례교 선교회’를 결성하는 계획안을 세우도록 결정하고 해산하였다. 다음회의는 10월 2일 캐터링(Kettering)에 있는 앤드류 풀러의 예배당에서 열렸으나 사람들은 모두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케리는 포켓에서 『모라비안 선교의 정기적 사건』이라는 소책자를 꺼내들고 글썽이는 목소리로 “만약 여러분이 이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를 안다면 믿음으로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방인 복음전파를 위한 침례교의 특별선교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사업은 개개인의 기부로 13명이 그 자리에서 13파운드 2실링 6펜스를 기부하였다.
그러나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 중 가족문제(아버지와 아내의 반대), 재정, 선교지 등 모든 면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풀고 1793년 6월 13일 인도로 항해하였다. 부인과 네 명의 자녀, 두 명의 동료가 그를 따랐고, 5개월 뒤 도착하고 40년간 불굴의 사역을 하였다.
그의 노력과 편지에 의해 유럽과 미국에서 선교회들이 구성되었는데: 런던 선교회(1795), 스코틀랜드와 글래스고우 선교회(1796), 네덜란드 선교회(1797), 교회 선교회(1799),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1804), 아메리카 해외선교회(1810), 아메리카 침례교 선교연합(1810) 그리고 아메리카성서공회(1816) 등이었다.
1) 미국에서의 선교
이때쯤 대서양의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움직임이 조용히 그러나 멀리 그 파급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1802년 코네키컷에 쟁기질하는 사무엘 밀즈(Samuel G. Mills)에게 왔다. 4년후 윌리암스 대학에 사역준비를 위해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제임스 리차즈, 프란시스 로빈스, 하비 루미스, 그든 홀, 루터 라이스 등을 만나 기도와 토론을 하였는데 하루는 기도하러 가던 길에 갑작스런 천둥번개를 만나 근처의 건초더미 밑에 대피하여 이방세계를 위한 평소의 기도회를 갖고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뜻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 후로 그들은 ‘건초더미 그룹’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구 칼빈주의자들이 세운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하고 후에 해외의 기독교 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다. 여기서 브라운 대학의 아도니람 저드슨,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뉴엘, 유니온 대학의 사무엘 노트 주니어를 만났다.
1810년 6월 28일 저드슨, 밀스, 노트, 뉴웰은 매사추세츠 회중교회목회자회의에 그들 자신을 선교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내용과 조언, 방향제시를 담은 글의 기도제목의 청원서를 냈다. 다음날 위원회는 승인하였고 추진되었다. 이것이 미국 해외 선교운동의 소박한 시작이었는데 오늘날 이 선교부는 전세계 선교세력의 70%와 재정의 80%를 거의 공급하고 있다. 이후 국내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2회 회의에서 “이 선교부는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이방민족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겠다”는 희망을 표현하였다. 1817년 시작하여 1883년 사이 인디언 4개부족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15개 종족이 복음화 되었다.
해외선교는 어려운 문제였다. 선교지와 방법에 대한 문제와 지원에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로 프룬샬 위원회는 런던선교부(London Mssionary Society)와 협력을 상의하였으나 런던선교부는 미국선교부가 자체의 신분과 자치제를 유지하자는 제안을 했고, 버마를 첫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1812년 9월 하트포드에 열린 제3차 연례회의때 네 종류의선교지를 선택했다. (1) 고대 문명지의 사람들 (2) 미개지의 사람들 (3) 고대 기독교 지역에 사는 사람들 (4) 이슬람교도들 이었다.
저드슨, 노트, 뉴웰, 홀(Hall) 등 네 명의 젊은이들이 2차 연례회의 때 지명되었으나 재정에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출발하기에 재정은 교통비 밖에 없었다. 그러나 1812년 1월 27일 네명의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단 아내들은 충분한 자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표결하였다. 선교사들이 항해 편을 예약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약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3주 이내에 옷과 교통비 뿐 아니라 1년치 월급까지도 접수되었다. 최초의 일행은 8명의 선교사로 구성되었다. 저드슨, 뉴웰, 노트와 그의 부인들, 고든 홀, 루터 라이스였다. 1812년 2월 6일 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안수 받았는데 "마치 숲속에 나무들이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감동된 예배였다"고 하였다.
2주 후 그들은 4개월 걸려 인도에 도착하였으며, 이것이 최초의 미국 선교의 시작이었다. 초기선교지로 실론(Ceylon, 1816), 근동(1820), 중국(1830), 마두라(Madura 1834) 등이었다.
저드슨은 도착 후 즉시 세례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바꾸어 케리의 동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윌리암 와드(Wiliam Ward) 목사에게 세람포어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는 회중교회를 사임하고 침례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이로 1814년 5월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부의 발족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1813년 7월 13일 저드슨은 동인도회사에서 인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제2의 선교지 랭군(Rangoon)에 도착하였다.
다른 선교부들도 급속하게 조직되었으며 감리교 감독교회(1819), 개신교 감독교회(1821), 장로교회(1831), 복음주의적 루터교회(1837) 등이 세워지고, 이후 714개의 해외선교기구들이 생겨났다. 이들 기관의 예산이 10억 1천 5백만 달러였고, 200개국 53,000명의 전임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전체 숫자의 70%를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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